세계 최초의 웹 서버 (NeXT) from info.cern.ch



이제 인터넷 역사의 현장은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간다. 유럽에서도 스위스와 프랑스의 접경에 있는 제네바에는 과학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소가 하나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얼마 전 신의 입자로 얼려진 '힉스 입자(Higgs boson)'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 CERN)가 그것이다. 


CERN은 1954년 서부 유럽의 12개 국가가 펀드를 모아서 설립하였다. CERN이라는 이름 자체는 연구소가 설립되기 이전의 위원회를 의미한 것이라서 이제는 맞지 않지만, 이후의 공식명칭을 약자로 했을 때 워낙 읽기가 좋지 않자 당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세계적인 과학자 중의 한 명이 하이젠베르크가 그냥 계속 CERN으로 부르자고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서 현재는 특별히 의미와 관계없이 CERN으로 표기하고 있다. CERN에서 세계적인 연구가 수행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와 같이 다국적인 과학자들이 모여들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입자가속기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힉스 입자를 발견하게 만든 입자가속기를 LHC(Large Hadron Collider)라고 부르는데, 빅뱅 당시와 유사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건설된 이 기기의 크기는 둘레가 무려 27km에 이르는 지하가속기 터널이다.


CERN은 이와 같이 세계적인 물리학자들의 요람으로도 유명하지만,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신화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이하 웹)이다. 웹은 CERN에서 일하던 물리학자인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1989년에 시작해서 1990년 로버트 까유(Robert Cailliau)가 합류했던 ENQUIRE라는 프로젝트에 의해 탄생하였다. ENQUIRE는 앞서 언급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개념으로 시작되지만, 처음에는 연구자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였다. 첫 번째 웹 사이트는 1991년에 공개되었다. 


팀 버너스-리의 제안서는 하이퍼텍스트의 형태로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링크를 클릭하고 이로 인해서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것인데, 이는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UX였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아이폰이 탄생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터치기반 인터페이스가 탄생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터넷이 활성화되고는 있었지만, 물리학자들이 학술정보를 효과적으로 탐색하는 것은 성가시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팀 버너스-리는 하이퍼텍스트를 적용한 것이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HTML 문법을 디자인하였다. 최초의 웹 서버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이후에 만든 넥스트(NeXT) 컴퓨터가 이용되었는데, 팀 버너스-리와 로버트 까유에 따르면 넥스트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를 쉽게 구현할 수 있는 멋진 객체지향 컴퓨팅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스티브 잡스 역시 웹의 탄생에 엄청난 기여를 한 셈이다. 팀 버너스-리는 브라우저 편집기를 통해 웹을 정보를 쉽게 공유하고 편집하는 그런 창조적인 공간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처음 만들어진 웹 사이트에는 하이퍼텍스트가 무엇이고, 어떻게 웹 페이지를 만드는지에 대한 기술적인 설명, 그리고 소스코드를 FTP를 통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링크까지 걸려 있었다. 이 웹 사이트는 웹과 관련한 표준을 만들고 운영하는 W3C에 의해 보존이 되고 있는데,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팀 버너스-리가 처음으로 만들어 공개한 세계 최초의 웹 페이지



