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대중화를 이끈 NCSA 모자이크 from Wikipedia.org



1993년까지 기대와는 달리 고퍼와의 싸움에서 열세를 보이던 웹이 결정적인 승기를 만드는 사건은 과거 인터넷의 공유정신과 관련하여 수퍼컴퓨터 센터를 들여오고, NSFNET의 탄생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시카고의 NCSA에서 다시 한번 나타나게 된다.


1993년 컴퓨터 시장은 이미 IBM PC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의 성능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초창기 DOS를 중심으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PC는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메모리와 HDD의 용량도 커지면서 조금씩 복잡한 것들을 잘 처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PARC 연구소에서 개발한 GUI(Graphic User Interfac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애플에서는 이에 특화된 PC인 매킨토시를 발표하였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DOS에서 동작하기 때문에 다소 느리기는 하지만 매킨토시의 GUI를 벤치마킹한 윈도우라는 소프트웨어를 내놓으면서 이에 대응을 하였다. 전통적인 컴퓨터 운영체제인 유닉스(Unix) 계열의 운영체제에서도 X 윈도우라는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면서 GUI를 도입하는 추세는 대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양한 운영체제와 GUI가 등장하였지만, 인터넷에서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웹 기술은 거의 보급되지 못한 넥스트 컴퓨터와 넥스트스텝이라는 운영체제 밖에 지원되지 않아서 고퍼에 크게 밀리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 때, 일리노이 대학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NCSA에서 일하던 마크 앤드리센(Marc Andreessen)은 웹과 같은 좋은 기술이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웹을 이용하면서 웹에 있는 다양한 과학정보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해서 볼 수 있도록 하는 브라우저가 그 핵심이라는 생각에, NCSA에서 일하던 뛰어난 프로그래머인 에릭 비나(Eric Bina)와 함께 유닉스(Unix)의 X 윈도우를 지원하는 웹 브라우저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3개월 정도의 작업을 통해 1993년 오늘날 웹 브라우저 역사에 길이 남는 범용 브라우저인 모자이크(Mosaic)를 완성한다. 마우스 만으로 인터넷을 브라우징할 수 있는 클릭앤포인트(Click and Point) 방식을 처음으로 구현한 모자이크는 인터넷이 진정한 정보의 바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성공하였다. 이들의 성취를 보고 NCSA 에서는 몇 명의 인원을 더 보강해서 윈도와 매킨토시를 지원하는 모자이크도 같은 해 11월 발표하게 되는데, 이 브라우저는 2달 동안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운로드 받아 이용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웹의 세상을 열었다.


모자이크는 당시 일반인들이 보유한 PC 주요 운영체제인 윈도, 매킨토시, 유닉스를 모두 지원한 최초의 오픈소스 브라우저였으며, 이를 통해 일반인들도 웹의 세상에 뛰어들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모자이크를 탄생시킨 NCSA는 초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웹과 같은 기술보다는 운영체제에 상관없이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할 수 있는 동기화된 협업 기술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고 한다. 이런 목적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NCSA 콜라쥬(collage)였는데,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유닉스의 X 윈도우, 매킨토시, 윈도우를 모두 지원할 수 있어야 해서  여기에 대비하던 것이 아르바이트 학생과 한 명의 프로그래머가 일으킨 예상 밖의 혁신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모자이크는 인터넷이 대학이나 연구소 밖으로 급속도로 팽창하던 때, 제한된 정보 서비스만  존재하던 인터넷 환경에 매끄러운 멀티미디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멋진 기능을 제공했지만 모자이크도 상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서는 관대한 라이선스를 채택했다. 모든 버전에서 비상업적 목적의 사용은 일정한 제한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웠으며, 유닉스 X 윈도우 시스템 버전의 경우 소스코드도 공개배포 되었다. 다른 운영체제 버전의 경우에도 동의만 얻으면 소스코드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 대학생으로 혁혁한 성과를 남긴 마크 앤드리센에 대해 NCSA에서는 에릭 비나를 포함한 정규 모자이크 개발팀을 중심으로 관리를 하려고 하였고, 마크 앤드리센을 홀대하였다. 그러자, 마크 앤드리센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NCSA 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실리콘 밸리로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다음 편에 계속 ...)



