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IUC NCSA의 전경 from Wikipedia.org



래리 스마르의 주장으로 UIUC의 8명의 교수들이 모여서 작성한 블랙 제안서(제안서의 표지가 검은 색이어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한다)는 제안서가 채택이 된다면 어떤 것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적은 것으로 1983년 NSF에 제출되었다. 짧지만 과학계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담겨 있었기에 NSF에서는 이 제안서에 흥분을 하게 되고, 1984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인 과학컴퓨팅국(Office of Scientific Computing)이 창설된다.


NCSA의 탄생과 웹의 개념

NSF의 과학컴퓨팅국은 강력한 국회에서의 지원을 바탕으로 블랙 제안서에 기초한 수퍼컴퓨터 센터를 유치할 대학들을 미국 전국에서 모집하게 되는데, 치열한 경쟁을 통해 4군데 대학이 선정되었다. 블랙 제안서를 제출하며 담론을 리드했던 UIUC를 비록하여, 코넬과 프린스턴, 그리고 샌디에고가 그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후에 피츠버그에 하나의 센터가 더 설립되었다. 1985년 이 계획에 따라 NCSA 재단이 만들어졌고, 1985년부터 5년 간 총 4274만 달러의 투자를 통해 강력한 인프라와 그 과학적 응용에 대한 사례들이 구축되기 시작했으며, 이 컴퓨팅 자원을 세계의 대학에서 쉽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NSFNET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NCSA의 탄생의 기초가 된 10페이지의 블랙 제안서에는 미래의 생산적인 과학자들의 협업과 보편적인 컴퓨터 접근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었다. 기술적인 제한점보다는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담았는데, 특히 컴퓨터의 미래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담았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현재에는 그 내용이 대단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지만 어떻게 멋지게 시각화를 시킬 것인가? 워크스테이션 개념, 초고속 I/O 시스템과 데이터 저장기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다양한 커뮤니티의 동시적인 협업과 같은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내용들이 기술되었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매우 쓰기 쉽고, 웹이 기본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최고의 전문가들만 간신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컴퓨터와 네트워크였다. 또한, 이런 컴퓨터 기술에 대한 접근도 운좋게 어떤 곳의 직원이면 계정을 부여받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러지 않으면 접근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보편적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결국 이후 인터넷의 역사에서 큰 전환을 일으키는 웹 브라우저인 모자이크(Mosaic)가 NCSA에서 탄생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NCSA의 수퍼컴퓨터가 처음으로 온라인에 개방된 것은 1986년 1월이었다. 이 컴퓨터에 대한 접근권을 텔넷(Telnet) 프로토콜을 이용해서 전 세계의 과학 커뮤니티에 개방을 한 것을 시작으로, NCSA는 전 세계 과학 커뮤니티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는데, 여기에서 인터넷이 가지고 있었던 국가의 경계를 넘고, 인류의 공통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을 하는 철학을 또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수 많은 도구들이 소개되면서 NCSA는 그 유명세를 떨쳤는데, 뭐니뭐니해도 1993년 모자이크를 발표한 것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모자잌와 관련해서는 이후에 다시 다루게 된다.


NSFNET, 인터넷 탄생의 견인차가 되다.