처음에는 CERN 내부에서 물리학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연구논문이나 문서를 서로 쉽게 브라우징할 수 있는 용도로 쓰이던 웹 기술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사용한 곳은 스탠포드 대학의 SLAC(Stanford Linear Accelerator Center)이었다. SLAC에는 특히 30만 개가 넘는 물리학 관련 문서들을 보관한 데이터베이스가 있었는데, 이는 거의 물리학자들에게는 보물창고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스탠포드 대학의 물리학자인 폴 쿤즈(Paul Kunz)는 SLAC의 데이터베이스를 전 세계의 물리학자들에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름의 인스턴트 메시징 데이터베이스 질의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이메일도 활용했는데, 모두들 데이터베이스 질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쓰는데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폴 쿤즈는 1991년 9월 CERN에 방문했다가 팀 버너스-리가 웹을 데모한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 이를 이용한다면 전 세계의 물리학자들이 너무나 쉽게 연구논문을 브라우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스탠포드로 돌아오자 C로 만들어진 CERN의 웹 서버 소스코드를 다운로드 받아서 스탠포드 대학의 메인프레임에서 동작하도록 코드를 수정하고 적용해서 1991년 12월에 SLAC의 웹 서버가 가동된다. 1992년 2월 남부 프랑스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에 대한 워크샵이 열렸는데, 이 워크샵에서 팀 버너스-리가 200여 명의 물리학자들 앞에서 웹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다. 그의 강의를 지루하게 듣는 표정이 역력하던 물리학자들은 발표가 끝나기 전 팀 버너스-리가 웹에 대한 데모를 하면서 SLAC 웹 서버에 접속해서 수 많은 논문들을 브라우징하는 것을 보자 모두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보면서 모두가 웹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최초의 웹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되어 주변으로 전파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인터넷의 역사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혁신으로 일컬어지는 웹 기술 역시 과학자들의 제한없는 공유정신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 한 가지 웹의 탄생의 역사에서 언급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웹을 탄생시킨 CERN의 문화이다. CERN에 모인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학문에만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보다 창조적이고, 열정적이며,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문화를 즐기고 널리 퍼뜨릴 줄 알았다. CERN의 환경은 최근 구글 등이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게 음식과 음악, 그리고 놀 수 있는 장소나 이벤트가 계속되는 곳이었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재미있는 시도를 개방된 마음으로 쉽게 받아들인 곳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것이 바로 CERN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LHC(Large Hedron Collider)의 약자를 완전히 다르게 풀어서 1990년 결성한 여성 그룹인 또 다른 LHC(Les Horribles Cemettes)의 존재이다. CERN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미셀 드 게나로(Michelle de Gennaro)가 결성을 주도하였는데, 이 그룹은 CERN의 해드로닉 페스티벌(Hadronic Festival)기간 동안 CERN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충돌자(Collider)"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가사의 내용은 고에너지 물리학자의 여자친구로서 외로운 밤을 견뎌내야 하는 아픔(?)을 표현한 것인데, 가사 하나하나가 전문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위트가 있어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이들은 유명세는 국제 물리학회, 세비야에서 열린 1992년 세계 엑스포, 노벨상 수상파티 등과 같은 굵직한 행사에서도 초청공연을 하는 등 하늘을 찔렀고, 주요 언론매체 등에서도 다루면서 이후 장수하는 그룹으로 음악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중간중간 멤버의 교체가 있었지만, 이들은 2012년 7월 12일 이들을 탄생시킨 스위스 CERN에서의 해드로닉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면서 22년이라는 오랜 활동의 막을 내렸다. 아래 유튜브 영상은 이들의 대표곡 "충돌자(Collider)"의 뮤직비디오이다. 






이처럼 제일 고리타분할 것 같았던 물리학자들의 요람이었던 CERN은 창의적인 발상과 자유, 그리고 서로 나누는 그런 철학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1993년 4월 30일, CERN은 이들의 철학에 맞는 멋진 결정을 또 다시 내리게 되는데, 어찌보면 인터넷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었던 웹 기술을 누구나 쓸 수 있도록 권리를 자유롭게 풀어줌으로써 인터넷은 또 한 번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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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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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의 주인공은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에 이어 애플의 CEO 로 선임되어, 이후 스티브 잡스가 복귀할 때까지 애플을 지휘하는 길 아멜리오(Gil Amelio) 입니다.  그는 가장 과소평가 받은 애플신화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애플의 중흥기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반도체 회사의 사장, 애플의 이사가 되다.

길 아멜리오는 내셔널 반도체(National Semiconductor) 출신입니다.  적자회사를 흑자회사로 반전시킨 CEO 로서 애플은 그들의 중요한 고객이자 협력업체의 하나입니다.  특히 연구자로서도 스캐너와 캠코더, 디지털 카메라의 기본이 되는 CCD(Charge-Coupled Device) 기술을 처음 발명하는데 관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런 그에게 애플은 이사회의 멤버 중의 한명이 되어주기를  제안하였고, 길 아멜리오는 이를 받아들여 1994년 애플의 이사가 되었습니다.

