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IT 업계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4월에 발생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커다란 이슈가 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꽤나 시끄러웠던 구글의 더블클릭(DoubleClick) 인수가 그것인데요.  오늘의 포스트는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인터넷 광고 네트워크의 최강자, 더블클릭

더블클릭은 케빈 오코너(Kevin O'Connor)와 드와이트 메리맨(Merriman)이 1995년에 창업한 IAN (International Ad Network)이 합병을 통해 1996년에 탄생한 회사입니다.  더블클릭은 최초로 온라인 미디어 관련한 광고사업을 전문화하면서 웹사이트에 광고공간을 마케터에게 판매하는 사업으로 급속히 성장을 하게 됩니다.  1997년 더블클릭은 온라인 광고를 보여주고, 이를 관리하는 기술을 발표하면서 '배너광고'로 대별되는 온라인 디스플레이 광고와 관련하여 가장 앞서가는 회사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합니다.

1999년 더블클릭은 $17억 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데이터 취합 및 분석에 대한 노하우를 가진 아바쿠스 다이렉트(Abacus Direct)를 인수합병하면서 오프라인 카타로그 사업에도 진출합니다.  이를 통해 웹과 오프라인의 결합을 시도하는데, 인수합병 당시 아바쿠스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개인정보에 대한 우려로 프라이버시와 관련하여 많은 기관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부정적 여론 때문에, 더블클릭은 결국 아바쿠스의 서비스와의 통합작업을 중지하고 강화된 프라이버시 정책 등을 포함한 새로운 대책을 발표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합니다.


구글, 더블클릭 인수로 온라인 광고 황제자리에 오르다.

구글은 2007년 4월 13일, $31억 달러를 들여 전액 현금으로 더블클릭 인수를 발표합니다.  이 합병은 즉각적인 프라이버시와 광고시장의 독점에 대한 우려로 8개월 정도의 실사를 거치게 되는데, FTC(Federal Trading Commission)는 2007년 12월 20일이 되서야 이 합병을 승인합니다.   

더블클릭의 인수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도 경합을 했었습니다.  그 덕분에 당초 $20억 달러 정도로 예상되었던 인수가는 $30억 달러를 돌파합니다.  더블클릭은 배너와 비디오와 같은 디스플레이 부분 광고에 있어 구글과 같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린 회사로, 구글은 기존의 검색기반의 광고인 애드워즈와 롱테일 광고 플랫폼인 애드센스에 이어 사실상 온라인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광고에 대한 솔루션 및 서비스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구글의 더블클릭 인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전략과 관련한 위기의식을 더욱 높이게 되는데, 마이크로소프트는 같은 해 5월 무려 $60억 달러를 들여 어퀀티브(aQuantive)라는 더블클릭과 비스한 성격의 회사를 인수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 과정은 구글이 무선 광고와 관련하여 애플과의 인수경쟁에서 승리하여 애드몹(Admob)을 인수하자, 바로 뒤를 이어 애플이 2위 였던 콰트로 와이어리스(Quattro Wireless)를 인수하면서 광고플랫폼 경쟁을 벌였던 최근의 상황과 묘하게 대비가 됩니다.


더블클릭, 경쟁에서 밀리기 전에 발을 빼는 전략

그렇다면, 더블클릭은 어째서 구글에 회사를 매각하는 결정을 했을까요?  당시 CEO 였던 데이비드 로젠블랫(David Rosenblatt)에 따르면, 잡지나 TV 등에서 가장 덜 읽히고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 등에 판매해야 하는 약 30% 정도에 이르는 잉여광고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 구글과 같은 회사들이 롱테일 솔루션과 서비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고객사들이 더블클릭보다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블클릭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결국 구글이 전체를 통으로 취급해서 판매를 하는 전천후 광고 에이전시가 된다면 더블클릭이 가지고 있는 고객사들이 등을 돌리기 전에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더블클릭은 구글에게 데이터베이스와 광고주 네트워크를 결합시키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었고, 구글이 부족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도 있었으며, 특히 구글이 인수한 유튜브의 동영상 서비스와의 연계를 통해 소비자와 광고주 모두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구글의 구미를 당겼습니다.  결국 구글은 더블클릭을 인수함으로써 사실 상 광고주들에게 원스톱 광고쇼핑몰을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효과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구글은 비즈니스 모델에 있어서 만큼은 전세계 최고의 광고서비스 및 솔루션과 광고주들을 잇는 네트워크까지 장악하게 되는 명실상부한 광고회사의 위용을 갖추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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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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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IT의 역사, 오늘의 주인공은 2005년 탄생한 UCC의 제왕 유튜브(YouTube) 입니다.