NSFNET과 DARPA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선 이야기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이번에는 NCSA와 과학계의 시각에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1985년 NSF가 NCSA와 같은 수퍼컴퓨팅 센터에 펀딩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던 전 세계의 과학자들을 엮어내고 이들이 협업을 통해 과학의 발전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인프라의 구축이 필수적인 요구사항이었다. NSF에서 펀딩한 5군데 수퍼컴퓨팅 센터들은 UIUC의 NCSA 이외에 프린스턴의 폰 노이만 컴퓨팅 센터, UCSD의 샌디에고 수퍼컴퓨터 센터(San Diego Supercomputer Center, SDSC), 코넬 대학의 코넬 이론센터(Cornell Theory Center), 그리고 카네기 멜론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이 함께 했던 피츠버그 수퍼컴퓨팅 센터(Pittsburgh Supercomputing Center, PSC) 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보편적인 접근이 가능한 과학연구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 NSFNET의 목표였는데, 여기에 ARPANET과 동일한 TCP/IP 프로토콜을 이용하기로 결정하면서 각각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고, 여러 가지 그룹으로 구성되었던 네트워크 세상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NSFNET은 1986년 처음으로 TCP/IP를 이용한 운영에 들어갔는데, 처음의 6군데 백본 사이트는 56-kbit/s 전용선을 이용하였다. 이 속도는 초고속 인터넷 기술이 도입되기 이전 전화선 모뎀에서 구현되었던 최고 속도 정도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래픽 문제로 몸살을 앓게 된다. 1987년 문제가 심각해지자 NSF는 NSFNET를 1.5Mbit/s 의 속도를 가진 T1 백본을 기초로 한 업그레이드 및 확장을 하기로 결정하고 자금을 투입하였는데, 이 때 이런 기술을 제안한 미시건 주립대학교의 메리트 네트워크(Merit Network)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1988년 7월 T1 기반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다. 당시 컨소시엄에는 IBM과 MCI라는 컴퓨터와 통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참가하였고, 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수요가 빠르게 늘고 확장이 급속하게 진행되자 NSF는 운영과 접속에 대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지역적으로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기업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의 인터넷 접속도 확대되었으며, 더 이상 NSFNET라는 학술적 네트워크의 성격으로만 유지시키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이것이 인터넷과 관련한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지배구조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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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터넷은 실험적으로 활용이 되면서 주로 컴퓨터 과학이나 네트워크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미국의 정부부처나 연구기관들이 인터넷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연구지원을 하였는데, 미국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에서 만든 MFENet이나 HEPNet, 나사에서 구성한 SPAN, 그리고 미국 국가과학재단(NSF, 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서 연구자금을 출연해서 컴퓨터 과학자 커뮤니티를 위해 구축한 CSNET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연구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것은 단연 이메일 서비스였다. 


인터넷 이메일 서비스의 등장

전자메일(electronic mail)의 약자인 이메일의 개념은 굉장히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꿈꾸어왔던 기능이었다. 1970년대 초반의 일부 작가들은 팩스로 문서를 전송하는 것을 전자메일이라고 하기도 했는데, 이 용어자체는 정확하게 처음 사용된 시기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들이 현재 이야기하는 이메일은 사실은 인터넷 이메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메시지의 헤더에 이메일 발송자의 주소와 받는 사람들의 주소 등의 정보가 담기고, 제목과 메시지가 전송된 시간 스탬프가 붙는다. 초기에는 7비트 128개 글자의 영문 아스키 코드만 지원했는데, 점차 다국어와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를 붙일 수 있도록 확장이 되었다. 


현대적인 의미의 인터넷 이메일도 역시 ARPANET과 함께 성장을 하였다. 1971년 레이 톰린슨(Ray Tomlinson)은 이메일은 개인에게 보내어지는 것이므로, ARPANET이 가지고 있는 기계의 주소와는 다른 구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당시의 컴퓨터는 대부분 호스트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컴퓨터 호스트의 주소와 받는 사람의 아이디를 분리하는 구분자로 '@'를 처음으로 사용해서 DEC-10 컴퓨터 사이의 메시지를 분리하였다. 그의 표현방식은 곧 ARPANET 전반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이메일 주소의 형태가 나타났다. 1973년 ARPANET에서 동작시킬 수 있는 이메일 메시지를 인코딩하는 표준이 제시되었는데, 초기의 인터넷 이메일 프로토콜은 문서를 일종의 파일로 보고 이전에 먼저 언급한 파일전송프로토콜(FTP, File Transfer Protocol)을 확장한 수준이었는데, 이메일의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갖추도록 업그레이드된 SMTP(Simple Mail Transfer Protocol)이 1982년 정의되면서 최근과 유사한 이메일 서비스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다양한 연구 네트워크의 등장