2년간 마이클 스핀들러가 CEO 직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서, 애플이라는 회사의 경영 난맥상을 지켜보면서 많은 비판의 소리를 내던 그는, 1996년 2월 애플의 공동설립자 중의 한 명인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의 지지를 등에 업고 애플의 CEO 로 500일간 일을 하기로 하고, 이후 커다란 보너스와 연임과 관련한 평가를 이사회에서 받기로 합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을 애플의 임원들로 입사를 시켜서, 애플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전략을 처음부터 새로 짜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특히 엘렌 행콕(Ellen Hancock)을 CTO 로 기용하는데, 그녀는 IBM 에서 일한 베테랑으로 길 아멜리오를 따라 내셔널 반도체로 옮겼다가 같이 애플로 자리를 옮겨서 중책을 맡았습니다.  전략의 결론은 고급스럽고, 신뢰도가 높은 고마진의 제품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를 위해서는 애플에게 현금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애플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정도로 취약해져 있었습니다.

기존 경영진과의 미팅은 길 아멜리오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CEO 는 수주 전에 미팅을 예고하고, 미래계획에 대한 준비를 하라고 공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신의 부서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앞으로 잘될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 밖에는 없었고, 매분기 수백만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 미팅에서 아멜리오는 이 상태로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물론 다른 어떤 회사도 애플을 인수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애플은 점차 돈줄이 말라가고 있었고, 빨리 어떤 형식으로든 매각을 하거나 자금수혈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피말리는 스케쥴이었지만 길 아멜리오와 그가 데려운 CFO 인 프레드 앤더슨(Fred Anderson)은 회사채를 발행하기로 하고, 골드만 삭스를 설득해서 총 $6억 6100만 달러에 이르는 규모의 회사채를 매각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를 통해 최소한 1997년까지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의 숨통을 트게 되는데, 이것이 길 아멜리오가 CEO 로서 애플에게 안겨준 최고의 성과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위기, 출구가 없다.

당장 급한 자금문제는 해결했지만, 윈도 95의 출시와 함께 완연히 밀리기 시작한 PC 사업부문의 전망은 어두웠습니다.  거기에 새로 출시하는 제품들의 불량이 많아지고, 심각한 디자인의 오류까지 발견되면서 그동안 쌓아둔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Performa 6400 의 경우 가장 중요한 허브 맥으로 개발되어 수많은 번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컴포넌트로 구성된 최초의 미니타워 제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얼 포트를 하나 밖에 내장하지 않아서 모뎀과 프린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최악의 디자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또한, 톰 크루즈까지 기용하면서 화려한 마케팅을 준비하고 기대를 모았던 파워북 5300은 출시를 앞두고 싱가폴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나면서 제품의 생산이 중지되는 사건과 함께 초기 선적된 1,000대의 파워북 전체가 리콜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니에서 납품한 리튬이온 배터리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만, 애플의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힙니다.

애플의 또 하나의 걱정거리는 운영체제였습니다.  맥 OS 는 줄곧 마이크로소프트를 앞서 왔지만, 윈도 95 출시 이후에 이런 격차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다시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시스템 7 을 능가하는 혁신적인 운영체제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코플랜드(Copland)라는 코드명을 가진 운영체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시킵니다.  그러나, 애초 예정되었던 완료시기인 1995년을 훌쩍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는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 아멜리오는 500명이 넘는 엔지니어들이 작업을 하고는 있지만, 아마도 이 프로젝트는 실패할 것이라는 강한 의심과 함께 대안을 찾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대안은 코플랜드 프로젝트와 별도로 새로운 시스템 8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스템 7의 업그레이드로 대안을 찾아보려고 한 것으로, 스티븐 글래스(Steven Glass)에게 책임을 맡깁니다.  