PayPal의 멤버들, 유튜브를 만들다.

이 시리즈에서 PayPal 을 창립한 이 시대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인 엘론 머스크(Elon Musk)에 대해서 이미 한 차례 소개하면서 PayPal 이라는 회사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멋진 사람들은 모이는 것일까요?  당대 최고의 서비스 중의 하나인 유튜브는 PayPal 에서 초기부터 한솥밥을 먹던 채드 헐리(Chad Hurley), 스티브 첸(Steve Chen), 그리고 조드 카림(Jawed Karim)이 공동창업을 한 회사입니다.

제일 처음 유튜브의 아이디어를 생각한 것은 채드 헐리와 스티브 첸이 2005년 초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넌 스티브 첸의 아파트에서 저녁 파티를 하다가 찍은 비디오 영상을 공유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디오 공유하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2005년 2월 14일 youtube.com 이라는 도메인을 획득하고, 수개월 간의 개발과정을 거친 뒤에 첫 번째 유튜브 비디오는 조드 카림이 샌디에고 동물원에서 찍은 "Me at the zoo" 라는 것으로 2005년 4월 23일에 업로드가 되며, 현재까지도 이 역사적인 비디오는 볼 수가 있습니다.   유튜브의 퍼블릭 베타는 2005년 5월에 시작되고, 11월에 공식적인 서비스를 오픈하였는데 아이디어도 좋고, PayPal 이라는 성공 실적이 있었던 탓이었을까요?  유튜브는 양대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인 세콰이어 캐피탈로부터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직후인 2005년 11월부터 2006년 4월 사이에 $1150 만 달러에 이르는 초기 서비스로서는 대단히 커다란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합니다.

사이트는 급속하게 성장을 하였는데, 2006년 7월에 유튜브의 공식발표로 하루에 65,000개의 신규 비디오가 업로드되고 있으며, 하루에 비디오를 보는 횟수가 1억 건을 돌파하였다는 발표를 하게 됩니다.  


구글의 과감한 결단, 유튜브를 사들이다.

구글은 이렇게 빠르게 커나가는 유튜브를 2006년 10월 $16.5 억 달러라는 정말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이는데, 이 사건은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이 마이스페이스를 인수합병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파를 불러 일으킵니다.  특히 미디어 업계에서는 가뜩이나 인터넷을 통해 광고시장을 빼앗아가고 있는 구글이 이제는 영상부분까지 뛰어든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까지 유튜브를 지배하던 영상들은 대부분 UGC(User Generated Contents)라고 불리던 짧은 영상들이었습니다.  애완동물 들이나, 재미있는 농담 같은 가벼운 영상들이 많았는데, 날이 갈수록 스포츠 영상이나 뮤직 비디오와 같이 기존의 미디어들이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오면서 미디어 업체들의 심기를 슬슬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채드 헐리와 스티브 첸이 유튜브를 매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창의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고, 구글 역시 이들을 신뢰하여 아직도 유뷰브의 운영을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이런 독립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오늘날 유튜브가 향후 구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될 정도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들은 유튜브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하루에 업로드 100만 건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지 않아 1억 건이라는 엄청난 업로드가 되자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서비스의 확장성을 보장하는 기술에 있어 자본이나 기술 양쪽에서 자신들만의 역량으로는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고, 구글의 막강한 서버 운영기술과 자본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특히 두 창업자들은 구글의 사용자 중심의 철학과 장기적인 비전으로 유튜브를 사들이려고 하였고, 자신들을 믿고 지원해 준다는 말에 구글의 팬이 되면서 구글을 위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유튜브와 구글의 야심 