참고자료:


모자이크 브라우저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NCSA 모자이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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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UC NCSA의 전경 from Wikipedia.org



래리 스마르의 주장으로 UIUC의 8명의 교수들이 모여서 작성한 블랙 제안서(제안서의 표지가 검은 색이어서 그렇게 불리웠다고 한다)는 제안서가 채택이 된다면 어떤 것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적은 것으로 1983년 NSF에 제출되었다. 짧지만 과학계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담겨 있었기에 NSF에서는 이 제안서에 흥분을 하게 되고, 1984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인 과학컴퓨팅국(Office of Scientific Computing)이 창설된다.


NCSA의 탄생과 웹의 개념

NSF의 과학컴퓨팅국은 강력한 국회에서의 지원을 바탕으로 블랙 제안서에 기초한 수퍼컴퓨터 센터를 유치할 대학들을 미국 전국에서 모집하게 되는데, 치열한 경쟁을 통해 4군데 대학이 선정되었다. 블랙 제안서를 제출하며 담론을 리드했던 UIUC를 비록하여, 코넬과 프린스턴, 그리고 샌디에고가 그 주인공이 되었으며 이후에 피츠버그에 하나의 센터가 더 설립되었다. 1985년 이 계획에 따라 NCSA 재단이 만들어졌고, 1985년부터 5년 간 총 4274만 달러의 투자를 통해 강력한 인프라와 그 과학적 응용에 대한 사례들이 구축되기 시작했으며, 이 컴퓨팅 자원을 세계의 대학에서 쉽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NSFNET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NCSA의 탄생의 기초가 된 10페이지의 블랙 제안서에는 미래의 생산적인 과학자들의 협업과 보편적인 컴퓨터 접근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었다. 기술적인 제한점보다는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담았는데, 특히 컴퓨터의 미래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담았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컸다. 현재에는 그 내용이 대단하지 않게 여겨질 수 있지만 어떻게 멋지게 시각화를 시킬 것인가? 워크스테이션 개념, 초고속 I/O 시스템과 데이터 저장기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다양한 커뮤니티의 동시적인 협업과 같은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내용들이 기술되었다. 

오늘날의 컴퓨터는 매우 쓰기 쉽고, 웹이 기본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최고의 전문가들만 간신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컴퓨터와 네트워크였다. 또한, 이런 컴퓨터 기술에 대한 접근도 운좋게 어떤 곳의 직원이면 계정을 부여받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러지 않으면 접근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보편적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결국 이후 인터넷의 역사에서 큰 전환을 일으키는 웹 브라우저인 모자이크(Mosaic)가 NCSA에서 탄생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NCSA의 수퍼컴퓨터가 처음으로 온라인에 개방된 것은 1986년 1월이었다. 이 컴퓨터에 대한 접근권을 텔넷(Telnet) 프로토콜을 이용해서 전 세계의 과학 커뮤니티에 개방을 한 것을 시작으로, NCSA는 전 세계 과학 커뮤니티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는데, 여기에서 인터넷이 가지고 있었던 국가의 경계를 넘고, 인류의 공통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을 하는 철학을 또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수 많은 도구들이 소개되면서 NCSA는 그 유명세를 떨쳤는데, 뭐니뭐니해도 1993년 모자이크를 발표한 것이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모자잌와 관련해서는 이후에 다시 다루게 된다.


NSFNET, 인터넷 탄생의 견인차가 되다.

NSFNET과 DARPA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선 이야기들에서 다룬 바 있지만, 이번에는 NCSA와 과학계의 시각에서 다시 한번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1985년 NSF가 NCSA와 같은 수퍼컴퓨팅 센터에 펀딩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던 전 세계의 과학자들을 엮어내고 이들이 협업을 통해 과학의 발전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인프라의 구축이 필수적인 요구사항이었다. NSF에서 펀딩한 5군데 수퍼컴퓨팅 센터들은 UIUC의 NCSA 이외에 프린스턴의 폰 노이만 컴퓨팅 센터, UCSD의 샌디에고 수퍼컴퓨터 센터(San Diego Supercomputer Center, SDSC), 코넬 대학의 코넬 이론센터(Cornell Theory Center), 그리고 카네기 멜론 대학과 피츠버그 대학이 함께 했던 피츠버그 수퍼컴퓨팅 센터(Pittsburgh Supercomputing Center, PSC) 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보편적인 접근이 가능한 과학연구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 NSFNET의 목표였는데, 여기에 ARPANET과 동일한 TCP/IP 프로토콜을 이용하기로 결정하면서 각각의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고, 여러 가지 그룹으로 구성되었던 네트워크 세상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NSFNET은 1986년 처음으로 TCP/IP를 이용한 운영에 들어갔는데, 처음의 6군데 백본 사이트는 56-kbit/s 전용선을 이용하였다. 이 속도는 초고속 인터넷 기술이 도입되기 이전 전화선 모뎀에서 구현되었던 최고 속도 정도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래픽 문제로 몸살을 앓게 된다. 1987년 문제가 심각해지자 NSF는 NSFNET를 1.5Mbit/s 의 속도를 가진 T1 백본을 기초로 한 업그레이드 및 확장을 하기로 결정하고 자금을 투입하였는데, 이 때 이런 기술을 제안한 미시건 주립대학교의 메리트 네트워크(Merit Network)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1988년 7월 T1 기반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되었다. 당시 컨소시엄에는 IBM과 MCI라는 컴퓨터와 통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참가하였고, 운영을 하였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수요가 빠르게 늘고 확장이 급속하게 진행되자 NSF는 운영과 접속에 대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지역적으로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기업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의 인터넷 접속도 확대되었으며, 더 이상 NSFNET라는 학술적 네트워크의 성격으로만 유지시키기 어려워지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이것이 인터넷과 관련한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지배구조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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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컴퓨터와 인터넷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물리학자 래리 스마르, 