외부에서 파트너를 찾아라

다른 대안은 외부에서 수혈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길 아멜리오가 처음 구상한 것은 전격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NT 를 채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PowerPC 워크스테이션에서 동작하는 윈도 NT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윈도 NT 를 채용한다면 애플 스타일의 하드웨어만 제조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관계도 좋게 만들고, 많은 비즈니스 사용자들도 애플 제품을 구매할 것을 고민하도록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 일리가 있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길 아멜리오는 즉시 이 아이디어가 실현가능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빌 게이츠와 통화를 시도합니다.  빌 게이츠는 길 아멜리오의 생각에 즉시 화답을 하면서, 애플의 중요한 자산인 QuickDraw 를 포팅하기 위해 수백 명의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를 보내주겠다는 제안까지 합니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존의 맥 커뮤니티가 대부분 반마이크로소프트 진영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신이 없었고, 또한 현재 맥 운영체제에서 동작하는 많은 소프트웨어를 새로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안으로 길 아멜리오가 생각한 것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솔라리스(Solaris) 운영체제를 채택하는 것 이었습니다.  CTO인 엘렌 행콕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운영체제의 완성도가 높았고, 유닉스 기반의 검증된 운영체제였지만, 애플의 강점인 QuickDraw 를 솔라리스 위에서 동작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인원의 추가 투입이 불가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달리 이 부분에 대한 지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때 애플에서 쫓겨난 쟝 루이 가시(Jean-Louis Gassée)가 부각됩니다.  그는 애플에서 사임한 이후에 Be Inc. 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7년 동안 상업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했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운영체제를 하나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BeOS 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였고, 무엇보다 애플 내부의 엔지니어들이 가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시는 길 아멜리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에게 BeOS 를 이용해보라는 제안서를 제출합니다.  동시에 데모를 준비했는데, 애플의 Power 타워 맥에서 BeOS를 동작시켰는데 실행속도가 놀라울 정도여서 길 아멜리오가 탄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시와 아멜리오 사이의 인수를 위해 생각하는 가격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협상은 결렬되었지만, 이 이야기의 일부가 언론에 흘러들었고, 애플의 파워북 1400의 성공과 맥월드에서의 길 아멜리오의 키노트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애플에 새로운 서광이 비치는 듯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와의 만남

Be 와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스티브 잡스가 움직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난 이후 NeXT 와 픽사(Pixar)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맥월드를 통해 자신의 마케팅 매니저가 엘렌 행콕과 이야기를 한 뒤에 NeXTstep 운영체제의 애플탑재와 관련한 컨퍼런스 콜 일정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첫번째 컨퍼런스 콜 일정을 순조롭게 마친 이후에, NeXT 와 애플은 거의 매일 만나서 NeXTstep 이 맥 OS를 대체하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NeXT 의 수백 명의 개발자와 고객, 직원들에 대한 인터뷰를 실시하여 NeXT 가 가지고 있는 기술 및 인원들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긍정적인 협상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애플과 NeXT 의 만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맥의 판매도 증가하는 좋은 소식의 와중에 길 아멜리오 개인에게 커다란 문제가 생깁니다.  길 아멜리오는 아마추어 파일럿으로 제트 비행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Aero 라는 독립회사를 하나 설립해서 자신으 비행기 운용을 합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연료비용이나 유지보수 비용을 모두 애플에게 맡긴 것이 언론에 의해 집중적으로 파헤쳐지면서 도덕성에 많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새로운 애플의 운영체제의 자리를 놓고, 스티브 잡스와 쟝 루이 가시라는 두 명의 애플 출신 사업가들과의 담판은 1996년 12월 10일에 이루어집니다.  길 아멜리오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자신들의 제안을 하도록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NeXTstep 의 미래지향적인 기술들을 중심으로 설득을 하였고, 가시는 이미 데모를 통해 보여줄 것은 보여주었다면서 새로운 것은 없다는 식의 PT를 합니다.  길 아멜리오는 가시의 성의없음과 스티브 잡스의 성실한 준비를 비교해보고 주저없이 NeXT 를 파트너로 지목하고, 뒤이어 열린 이사회에서 NeXT를 인수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사회에서는 NeXT 인수가격에 대한 걱정을 하였지만, 모든 것을 길 아멜리오에게 일임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인수결정과 함께 길 아멜리오에게 자신이 작더라도 애플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하나 마련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길 아멜리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스티브 잡스를 새로운 운영체제와 관련한 책임을 맡기겠다고 하고, NeXT를 $4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지만, 길 아멜리오는 새로운 운영체제와 함께 스티브 잡스를 얻었고, 300명의 뛰어난 직원들과, 매해 $5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뛰어난 소프트웨어인 WebObject와 OpenStep을 같이 얻었기에 그 비용이 결코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협상은 보통 현금으로 지불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길 아멜리오는 스티브 잡스에게 애플에 대한 충성도를 요구하면서 애플의 주식 150만 주를 주고, 현금은 $1.2억 달러만 지급합니다.  협상이 거의 마무리되고 발표만 남은 순간,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새로운 엔지니어 부분 책임자로 임명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마음이 급해진 길 아멜리오는 회장인 마이크 마큘라의 자문직을 요청하게 되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수락하면서 애플은 NeXT와 스티브 잡스를 얻게 되었습니다.