AT&T의 유닉스 운영체제가 널리 이용되면서 유닉스에 기본적으로 설치된 UUCP 프로토콜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인 USENET과 이라 푸크스(Ira Fuchs)와 그레이돈 프리먼(Greydon Freeman)이 대학의 메인프레임 컴퓨터들을 연결하자는 모토로 시작한 BITNET이 초기 글로벌 네트워크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학자들의 학문적인 네트워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호환성을 해결한 광범위한 네트워크 보다는 각자의 목적에 맞는 다양한 네트워크가 쉽게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또한, TCP/IP 이외에도 제록스의 XNS나 IBM의 SNA.8, DEC의 DECNet과 같은 대체 기술들도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전 세계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인터넷의 꿈은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던 듯하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박사가 1981년 상공부에 '컴퓨터 연구 개발 국책 프로젝트' 계획서가 제출되면서 인터넷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프로젝트의 일부로 1982년 구축된 TCP/IP 네트워크의 이름은 SDN(Software Development Network, 소프트웨어 개발 네트워크. 이후 시스템 개발 네트워크로 명칭 변경)이었다. 이는 NSF의 지원으로 구축된 CSNET과 유사했던 개념이다. 



미국 NSF와 DARPA, 글로벌 네트워크의 싹을 틔우다.


인터넷이 일반화된 글로벌 네트워크로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 같지만, 미국 국가과학재단(이하 NSF)의 의무조항에 의해서였다. 영국에는 1984년 JANET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이나 커뮤니티를 엮는 네트워크가 있었고, 미국에는 이에 상응하는 NSFNET이 1985년 구축되었다. 미국 대학들은 예나 지금이나 NSF의 연구기금이 가장 중요한 과학기술연구의 자금줄인데, 이 때 중요한 단서조항이 생기게 된다. 단서조항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데니스 제닝스(Dennis Jennings)로 그는 아일랜드에서 1년 간 NSF와 NSFNET 프로그램을 위해 파견된 연구자였다. 그는 NSF의 의사결정권자들을 설득해서 TCP/IP를 NSFNET 프로그램의 의무적인 프로토콜로 선정하게 하였다. 이후 NEFNET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된 스티브 울프(Steve Wolff)는 1986년 세계적인 대학과 연구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NSF의 연구자금을 휘두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DARPA와의 접촉을 시작했다.


NSF는 DARPA의 인터넷 조직 인프라를 지원하면서 통합된 체계를 갖추기를 원했고, DARPA와 NSF의 인터넷의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을 확보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를 위해 TCP/IP를 NSFNET 프로그램에 선택한 것을 포함해서 미국의 여러 연방기구들을 설득하여 오늘날의 인터넷의 체계를 갖출 수 있는 다양한 정책적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서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것과 같은 공통 인프라 건설을 위한 비용을 서로 분담하기로 합의하였고, 트래픽 관리 등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인터넷 아키텍처와 유사한 형태의 다양한 모델을 구상하였다. 이런 복잡한 체계를 조율하기 위해서 미국 연방네트워킹위원회(FNC, Federal Networking Council)를 설립하였다. FNC는 이후 전 세계를 연결하기 위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인터넷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퍼뜨리고 연계시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그 중간에 기업의 강력한 상업적인 의도나 특정 국가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이런 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좌절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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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니바르 부시의 메멕스(MEMEX)



20세기 초반에는 1편과 2편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동부가 주도하였다. 미국 동부는 오랫동안 미국 공업의 심장부의 역할을 하였고, 미국 북동부 기업의 대다수는 20세기 초반 자유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거대기업으로서의 강력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핵심 산업의 행방을 좌우하였고, 제3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가와 혼연일체가 되는 경험도 하게 된다. 정보산업에서는 IBM, AT&T, 제록스 등이 크게 부상하였고, 자동차산업에서는 GM, 포드, 크라이슬러라는 거대 기업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거대한 관료제를 바탕으로 하는 조직을 구성하였고, 마치 정부와도 같은 강력한 관리문화를 확산시키며 번영을 누렸다. 어떤 측면에서는 현재의 우리나라의 대기업 중심의 문화가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동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배니바르 부시와 메멕스


배니바르 부시[Vannevar Bush]는 1편에서도 언급한 MIT의 노버트 위너의 동료로 1946년에 발표한 메멕스(MEMEX, MEMory EXtender)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한 방대한 지식을 빠르게 검색하고 이용하게 되면 인류의 정신적 능력이 크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 생산한 정보와 지식을 저장하여 빠르게 검색할 수 있는 소형 컴퓨터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이 메멕스다. 메멕스는 그 개념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용 컴퓨터와 웹을 탄생시킨 배경이 된다. 


