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odore 64 : from Wikipedia


IT 삼국지, 장수와 변방국가들도 좀 나와야 겠지요?  오늘은 애플이 혁신을 하던 시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했던 코모도어가 주인공입니다.


애플 II 최대의 라이벌 코모도어 (Commodore)

애플 II 가 맹위를 떨치며 PC 시장을 장악해가는 과정에 가장 커다란 라이벌이 된 회사가 바로 코모도어(Commodore) 입니다.  코모도어는 1954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설립된 역사가 오래된 회사로 타자기와 관련된 사업으로 시작을 해서, 1970년대초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전자계산기 사업을 통해 성장을 하였습니다.  

전자계산기 사업을 하면서 코모도어는 1976년 애플 시리즈의 메인 CPU 인 6502 칩을 생산한 것으로도 유명한 MOS Technolgy를 인수합니다.  그리고, 회사도 MOS Technology에 가까운 펜실베니아의 웨스트 체스터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PC 시장을 공략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1976년 애플-1 이 6502 칩을 이용해서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본 코모도어는 본격적으로 PC 시장에 뛰어들 준비를 합니다.  CPU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상당한 자신감도 있었던 듯하고, 당시 애플이라는 회사는 신생벤처회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코모도어와 애플은 한 차례 만남이 있었습니다.  코모도어의 자회사 CPU를 애플이 사용했기 때문에, 애플 II를 제작할 때에는 스티브 잡스가 마이크 마큘라에게 했듯이 자신의 차고로 코모도어의 경영진들을 데리고 와서 만들고 있는 컴퓨터를 보여주었습니다.  코모도어는 당시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온다고 확신을 하고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애플 II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 마큘라처럼 일정 정도의 투자를 받고 지분을 좀 떼어줄 생각이었는데, 코모도어는 그러지 말고 회사 자체를 넘기라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야망이 있는 스티브 잡스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코모도어는 조그만 회사가 인수합병 제안을 거절하자 투자를 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나섭니다.

애플 II가 발매된 1977년, 코모도어도 애플 II의 라이벌이 되는 제품을 내놓습니다.  PET 라는 이름의 컴퓨터가코모도어의 첫번째 개인용 컴퓨터로 애플 II 와는 달리 케이스를 모두 금속으로 만들었고, 같은 6502 CPU를 이용했지만 단색의 푸른 화면만 제공하는 등 가정용으로 이용하기에는 거리가 먼 제품이었습니다.  PET가 실패하자, 코모도어는 애플 II의 성공이 화려한 컬러를 지원한 것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컬러를 지원하되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하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런 전략에서 탄생한 컴퓨터가 1981년에 발매된 VIC-20 입니다.  이 컴퓨터는 $299 달러라는 파격적인 소매가격과 공격적인 광고를 같이 실으면서 야심차게 등장합니다.  특히 당시 최고의 히트 시리즈이자 미래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는데 최고의 영향력을 가졌던 스타트렉의 주연배우였던 윌리엄 샤트너(William Shatner)가 "왜 비디오 게임기를 구입하시나요? (Why buy just a video game?)" 이라는 카피 문구와 함께 등장하는 TV 광고가 대히트를 하면서, 동시에 애플 II의 고가전략(당시 $1000 달러가 넘었음)과 맞물려 애플 II를 제치고 판매대수로는 가정용 컴퓨터 사상 처음으로 100만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합니다.  VIC-20 은 최종적으로 250만대 정도가 팔린 가정용 컴퓨터 역사에 남는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가 되었고, 코모도어라는 이름을 가정용 컴퓨터의 역사에 뚜렷이 남깁니다.  후속으로 1982년에 발매된 코모도어 64는 사운드와 그래픽 지원이 뛰어난 컴퓨터로 $595 달러의 가격에 발매가 되는데, 이 제품은 무려 2300만대가 팔리는 엄청난 히트 상품이 됩니다.  특히 사운드와 그래픽이 좋았기 때문에, 많은 수의 게임 타이틀이 발매가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미국에서는 코모도어 64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가전략을 내세워서 판매한 후유증은 컸습니다.  판매는 많이 했지만, 이익율은 형편없었고 공격적인 광고와 마케팅을 하느라 비용지출도 많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애플 II는 고급 컴퓨터이고, 코모도어의 컴퓨터는 싸구려라는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어주면서  IBM-PC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의 히트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코모도어의 수장, 기인 잭 트래미엘 (Jack Tramiel)