시련의 시작, 스티브 잡스의 반란

NeXT 는 얻었지만, 애플이 치러야할 대가는 컸습니다.  길 아멜리오는 자금을 위해 상당한 수의 직원들을 정리하였고, 수익이 나지 않는 많은 프로젝트를 정리하면서 회사의 구조조정을 단행합니다.  제품 기반의 회사구조는 단순하면서도 의사결정이 쉬운 형태로 재정비되었고, 중복이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모두 정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애플에 오래 몸을 담았지만, 더 이상 혁신의 가능성이 없는 오래된 임직원들이 대거 쫓겨나게 되는데, 한해 동안 거의 6,000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정리해고 되거나 자발적으로 애플을 떠납니다.

이 과정에서 길 아멜리오는 애플 내부의 인심을 잃었습니다.  반대로, 스티브 잡스는 NeXT 의 엔지니어들을 회사의 주요한 부서에 위치시키면서 조금씩 회사를 장악해 나갑니다.  특히 CTO 였던 엘렌 행콕은 스티브 잡스의 가장 중요한 정적으로, 결국 그 자리는 스티브 잡스가 가장 신뢰하는 개발자이자 NeXTstep의 가장 중요한 마이크로커널을 개발한 에이비 테바니언(Avi Tevanian)이 차지하였으며, NeXT의 하드웨어를 맡았고, 향후 팜의 CEO를 거쳐 현재는 HP의 요직을 맡고 있는 존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가 하드웨어 총책임자 자리에 오르도록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길 아멜리오는 미국정부로부터 애플의 대주주 중의 한 명이 150만 주에 이르는 애플 주식을 팔아치웠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이 사건으로 애플의 주식은 급락을 하였는데, 길 아멜리오는 스티브 잡스를 의심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만, 결국에는 길 아멜리오의 지배체제 하에서의 애플은 미래가 없어서 주식을 모두 팔았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길 아멜리오를 공격합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길 아멜리오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빅딜을 추진합니다.  빌 게이츠에게 연락을 해서 매킨토시용 오피스의 개발을 간청하고, 동시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모든 매킨토시에 번들로 도입하겠다는 나름 파격적인 제안을 하지만 빌 게이츠는 이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약속된 500일을 하루 남겨둔 애플의 CEO 로서의 499일이 되던 날, 길 아멜리오는 애플의 이사회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애플 이사회는 길 아멜리오의 연임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CFO 인 프레드 앤더슨이 적당한 인물을 찾을 때까지 임시로 회사를 운영하라는 결정과 함께 애플을 떠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길 아멜리오는 짧았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의 애플을 최선을 다해 이끌어간 좋은 CEO 였다는 생각입니다.  초기 자금유동성 위기를 겪을 때 골드만삭스와의 회사채 발행협상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고 성장동력을 만들어갈 초석을 다졌고, 무엇보다 NeXT의 인수를 통해 오늘날 애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사실 상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악역을 자처하고 과거의 관료화된 조직을 모두 쳐내면서 그 역풍을 온몸으로 받게 되었는데, 이런 그의 작업들은 이후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애플의 시대를 열어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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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매킨토시의 판매가 시작되었던 1984년, 초기 매킨토시는 대학교를 중심으로한 판매가 상당히 순조로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같은 해 실리콘 밸리에서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이던 미테랑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점심연회가 열렸는데, 스티브 잡스는 주로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에게 컴퓨터 개발과 관련한 여러가지 조언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노벨 화학상 수상자였던 폴 버그(Paul Berg)는 스티브 잡스를 만난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복잡한 화학구조나 DNA 등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고사양의 컴퓨터가 부족하다고 하면서, 스티브 잡스에게 "3M" 컨셉을 구현할 수 있는 워크 스테이션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우습지만, 그가 말한 "3M" 이란 1MB가 넘는 RAM 과, 메가픽셀(백만화소) 디스플레이, 그리고 1메가플롭(megaflop, CPU의 속도단위)을 넘는 수행성능을 가진 워크 스테이션입니다.  후일 실제로 개발된 NeXT 컴퓨터는 당시 CERN 에서 일하던 팀 버너스 리(Tim Berners-Lee)가 HTML 언어를 개발하고, 첫번째 웹 서버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현재의 웹을 있게 만드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NeXT 의 설립