유튜브는 엄청난 방문자 수와 UGC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익은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글의 유튜브 인수가 두려웠지만, 미디어 업계에서는 이것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하며 구글을 비웃었고, 이에 화답하듯이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인 스티브 발머는 유튜브가 저작권의 함정에 걸려서 결국에는 냅스터처럼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유튜브와 구글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용자가 제작한 컨텐츠가 돌아가는 민주적인 플랫폼이 결국에는 창의적인 사람들의 컨텐츠를 살리게 될 것이며, 방송국의 힘에 밀리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싶은 컨텐츠 제작을 만들도록 도와주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저작권자인 미디어 업체들과의 협상은 주로 에릭 슈미트가 담당했는데, 미디어 업체들이 과거의 방식으로 선불을 포함한 과도한 요구를 한다고 판단한 에릭 슈미트는 미디어 업체들의 막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하기 보다는 법정소송을 진행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이런 길을 가는데 미디어 업체들 중에서 전향적으로 마음을 바꾸는 곳과는 협력을 하고, 끝까지 소송으로 나오는 곳과는 소송을 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비아콤(Viacom, MTV 등을 소유한 세계적 미디어 그룹)은 유튜브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소송을 냅니다.  비아콤은 유튜브가 자사의 이익을 낼 수 있는 콘텐츠를 사용자들이 무단으로 올리는 것을 방치함으로서 자사의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명목으로 $10억달러(1조 2천억원)에 이르는 배상금을 내라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유튜브는 자신들이 저작권 침해의 여지가 있는 콘텐츠는 최대한 걸러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저작권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콘텐츠에 대한 신고가 들어오면 이에 대한 조치를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유튜브는 법정소송 다툼에서 DMCA(디지털시대 콘텐츠 법, Digital Millennium Content Act)에서의 "안전한 항구(safe harbor)" 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 제공 및 발행자는 콘텐츠를 삭제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 이를 성실하게 제거해 주기만 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논지를 펼쳤습니다.  이 법정소송은 불리한 내용이 담긴 이메일을 공개하거나, 비아콤이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위장 아이디로 콘텐츠를 업로드 한다는 폭로 등이 이어지는 등 그동안 과열양상을 보이면서 감정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였는데, 1차 소송에서는 인터넷 비디오 스트리밍 콘텐츠 역시 DMCA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판결을 함으로써 유튜브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학과 비즈니스, 그리고 다양한 콘텐츠라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어낸 것은 정말로 극히 소수의 일부를 빼고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남이 해 놓은, 그리고 역사가 이룩해 놓은 데이터와 자료, 그리고 경험에 접근해서 이를 바탕으로 진보를 이끌어내는 것이 과학이고, 창작입니다.  이를 철저하게 가로막고, 특허와 저작권이라는 이름의 압력, 기술계약 또는 기술이전을 하기 위해 지불해야 되는 정치적, 경제적 부담, 또한 변호사들과 변리사들만 좋아할 복잡한 사용허가 범위와 클레임 등은 현재의 공유의 정신을 철저히 가로막는 부담으로만 작용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은 협업이 개방적으로 가능하려면 역할분담이 필요합니다.  로열티나 심각한 사용허가 조건으로 인해 연구나 2차 창작에 필요한 각종 데이터, 콘텐츠나 경험 등의 사용이 줄어든다면, 결국 여기에서 파생될 더욱 커다란 이익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기업 내부의 결정에 의해 이런 커다란 물줄기를 돌리는 사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을 가지고도 공유와 협업의 원리를 이해하고 유튜브와 손을 잡고 VEVO 라는 서비스를 시작한 유니버설/소니/EMI 의 약진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레이디가가나 샤키라의 뮤직 비디오를 아무런 제한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하였고, 수백 만명의 사람들이 이들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디지털 음원의 구매나 콘서트 및 광고수익 등을 올리면서 잘 나가고 있는 상황은, 유튜브와 소송으로  역주행을 해버린 비아콤과 더욱 차별화가 되어 돋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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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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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프로젝트 책임자, 브렛 테일러 from Wikipedia.org


2004년, 구글은 검색과 G메일에 이어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하나로 평가받는 구글지도(Google Maps)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오늘의 '거의 모든 IT의 역사'의 주인공은 구글지도와 이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브렛 테일러(Bret Taylor) 입니다.  브렛 테일러는 현재 페이스북의 CTO(Chief Technology Officer)로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 지도의 탄생