코모도어를 이끌던 사람은 폴란드 출신의 잭 트래미엘입니다.  1928년 생으로 유태인이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찌의 침공으로 어려운 환경을 겪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가족들이 모두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이슬처럼 사라지기 전에 살아돌아온 유태인 중의 한명입니다.  1945년 기적적으로 구조가 된 그는 1947년 11월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미국에서 육군에 입대하여 타자기를 비롯한 다양한 기계들을 고치는 방법을 배운 뒤에 제대를 하여 택시 운전사로 일하면서 1954년에 창업한 회사가 바로 코모도어 입니다.  이런 개인사를 가지고 있기에 경영에 있어서 모든 부분에 관여하고, 일본식의 관리경영 및 비용절감을 통한 저가전략을 잘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197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에서 컴퓨터를 제조한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못했을 때, 값싼 노동력과 기술력을 믿고 일본에 공장을 설립할 정도로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런 성격을 잘 대별한 것이 코모도어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 및 판매전략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대수의 컴퓨터를 팔아치웠지만, 수익이 저조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1984년 1월 코모도어에서 쫓겨납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난 트래미엘은 차세대 가정용 컴퓨터를 디자인하고 판매하기 위해  Tramel Technology라는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오게 되는데, 비디오 게임으로 승승장구하였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 가정용 컴퓨터의 꿈을 가지게 만든 여러 계기를 제공했었던 아타리 컴퓨터가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약진으로 비디오 게임 시장이 붕괴되어 경영난에 허덕이면서 매물로 나온 것입니다.  트래미엘은 1984년 아타리에서 아케이드 게임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인수합병하고 회사의 이름도 아타리로 변경합니다.

트매미엘이 인수한 아타리는 공격적으로 다양한 가정용 컴퓨터 라인업을 내놓고 비디오 게임에서 가지고 있었던 게임관련 타이틀 등을 많이 제공하는 니치 마켓에 안착을 하면서 재기에 성공합니다.  1989년까지 비교적 착실한 매출과 순이익을 내던 아타리는 1989년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일본의 닌텐도 게임보이에 밀려서 결국에는 1996년 하드디스크 제조업체였던 JTS에 매각됩니다. 

잭 트래미엘은 1980년대 후반 아들인 샘에게 경영권을 넘겼었지만, 1995년 아들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결국 아타리라는 회사를 자신의 손으로 정리를 하였습니다.  그는 IT 산업의 전설로서 남지는 못했지만 코모도어와 아타리라는 굵직한 회사를 경영하면서, 그것도 당대 최고의 회사들과 맞서서 싸운 용장이라고 할만 합니다.  1955년 동갑나기들에 비해 무려 27살이 많았지만, 그가 시도했던 비디오 게임과 가정용 컴퓨터에 대한 철학은 나름의 매니아 층도 형성하였고, 아직도 코모도어와 아타리는 올드 컴퓨터 매니아들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Wikipedia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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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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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뇌리에 박힌 한편의 강의

1972년 스티브 잡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틀랜드 오레곤에 위치한 리드대학(Reed College) 물리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것은 자신을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내세웠던 대학교육을 위해서 양부모들이 모아둔 저축을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한 학기 만에 다 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사실을 양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빌붙어 살면서 2년간 자신이 원하는 여러 수업을 들으러 다닙니다.  그 중에서 그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강의가 있었으니, 바로 서체 디자인(calligraphy) 입니다.  후에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연설을 할 때에 대학시절 수강한 서체 디자인 강의에서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10년 뒤 매킨토시에 구현하면서 전자출판 혁명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대학에서 중퇴하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지정하거나 졸업에 필요한 강의를 위주로 들었을 것이며, 마음이 끌리는 강의를 듣지 못했을 것이기에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처럼 엔지니어라고 하기에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디자인 서체 강의를 도강하면서 서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어갔으며, 그 서체 속에 숨어있는 역사와 세상의 일부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가 스탠포드에서 행한 짧은 14분 남짓되는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그의 인생의 열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꼭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한글자막이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여력이 되신다면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문자막이 있는 영상 임베딩합니다.

 


아타리 컴퓨터를 찾아간 기인

1974년 스티브 잡스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서 배짱좋게 당시 실리콘 밸리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Atari)의 문을 두들깁니다.  놀란 부쉬넬이 창업한 아타리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게임으로도 유명한 퐁(Pong)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벤처기업으로 성장 중이었습니다.  이 게임에 매료된 스티브 잡스는 무작정 아타리의 직원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1974년 가을 아타리를 찾아간 스티브 잡스의 모습은 냄새나는 수염투성이에 장발을 한 더러운 히피(hippie)의 모습 그대로 였다고 전해집니다.  회사의 경비원은 무작정 회사를 찾아와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스티브 잡스를 보고, 부랑자가 찾아왔다면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당시 아타리의 경영진으로 일하고 있었고, 퐁의 게임 디자이너였던 앨런 알콘(Allan Alcorn)은 18세의 스티브 잡스가 HP에서 일했고, 생각보다 기술적으로 해박한 것을 알게 되어 시간 당 $5 달러에 동전을 넣는 당시의 게임기를 고치는 일에 투입할 요량으로 즉석에서 채용을 결정합니다.  

