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를 처음 구현한 프로그래머들은 주로 지식을 교환하기 위한 학자들과 연구를 위해 컴퓨팅 자원을 공유해서 이용해야 했던 과학자들을 위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에 비해, BBS를 만들고 열정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간 사람들은 또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커뮤니티는 컴퓨터 컨퍼런싱이라는 테마로 뭉쳤던 WELL이다. WELL은 작은 타운과도 같았는데,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였기에 다양한 문화가 싹트는 그런 가상의 타운이었다. WELL의 탄생에는 대항문화의 보급과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홀어스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의 발행인인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가 다시 등장한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동료들은 1985년 봄에 한 시간에 3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컴퓨터와 모뎀을 활용해서 가상의 컨퍼런스 커뮤니티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하는데, 이것이 WELL이다. 


WELL에 참여한 인물들은 이후 인터넷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은데, 후에 와이어드(Wired)를 창간하고, 인터넷의 발전과 관련한 유명한 TED 강연을 하기도 했던 케빈 켈리(Kevin Kelly)는 WELL을 처음 설립한 그룹 중의 한 명이다. 또한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 존 길모어(John Gilmore), 미치 카포(Mitch Kapor, 당시 IBM 최고의 인기 소프트웨어였던 로터스 1-2-3의 디자이너이자 창업자) 등은 WELL에서 처음 만나서 EFF(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 전자프론티어재단)를 설립하게 되는데, EFF는 인터넷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제기되는 사회적, 법률적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조직으로 인터넷과 관련한 의견을 모으고 발표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간 비영리조직으로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가 WELL을 설립한 비전은 3가지 였다. 첫 번째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의 재미있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낮은 가격에 전자회의 솔루션과 이메일 등을 제공하였다. 일단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는 인기가 있을만한 사람들에게 공짜 계정을 주고 호스트로 초대를 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래서 파리의 살롱과 비슷한 분위기를 온라인 상에 만들기 시작했다. 홍보를 할 때에도 돈이 많이 드는 광고보다는 기자들에게 공짜 계정을 나누어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WELL의 문화에 빠져들고, 이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도록 유도하였다. 이런 전략이 먹혀들면서, WELL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케빈 켈리는 당시 홀어스리뷰(Whole Earth Review)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는데, WELL에 참여하면서 그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게 된다. 


그런데, WELL은 다른 BBS와는 차별화된 문화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실명을 쓰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가명을 쓸 수는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반드시 실제 실명 아이디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 글을 포스팅할 수 있었다. 다소 페쇄적이고 까다롭게 느낄 수 있는 이런 전략이 WELL만의 강력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이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WELL과 비슷한 역할을 한 커뮤니티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엠팔(empal)을 꼽을 수 있다. 1988년 설립된 사설 BBS로 전자메일(e-mail)과 ‘펜팔(penpal)’의 합성어였다. 특히 1989년 데이콤에서 서비스하던 H-Mail'에서 커밋(kermit)이라는 프로토콜을 차단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를 이른바 ‘개구리 사건’이라고 한다. '개구리 사건'이라는 명칭은 프로토콜의 이름인 커밋이 당시 미국에서 유명했던 TV인형극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에 등장하던 개구리 캐릭터인 '커밋(Kermit the Frog)'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당시 H-Mail 사용자들이 파일교환을 할 때 주로 이용하던 이 프로토콜을 한국데이터통신이 갑자기 차단하면서 이용자들이 분노하여 대거 엠팔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엠팔에서 특히 '초이스'라는 동호회가 인기를 끌었는데, 컴퓨터 전문가들이 주로 모인 이 동호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PC 동호회로도 유명하다. 엠팔 초이스 초기 창립 멤버 20 여명은 우리나라의 인터넷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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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터넷이 전쟁과 국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연구자들의 네트워크와 대학을 엮으면서 학술적인 목적의 공유를 위한 목표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일부 일반인들이 대학의 계정을 얻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에 참여한 영리기업들에 의해 전화접속을 이용한 서버를 호스팅하는 서비스들이 조금씩 활성화되었다. 