전 세계의 지도를 누구나 쉽게 접근해서 다양한 매시업이 가능하게 만든 혁신적인 프로젝트인 구글 지도는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의 형태로 호주의 Where2 라는 회사에서 라스 라스무센(Lars Rasmussen)과 젠스 라스무센(Jens Rasmussen) 형제가 개발하던 프로젝트로 시작됩니다.  그들의 소프트웨어 기술을 눈여겨 본 구글은 2004년 IPO 후 얻게 된 많은 현금을 바탕으로 2004년 10월 이 회사를 합병합니다.  그리고, 이를 웹 애플리케이션의 형태로 변형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구글 지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구글로 합병된 이후 이 프로젝트는 브렛 테일러(Bret Taylor)가 맡아서 진행하는데, 2005년 2월 8일 서비스를 시작한 것에 이어, 2005년 6월 구글 맵스 API 를 오픈하면서, 지도를 일종의 공공플랫폼으로 이용하는 역사적인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도 웹 서비스 개방과 관련한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상 오늘날 이렇게 다양한 매시업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만든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구글 맵스 API 의 개방이었고, 브렛 테일러의 놀라운 열정과 개방적 사고방식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구글 지도는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2005년 7월에는 아폴로호의 달 착륙 기념일 이벤트로 구글 문(Google Moon) 서비스를 시작하여, 달에 대한 지도를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9월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해 커다란 재해를 겪은 뉴올리언즈 주민들을 위해 인공위성 영상을 업데이트하면서 홍수가 어디에 어떻게 나고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2006년 1월에는 로드맵(road maps) 프로젝트를 통해 실제로 지도주변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게 되며, 2006년 3월에는 화성지도까지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구글 지도 서비스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혁신으로 3차원으로 전체 지구를 보여주는 구글 지구(Google Earth) 프로젝트와 함께 로컬 서비스와의 융합 및 관련 생태계를 키워가면서 앞으로 구글의 미래를 끌어갈 가장 중요한 자산의 역할을 할 것이 확실합니다.  

구글 지도와 통합될 것으로 알려진 구글 지구 프로젝트는 가상의 지구를 보여주는 EarthViewer 3D 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Keyhole 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서비스인데, 역시 구글이 2004년 인수를 하였습니다.  이를 변경하여 실제 서비스가 선을 보인 것이 2005년 6월인데, 구글 지도와 함께 구글의 로컬 서비스를 강력하게 뒷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인재들이 힘을 합치다.

이전 포스팅에서 G메일을 만든 폴 북하이트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둘이 주도가 되어 4명의 구글 엔지니어가 나와서 2007년 프렌드피드를 창업합니다.  이후 2009년 프렌드피드가 페이스북에 인수가 되면서 현재는 페이스북의 CTO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브렛 테일러는 또한, 현재 페이스북의 실시간 웹 서비스 인프라를 책임지는 토네이도(Tornado) 웹 서버를 개발한 장본인으로 페이스북은 프렌드피드를 인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글만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좋아한다', '친구가 되었다' 와 같은 상태에 대한 실시간 업데이트가 가능한 기술력을 갖추게 됩니다.  마크 주커버그도 언급한 바 있지만, 직원 12명에 불과한 프렌드피드를 인수한 페이스북은 그 기술력을 흡수하면서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브렛 테일러의 합류로, 현재 페이스북의 가장 중요한 인력을 보면 CEO 인 마크 주커버그는 창업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2인자인 COO 는 구글의 캐시카우를 만들어 낸 쉐릴 샌드버그가 맡고 있으며, 기술 총책임자인 CTO 는 브렛 테일러가 맡으면서 페이스북은 사실상 구글의 최고 핵심 엔지니어와 기획자들이 이끌어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구글 지도 프로젝트의 모태가 되는 Where2 를 창업했던 라스 라스무센과 젠스 라스무센은 구글 웨이브(Google Wave)라는 또 하나의 실시간 협업 인프라를 선보이면서 구글에서의 존재감을 계속 과시했으나, 최근 이들도 Wave 프로젝트의 종료 후 페이스북으로 옮겨갔습니다. 구글 지도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주요 인물들이 여전히 인터넷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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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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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은 다시 구글로 넘어와서 조금씩 신임 CEO 인 에릭 슈미트와 두 명의 창업자들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구글이 관리위기에 빠지는 순간과 이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실리콘 밸리의 위대한 코치, 빌 캠벨(Bill Campbell)의 이야기 입니다.


신임 CEO, 창업자와의 갈등이 시작되다.