이 때가 1974년 5월로, 스티브 잡스는 잘 나가는 아타리의 40인의 직원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맨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다른 직원들의 일에 간섭을 하고 이상한 말만 하고 다니는 스티브 잡스는 회사의 기피인물 1호가 되어 버립니다.  이에 앨런 알콘은 하는 수 없이 거의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에만 스티브 잡스가 나와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하는 일은 주로 아타리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놓은 디자인을 약간씩 변형하는 것이었는데, 회로를 일부 추가하거나, 다른 소리를 집어넣거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야간에 아타리라는 회사에서 스티브 잡스와 희희낙낙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괴짜 스티브 워즈니액입니다.  HP의 엔지니어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액 역시 아타리의 광팬으로, 심지어는 아타리의 퐁 게임을 자기 마음대로 디자인해서 만든 자신만의 퐁 게임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밤마다 스티브 워즈니액을 아타리 본사로 불러들인 스티브 잡스는 그의 실력을 동료들에게도 자랑을 하였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의 재능을 알아본 앨런 알콘은 그를 아타리에 스카웃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꿈인 전자계산기를 HP에서 만드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액은 그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를 따라 밤마다 아타리를 찾아서 여러가지 일을 같이 (아니 거의 스티브 워즈니액이 도맡아 해결했다고 합니다) 해결하였는데,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쉽게 해결을 하자 아타리의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까지 스티브 잡스를 주목하게 됩니다.  6개월 정도 아타리에서 일을 하던 스티브 잡스는 대학시절부터 심취해 있던 인도로의 영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회사의 수뇌부들에게 자신에게 인도여행을 보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신참내기 직원의 황당한 요구에 당황한 앨런 알콘과 놀란 부쉬넬은 때마침 독일에서 터진 아타리의 게임기 문제를 독일에서 해결한다면 인도로의 여행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짐을 싸서 독일로 날아가서 단 2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리드 대학을 다닐 때부터 친구였고, 동시에 향후 애플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는 댄 콧케(Dan Kottke)와 함께 6개월간의 인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독일에서의 문제는 앨런 알콘이 예상했던 것과 동일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 앨런에게 고치는 법을 배웠던 스티브 잡스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수리를 마칩니다.

스티브 잡스의 인도여행은 그의 기대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물질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하다는 결심을 한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로 복직을 하는데, 그 때에는 과거의 히피 스타일을 버리고 깨끗하게 삭발과 면도를 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앨런 알콘은 그를 다시 과거와 같이 밤에 일을 시키면서 동시에 친한 친구이자 스티브 잡스의 집에서 같이 살던 댄 콧케에게도 일을 맡깁니다.  


전설의 벽돌깨기 게임의 탄생

이 시기에 아타리는 회사의 여러 게임 프로젝트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때 아타리는 원가절감과 함께 벽돌깨기(Breakout) 게임의 디자인과 프로토타입에 대한 사내 아이디어를 수집하면서 하나의 TTL 칩(Transistor-Transistor Logic, 당시 아케이드 게임 대부분에 이용되던 칩)을 줄이는 아이디어에 돈을 겁니다.  보통 하나의 게임에 130~170개 정도의 칩이 들어갔는데, 아타리의 목표는 70~100개 정도로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지원을 해서 사내계약을 따내고, 벽돌깨기 게임의 스펙을 받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믿는 구석인 스티브 워즈니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일이었고, 아타리에서 약속받은 금액은 50개의 칩 이하로 설계하면 $700 달러, 40개 이하로 만들면 $1000 달러 였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700 달러의 반을 받고 보너스는 없는 것으로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훗날 스티브 워즈니액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아타리에서는 4일로 시간을 제한한 적이 없었는데, 스티브 잡스가 임의로 설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스티브 워즈니액은 4일 밤을 새면서 손으로 게임보드의 프로토타입을 거의 완성합니다.  워즈니액은 TTL 칩의 수를 46개까지 줄이는데 성공을 하였고, 이들의 성과에 감명을 받은 아타리의 경영진들은 스티브 잡스에게 $5,000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였고,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액에게 원래 약속한 $350 달러만을 주고 오레곤으로 몇 달간의 휴가를 떠납니다.

그런데, 스티브 워즈니액의 디자인은 워낙 컴팩트하고 손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당시의 기계와 아타리의 엔지니어들로서는 양산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들다시피한 이 게임은 워즈니액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많이 수정해서 1976년에야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히트작 중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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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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