또 한 가지 변화의 바람은 PC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과거에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컴퓨터를 집에 갖추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PC의 보급은 워드프로세서나 스프레드 시트 등의 업무용 소프트웨어와 베이식 등의 프로그래밍 언어, 그리고 PC게임 등의 활성화와 같이 초기에는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보급과 활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지만, 전화선에 연결해서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있는 모뎀(modem)이라는 주변기기가 개발되고 그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일반인들도 다양한 방식의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 중에서, 열정을 가진 일부는 BBS(Bulletin Board System, 주로 사람들의이 모여서 글을 올리고, 읽고, 찾을 수 있는 게시판)라는 소프트웨어를 PC에 설치하고, 자신의 PC를 호스트로 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이렇게 호스트를 구성하고 서비스를 하기 위해 많은 비용과 자신들의 노력을 들였는데, 순전히 자발적인 열정에 의한 활동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단시일 내에 폭발적으로 늘면서 전 세계에 BBS 바람이 일어나게 되었다. 호스트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모뎀이 필요했는데, 모뎀은 전화선을 이용해서 음성신호와 디지털 신호를 변환하는 장치로 모뎀을 이용해서 호스트에 접속할 때의 특유한 "삑~ 끽 ~" 거리는 사운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전화선을 통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속하기 때문에, 해당 전화선에 누군가 접속해 있으면 통화 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열성적인 BBS 호스트는 하나의 회선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전화회선과 모뎀, 호스트 PC등을 확보해서 서비스를 하였다. BBS의 운영자는 흔히 시삽(sysop)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대규모의 BBS들을 모아서 서비스하는 PC통신 서비스의 동호회 운영자도 시삽이라고 불리게 된다. 


최초의 BBS의 역사에 대해서는 캘리포니아와 시카고의 시스템들을 거론한다. 1973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는 터미널들을 유선으로 연결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라는 BBS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성된다. 커뮤니티 메모리는 터미널의 사용자들이 동전을 넣고 연결을 한 뒤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BBS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네트워크 구성으로는 BBS라고 부르기 어렵지만, 키워드로 메시지를 태그하거나 검색 등도 가능했으며, 글을 올리고 읽는 방식은 이후 만들어지는 BBS들과 거의 똑같았다. 전화선을 이용해서 모뎀으로 연결하는 BBS는 1978년 시카고에서 워드 크리스텐센(Ward Christensen)과 랜디 수에스(Randy Suess)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들은 1978년 2월 16일 CBBS(Computerized Bulletin Board System)이라는 서비스를 오픈하는데, 이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BBS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3년 미국에는 6만 개가 넘는 BBS가 운영되었을 정도로 호황기를 맞게 되었고, PC를 이용한 컴퓨터 통신 또는 네트워크는 곧 BBS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BBS 문화는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PC를 이용한 데이터통신이 시작된 것은 1987년의 한글전자사서함서비스(H-mail)이 처음이다. 이 서비스는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 LG U+에 현재는 인수합병됨)이 1984년 미국의 다이얼콤(Dialcom), 노티스(Notice) 등과 연결한 상용서비스였는데,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PC통신 은 한국경제신문사가 1988년 9월 개시한 케텔(KETEL, Korea Electronic Economic daily TELepress) 이었는데, 필자도 서비스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한국경제신문사의 충정로 사옥에 찾아가서 당시 호스트로 이용되던 피라미드 컴퓨터에 아이디를 등록하고 이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에는 1200 bps(bits per second) 라는 느린 속도의 모뎀(이 정도 속도면 한줄 한줄 옆으로 글자가 찍히는 것이 보인다)으로 서비스를 했었는데, 초기에는 끊어지지만 않으면 한 통화로 무료 통신을 할 수 있었기에 집의 전화기를 완전히 불통상태로 만들어 놓고 서비스를 이용해서 아이들과 부모들의 묘한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이후 종량제가 도입되면서, 아이들이 과다하게 이용하여 전화요금이 수십 만원이 청구된 사건 등이 신문이나 TV뉴스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케텔과 양대산맥을 이룬 서비스는 데이콤의 PC서브/천리안이었는데, 유료서비스여서 사용자 수는 적지만, 상대적으로 사용자 연령대가 높고 서비스가 쾌적하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차별화 포인트가 있었기에 사용자들은 흔히 케텔을 '개털' PC서브를 '피박'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는 가난한 케텔 사용자들과 사용료가 비싼 PC서브의 특징을 서비스의 발음과 연계지었던 별명인데, 당시의 PC통신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PC 통신을 통해 형성된 “동호회"는 ‘정모', ‘번개', ‘공구'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온라인 공동체 문화를 형성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PC통신을 대표하던 한국경제신문의 케텔은 이후 한국통신과 한국PC통신(주)에 인수되면서 하이텔(HiTEL)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회사 이름을 KTH로 바꾸면서 완전히 인터넷 서비스로 전환한 것이 파란닷컴(Paran.com)이었는데, 파란닷컴이 2012년 7월 31일 24시를 기준으로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이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과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가 효시가 되었는데, 대구에서 4개의 접속노드를 갖추어 다중접속자를 지원한 '달구벌'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EMPal) BBS'가 개설되면서 초기의 열성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게 되었다. 당시 엠팔의 사용자들은 실제로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커뮤니티가 된다. 초창기에는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을 한글화해서 사용했지만,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으며, 1991년 최고의 BBS 호스트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최오길의 '호롱불'이 등장하면서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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