2001년 구글의 CEO 가 된 에릭 슈미트는 초기에는 주로 회사의 시스템과 문화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면서 무난하게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에릭 슈미트는 아무리 구글이라는 회사가 자유로운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조금은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와 관련한 일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그의 움직임에 대해 두 명의 창업자들은 회사가 지나치게 관료화되고 있다면서 회의를 할 때 종종 커다란 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신임 CEO 의 회사장악과 변신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에릭 슈미트는 이런 갈등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파워 싸움을 하기 보다는 매우 부드러운 방법을 선택하였는데, 그의 이런 우유부단해 보이는 모습은 강하고 경험이 많은 CEO 가 들어와서 구글의 체계를 잡아주기를 원했던 투자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세콰이어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는 에릭 슈미트의 행동을 보고서 그가 구글에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대단히 비관적인 전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에릭 슈미트는 묘수를 찾아내는데,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하기 보다는 외부의 존경받는 인물을 구글의 고문으로 모시고서 중재를 부탁합니다.  에릭 슈미트가 고른 사람이 바로 실리콘 밸리 전체에서 존경받고, 또한 포용력의 대가로 통하던 빌 캠벨 (Bill Campbell) 로, 에릭 슈미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사회 임원의 한 명이고 가장 큰 투자자의 대표였던 존 도어가 빌 캠벨을 구글을 돕도록 다리를 놓는데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미식축구의 코치, 전설적인 실리콘 밸리의 코치로 변신

빌 캠벨은 피츠버그 근처의 홈스테드라는 도시의 출신으로 명문인 컬럼비아 대학으로 진학을 해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선수로서의 활약보다 컬럼비아 대학의 미식축구팀 헤드코치로서의 명성이 더했던 그는 1970년대 후반 팀을 이끌면서 존경받는 코치생활을 했지만, 1978년 최대 라이벌 대학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경기를 끝으로 미식축구 코치생활을 접고, 마케팅 관련한 일을 시작합니다.

월터 톰슨이라는 광고 에이전시와 코닥을 거쳐, 그가 처음으로 실리콘 밸리에 자리를 잡게 된 곳은 바로 애플입니다.  존 스컬리가 애플의 CEO 가 된 1983년, 빌 캠벨은 존 스컬리의 부탁으로 애플의 마케팅 부분 부사장으로 실리콘 밸리에 입성합니다.  캠벨은 애플에 합류한지 몇 달만에 판매와 마케팅 부분을 모두 맡게 되었고, 인적혁신을 통해 젊지만 열정이 있는 사람들과 여성들을 대거 채용하고, 열정이 없이 현실에 안주만 하려는 직원들은 대거 해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앙숙이었던 스티브 잡스와 존 스컬리 모두와 친한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현재까지도 캠벨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스티브 잡스는 그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존 스컬리는 그를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존 스컬리가 1985년 스티브 잡스를 애플에서 쫓아내는 일을 도모할 때 캠벨을 이것이 애플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고, 존 스컬리의 거사가 성공한 이후 존 스컬리와 빌 캠벨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1987년 존 스컬리는 빌 캠벨을 애플의 클라리스라는 사업부분을 맡기고 이를 분리시켜서 빌 캠벨을 간접적으로 쫓아내려는 전략을 세우는데, 예상외로 클라리스가 번창하자 존 스컬리는 그 계획을 백지화하였고, 이에 반발한 빌 캠벨은 존 스컬리 밑에 있느니 차라리 실업자가 되겠다며 애플을 퇴사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이후, 빌 캠벨은 다시 회사의 이사회의 임원의 한명으로 자리를 차지 합니다.

빌 캠벨은 애플에서 퇴사한 이후에 존 도어의 도움을 받아서 Go Corporation 이라는 회사의 CEO 가 됩니다.  이 회사는 펜 컴퓨터 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이를 직접 운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빌 캠벨은 1993년 이 회사를 AT&T 에 매각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가 선택한 회사는 인튜잇(Intuit)으로 개인과 소규모 사업자들에게 재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현재까지도 잘 나가는 회사입니다.  빌 캠벨은 이곳의 CEO 로 일하면서, 존 도어와 자주 만남을 가졌는데 존 도어가 구글에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듣고서 이를 흔쾌히 승낙합니다.  

빌 캠벨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말이나 평일의 저녁시간에 대학의 스포츠 바에서 항상 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언제나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업무에 대한 비밀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 신뢰성까지 갖추어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실리콘 밸리의 코치입니다.  언제나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듣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북돋아주고 격려하는 것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서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고 합니다.