폴 버그의 개념에 깊은 인상을 받은 스티브 잡스는 1985년 존 스컬리와 애플 이사회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난 직후 실제로 이를 구현하기로 마음먹고 설립한 회사가 바로 NeXT Inc. 입니다.  몇 명의 동료들이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떠나서 동참을 하였고, 스티브 잡스를 좋아했던 폴 버그와 여러 대학교수들이 스티브 잡스를 측면에서 지원합니다.  다양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워크스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의 사양을 정했지만, 가격은 대학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애플은 스티브 잡스를 애플의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회사를 운영한다면서 고소합니다.  당시의 애플은 4,300명이 넘는 종업원과 회사의 가치도 2조원을 상회하고 있었기에, 단 6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던 NeXT 에 대한 고소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킵니다.

NeXT 에는 백만장자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로스 페로(Ross Perot)가 첫번 째 외부 투자자가 됩니다.  1987년 그는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투자하고 NeXT의 주식 16%를 획득하였으니, 그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던 NeXT 라는 회사의 가치를 무려 $1억 2500만 달러로 계산한 것입니다.  


NeXT 워크스테이션의 출시

실제로 NeXT 워크스테이션을 제작하기 위해서 현재도 컴퓨터 과학도의 성지로 불리는 카네기 멜론(Carnegie Mellon) 대학에서 유명한 마하(Mach) 커널을 개발한 엔지니어 중의 한 명인 에이비 티베니언(Avie Tevanian) 이 NeXT 에 합류하면서 NeXT 워크스테이션 개발은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그는 이후 현재의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근간을 이루게 되는 NeXTSTEP 운영체제를 개발합니다.  그리고, 하드웨어는 애플의 리사(Lisa) 제작팀을 이끌었던 리치 페이지(Rich Page)가 개발책임을 집니다.  리치 페이지는 스티브 잡스가 NeXT 를 설립할 때 애플에서 동행한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NeXT 컴퓨터는 1988년 드디어 그 모습을 실제로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외양이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대부분 넓적한 직육면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컴퓨터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30cm x 30cm x 30cm 의 완전한 정육면체의 마그네슘 케이스를 가진 컴퓨터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컴퓨터는 정식명칭인 'NeXT Computer' 라는 이름보다는 'The Cube' 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됩니다.  1989년 테스트를 거쳐 적은 수의 큐브가 당시 베타 버젼이었던 NeXTSTEP 운영체제가 올라간 상태로 대학에 판매가 되는데, 가장 기본형의 가격이 $6,500 달러로 책정되었습니다.  비록 많은 수가 뿌려지지는 않았지만, NeXT 는 수많은 컴퓨터 관련 잡지의 집중조명을 받았습니다.  NeXT Computer 는 모토롤라의 25 MHz 68030 CPU와 8~64 MB 의 RAM, 256 MB 의 MO(magneto-optical) 드라이브, 330/660 MB 하드디스크와 10Base2 이더넷 네트워크, NuBus 그리고 1120x832 해상도를 지원하는 17 인치 메가픽셀 그레이스케일 디스플레이까지 당시로서는 최고의 사양을 자랑한 컴퓨터 였습니다.  같은 시기 IBM 호환 PC 는 보통 640 KB ~ 4 MB RAM 과 80286/386 CPU 와 10~20 MB 하드디스크를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1989년 일본의 캐논이 NeXT 에 $1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16.67%의 지분을 획득합니다.  이는 회사의 가치가 이제는 $6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캐논은 컴퓨터 자체보다 NeXTSTEP 운영체제의 가능성을 높이 샀다고 합니다.  NeXT 가 실제로 일반에게 판매가 시작된 것은 1990년의 일입니다.  가격 역시 $9,999 달러로 일반인들은 구매하기 어려운 '꿈의 컴퓨터'로 불렸습니다.