배니바르 부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루스벨트 정권의 과학자문으로 활약했는데, 정계에 투신하여 미국과학연구개발국 국장을 지냈다. 그는 미국 최고의 과학자 6,000 여 명을 모아서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지휘하는데, 이것이 바로 1편에서도 언급한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이처럼 배니바르 부시는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행정과 정치를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사회가 복잡해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문적이고 고도화된 지식을 어떻게 다루느냐 달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와 개인의 정보처리능력 향상이 중요하다는 것에 매달리게 되는데,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메멕스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군사기술에나 활용되던 것이기에, 민간에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은 인간과 컴퓨터가 협력할 수 있다는 철학을 퍼뜨리게 되고, 이것이 개인용 컴퓨터 개발로 이어진다. 


그는 이후 전미과학재단(NSF,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설립에도 관여하는데, 연방정부와 과학자의 전시협동 체제를 평시에도 국가를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초기 인터넷 개발에도 참여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배니바르 부시는 오늘날 웹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냉전시대의 개막과 스탠포드 대학


오늘날의 스탠포드 대학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당시의 스탠포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지역대학에 불과하였다. 187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릴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는 란초 샌프란시스코(Rancho San Francisco) 지역의 650 에이커의 토지를 매입하여, 이곳에 팔로알토 말 목장 (Palo Alto Stock Farm)을 설립하였고, 곧이어 인근에 있는 8000 에이커의 토지를 더 매입하여 캘리포니아에서는 가장 거대한 말 목장을 운영하였는데, 훗날 이 거대한 말 목장이 오늘날의 스탠포드 대학교의 캠퍼스이다. 린랜드 스탠포드의 외아들인 릴랜드 스탠포드 주니어(Leland Stanford, Jr.)는 1884년 16세가 되기 전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는데, 릴랜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와 그의 부인은 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에 거액의 기부를 하겠다고 제안하며, 자신의 아들 이름을 딴 시설이나 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하였으나 하버드 대학이 거절하자,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을 우리의 자녀로 삼자" 부인을 설득하여 1891년 스탠포드 대학교로 개교를 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의 스탠포드 대학은 연방정부의 연구예산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연구형 대학으로 변모를 꾀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시대가 되자, 태평양 연안의 지정학적 의미가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주 남서부에 공군기지가 창설되면서 많은 항공우주산업과 관련한 주요 기업과 연구기관이 태평양 연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NASA의 연구기관인 에이미즈 연구센터(Ames Research Center)를 시작으로, 대규모 군사 예산이 이 지역에 투자되었고, 그 자금의 일부는 정부기관, 기업, 대학연구소 등으로 흘러들었다. 당시 날씨는 좋았지만, 대형 민간기업이 별로 없었던 캘리포니아는 비행기나 로켓의 항로 제어기술을 중심으로 항공우주산업을 지원하는 형태로 연구자금을 받았고, 마침 인근의 실리콘 밸리에서 반도체 산업이 기지개를 켜면서 스탠포드 대학은 당대 최고의 대학으로 웅비할 차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게임이론, 냉전과 함께 서부에서 각광받다


존 폰 노이먼의 게임이론 역시도 냉전과 함께 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게임이론은 원래 경제적인 이득과 관련한 부분이 연구의 주된 초점이었지만, 게임행동의 전략성에 초점을 맞추면 군사행동 시뮬레이션에도 접목이 가능하다. 여기에 주목한 인물이 바로 허만 칸(Herman Kahn)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랜드(RAND)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는데, 랜드 연구소는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중의 하나로 미국의 방위산업 재벌인 맥도널 더글러스(McDonnel Douglas)의 전신인 더글러스 항공이 1948년에 설립한 연구소이다. 랜드연구소는 냉전시대와 함께 군 예산을 투자받아서 전략적으로 육성된 곳으로 허만 칸의 게임이론 연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후 세계적인 미래학자로도 이름을 떨치게 된 허만 칸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1961년 랜드연구소를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허드슨 연구소(Hudson Institute)를 설립하여 회장직을 맡는다. 그때부터 그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자주 비밀스럽게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박정희 전대통령의 수출주도 전략이나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 5개년 개발계획 등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공했다는 비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

(다음 편에 계속)


참고자료:


Memex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배니바르 부시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스탠포드 대학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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