빌 캠벨, 구글의 가교가 되다.

빌 캠벨은 예의 뛰어난 친화력으로 금방 에릭 슈미트, 그리고 두 명의 창업자와 스스럼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됩니다.  캠벨은 에릭 슈미트의 고민과 구글의 창업자들의 고민을 모두 이해하였고, 이런 고민을 당사자들이 바로 충돌을 하게 만들기 보다는 중간에서 중재를 하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가 했던 역할은 단순히 창업자들과 CEO 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 갈등이 투자자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사회와 구글 경영진들과의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이사회에서는 언제나 구글의 수익을 빨리 확보하기 위해 안달을 하였고, 경영진들은 지나치게 무리한 수익화 추진을 반대하였습니다.  캠벨은 이런 갈등도 중재하면서 초창기 구글이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역할은 구글의 창업자, CEO, 그리고 이사회, 더 나아가서는 다른 경영진들과 직원들의 신임을 얻어야 가능한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들의 중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경영시스템이 자리를 잡고, 괜찮은 인재들을 채용하고, 경영회의와 이사회와의 관계 및 시스템을 정비하는데 효과적인 조언을 함으로써 오늘날 구글의 성공을 이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매주 월요일 경영진 회의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수 차례 엔지니어들의 프로젝트 회의에도 항상 동석하였고, 여러 명의 이사들과 정기적으로 일대일 미팅을 가지고 격려를 하는 등 정말 대단한 열정으로 구글이라는 회사의 코치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직도 구글의 코치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의 누구도 그가 나타나면 환영을 하며, 구글에서는 정말 특별한 대우로 그에게 전용 주차공간을 할애하였다고 합니다.  


실리콘 밸리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들처럼 엄청난 부자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에는 모두들 동의한다고 합니다.  그는 가장 성공한 기업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마크 앤드리센, 스티브 잡스를 포함한 최고의 인재들의 개인 멘토로서 주말이면 같이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간의 10%를 애플에, 35%를 구글에 투자를 하며, 35%를 인튜잇에 투자하고, 10%를 컬럼비아 대학 이사회에 할애하는 그는 나머지는 정말 다채로운 생활에 쓴다고 말합니다.  

실리콘 밸리는 너무 급변하고 기술위주로 변해갔기에, 어찌보면 이렇게 가장 인간적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건네주고, 마음을 전달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미식축구 코치의 인화력이 가장 필요했던 곳인지도 모릅니다.  빌 캠벨은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실리콘 밸리를 일으켜세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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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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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은 최고의 검색엔진에 등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날이 갈수록 수익구조는 악화되었던 구글의 수익모델을 찾기 위한 노력과 CEO 선임이 이루어진 2000년 전후의 이야기 입니다.  


AdWords 의 탄생, 그리고 CEO를 찾아라

세계 최고의 트래픽을 몰고다니는 서비스가 되었지만, 구글에게는 이제 이런 트래픽을 비즈니스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글의 공동 창업자들은 구글 검색에 과도한 비즈니스적인 요소를 연결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런 생각은 가장 커다란 투자자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의 마이클 모리츠와 존 도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으며 꼭 두 창업자를 끌어줄 수 있는 CEO 를 외부에서 영입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하였습니다.