이와 함께 1990년 NeXT 는 2번째 워크스테이션 시리즈인 NeXTcube 와 NeXTstation 을 내놓습니다.  이 워크스테이션은 업계 최초로 CD-ROM 드라이브를 채용하는데, 이것이 결국 컴퓨터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NeXT 의 하드웨어 사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과감히 하드웨어 사업부분을 정리하고, 강력한 성능을 보여주었던 NeXTSTEP 운영체제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NeXT, 새로운 기술의 탄생을 돕다.

비록 NeXT 의 워크스테이션이 업계에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수의 기념비적인 기술들이 NeXT 플랫폼을 이용해서 세상에 나타납니다.  팀 버너스-리는 1991년 NeXT 컴퓨터를 이용해서 최초의 웹 브라우저와 웹 서버를 만들어 냅니다.  또한, 전설의 3D 게임 개발자인 존 카막(John Carmack)은 NeXT 컴퓨터로 2개의 파격적인 게임을 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울펜스타인(Wolfenstein) 3D 와 둠(Doom)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과학기술계산 패키지로 많은 명성을 쌓고 있는 Mathematica 도 처음에는 NeXT 플랫폼에서 개발되었습니다.


이후 NeXT 는 NeXTSTEP 운영체제를 다양한 컴퓨터 하드웨어에 포팅을 하면서 OpenStep 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합니다.  하드웨어 사업을 정리하면서 많은 수의 인원을 해고하고, 공장도 매각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결국 NeXT 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면서 애플의 재탄생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NeXTSTEP 은 이후 현재의 애플의 운영체제의 근간이 되는 Mac OS X 의 형태로 재탄생을 하였으며, Objective C 라는 언어를 이용하는 개발자 툴킷은 오늘날 애플 개발자들이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Cocoa 로 재탄생합니다.  또한, 세계 최초의 웹 애플리케이션 서버라고 할 수 있었던 WebObjects 역시 Mac OS X 서버와 Xcode 로 대를 이었습니다.  NeXTSTEP 은 CPU 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CPU 에 포팅이 될 수 있었는데, 이런 특징이 결국 오늘날의 애플이 있게 만든 혁신이 됩니다.  전통적으로 애플이 이용하던 모토롤라의 CPU, 그리고 후에 다루게 될 PowerPC CPU 뿐만 아니라 라이벌이었던 인텔의 x86 아키텍처를 모두 지원할 수 있었기에 향후애플이 인텔의 CPU를 이용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으며, 오늘날 애플의 전성기를 이끌고 있는 아이폰 운영체제의 탄생은 ARM 버젼의 간략화된 OS X 가 나올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NeXT 를 통해 시대를 앞서갈 수 있었던 내공을 쌓을 수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애플의 전성기를 다시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NeXT 를 운영하면서 독특한 경영방식을 실험했던 것들이 애플을 다시 경영하게 되면서 많은 도움을 주게 됩니다.  애플로 복귀한 시기의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던 시절의 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복귀해서 갑자기 무슨 신통방통한 도깨비 방망이를 얻어다가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혁신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 자체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1985년부터 미래를 내다본 꾸준한 투자와 끊임없는 혁신이 NeXT 를 통해 애플에 계승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애플의 재탄생은 꿈도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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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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