구글은 2000년 10월, 첫 번째 광고 프로그램인 애드워즈(AdWords)를 테스트 합니다.  350개의 광고업체만 받아서 그들이 선택한 키워드가 검색어로 들어오면 검색결과 옆에 작은 광고가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광고주들은 해당 키워드를 몇 번이나 사용자들이 이용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분석도구도 엉성했고 생각처럼 쉽게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애드워즈는 광고주들이 광고가 화면에 몇번 노출되는지를 기준으로 비용책정을 했는데, 이런 모델은 기존 배너광고에서 이용되는 CPM(Cost-Per-Mille, 1000번 노출당 단가) 방식의 변형이었고 GoTo.com 이 이미 CPC(Cost-Per-Click, 클릭당 단가) 방식의 검색광고를 시작한 상태였고, 그 반응도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CPM 방식을 채용한 애드워즈는 그렇게 큰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다양한 형태의 광고방식이 제안되었지만, 거의 대부분 구글의 창업자들에 의해 광고가 검색과 확실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집어넣을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철학에 가로막혔습니다.  존 도어와 마이클 모리츠는 이대로는 구글의 미래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하에, 투자를 했던 당시의 약속인 '새로운 CEO를 영입하라'는 말을 지키라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두 공동창업자들은 약속을 지켜야 했기에 마지못해 여러 명의 CEO 후보자들과 미팅을 가지지만, 대부분 장난스러운 인터뷰를 하다가 '기술을 모른다'는 핑게로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퇴짜를 놓은 CEO 후보들이 15명이 넘어가자, 존 도어와 마이클 모리츠는 이 두 사람이 CEO 를 선임하지 않으려고 그냥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 한 해가 이런 식으로 CEO 선임을 위한 작업으로 저물어 갔지만, 결국 CEO 는 뽑을 수 없었고, 전문경영인도 없었으며, 회사의 관리체계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야심차게(?) 내놓은 애드워즈는 그다지 커다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고, 비용을 수반하는 쓸데없는 트래픽만 자꾸 늘어나면서 과연 구글이라는 회사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론마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나마 해를 넘겨 2001년 1월에 애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등에서 운영 부사장으로 일했던 웨인 로징(Wayne Rosing)을 뽑으면서 엔지니어의 문화를 존중하지만 관리가 가능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중책을 맡게 됩니다. 


에릭 슈미트와의 인터뷰, CEO 를 찾아내다.

구글이라는 회사의 CEO 를 찾는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KPCB 의 존 도어에게는 구글의 CEO 로 적임자로 떠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존 도어의 절친한 친구였던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입니다.  에릭 슈미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CTO 로 일하다가, 더욱 큰 꿈을 안고 노벨(Novell)의 CEO 로 적을 옮기게 되는데,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는 달리 노벨에서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가 합류했을 때 노벨의 4분기 매출은 목표액에 1,460만 달러나 적었고, 경영진들은 이를 분식회계로 메꾸는 방법을 제안하지만, 에릭 슈미티는 그대로 발표하기로 하고 노벨의 주가는 곤두박질치면서 회사가 바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큰 꿈을 안고 들어간 회사가 입사하자마자 위기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존 도어의 추천과 함께 웨인 로징에 대한 평판을 알기 위해 세르게이 브린이 에릭 슈미트에게 전화를 해서 장시간 통화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구글에 잠시 들르기로 합니다.  2000년 12월, 에릭 슈미트는 약속대로 구글을 방문합니다.  2000년 당시 구글이 사용하던 건물은 마운틴 뷰의 빌딩21 이었는데, 이 건물은 에릭 슈미트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재직하던 시절에 썬의 건물로서 일하던 건물이었기 때문에 회사는 달랐지만 장소라는 측면에서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CEO 인터뷰를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는 아니었지만, 에릭 슈미트는 존 도어에게 언질을 받은 상태였고, 또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역시 에릭 슈미트가 과연 구글 CEO 가 될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었기에, 이 때의 만남은 서로의 기싸움이 되는 중요한 미팅이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에릭 슈미트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노벨에서 내린 결정에 대한 기술적 비판을 합니다.  노벨이 전략적으로 인터넷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한 프록시 캐시(proxy cache)라는 기술이 결국 초고속 인터넷이 늘어나게 되면 무용지물이 될텐데 쓸데없는 곳에 투자를 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냐는 날선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에릭 슈미트는 자신의 논거를 앞세워 거세게 반론을 하였는데, 이런 논쟁이 무려 1시간 30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보통의 인터뷰였다면 완전히 실패했을 이런 논쟁이, 결국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에릭 슈미트라는 사람을 구글의 CEO 적임자로 인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에릭 슈미트 역시 구글의 이런 문화가 싫지 않았습니다.  2001년 2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에릭 슈미트에게 정식으로 구글의 CEO 자리를 제안하였고, 에릭 슈미트는 노벨의 합병을 마무리하고 구글의 CEO 를 맡는 대신 3월 부터 일단 회장의 자리에 취임을 합니다.  그해 8월 에릭 슈미트는 구글의 CEO 자리에 오르면서, 세루게이 브린이 기술부문 사장을 맡고 래리 페이지가 제품부문 사장을 맡는 구글의 3두체제가 완성됩니다.  이때 정해진 연봉과 함께, 에릭 슈미트는 1500만 주에 육박하는 엄청난 주식을 스톡옵션으로 받으면서 구글의 명실상부한 공동책임자가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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