현재도 구글+를 통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from Larry Smarr 구글+ 프로필 페이지



지금까지 인터넷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에서 전쟁과 미국 국방부의 전략, 그리고 대학들의 연구를 위한 네트워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또 하나의 기술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수퍼컴퓨터이다.



수퍼컴퓨터의 발전


수퍼컴퓨터는 강력한 연산기능을 가진 컴퓨터로 1960년대 세이머 크레이(Seymour Cray)가 CDC(Control Data Corporation)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것으로 보통 1964년에 발표된 CDC 6600을 세계 최초의 수퍼컴퓨터로 본다. 크레이는 1972년 회사를 떠나서 자신의 이름을 건 크레이 리서치(Cray Research)를 설립하는데,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를 만들고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프로세서를 여러 개 병렬적으로 이용하여 동시에 커다란 데이터를 빠르게 연산하는 것이 드물었고, 과학연구에 이런 계산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들이 많아서 국가적으로 전 세계에서 관심을 끌었다. 최근에는 수만 개의 프로세서가 연결된 수퍼컴퓨터들도 나오고 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프로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퍼컴퓨터는 주로 물리학에서 복잡한 연산을 처리하거나, 날씨 예측, 석유나 가스 탐사, 화학에서의 분자모델링, 물리 시뮬레이션과 우주항공 분야, 핵무기 연구 등과 같이 국가적으로 중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과학연구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로 생각되었다. 문제는 워낙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과학자를 위해서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수퍼컴퓨터를 구매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네트워크 기술은 수퍼컴퓨터의 강력한 성능을 여러 연구자들이 공유해서 쓸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인터넷과 최적의 궁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래리 스마르가 겪은 독일에서의 수모


이런 특징을 가진 수퍼컴퓨터가 인터넷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된 것은 어느 젊은 물리학자가 독일에서 겪은 수모와 연관되어 있다. 그 주인공이 래리 스마르(Larry Smarr)로, 그는 이후 미국의 수퍼컴퓨터의 응용과 확산, 인터넷 인프라, 그리고 전 세계 PC를 연결해서 강력한 성능의 수퍼컴퓨팅을 수행하도록 하는 그리드 컴퓨팅(grid computing)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업적을 만들게 된다.

레리 스마르는 1975년 텍사스 주립대학 오스틴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예일,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를 하다가 1979년 일리노이주립대학 어바나샴페인(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이하 UIUC)에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가 관여하던 물리학 연구분야에서는 당시 수퍼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시뮬레이션과 계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수퍼컴퓨터에 대한 수요가 매우 많았다. 이렇게 수요가 컸지만, 엄청난 비용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에서 직접 비용을 들여 수퍼컴퓨터를 구매한다는 것은 거의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대학의 연구자들은 미국 NSF에 타당한 이유를 들어서 수퍼컴퓨터를 구매하기 위한 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는데, 대당 100억 원이 넘는 수퍼컴퓨터를 하나 둘 살 수 있도록 NSF에서 지원을 하다보니 너무 많은 요구가 넘쳐나고, 형평성 문제까지 나타나면서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수퍼컴퓨터를 지원받지 못한 대학의 연구진들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고, 결국 연구를 위해서 수퍼컴퓨터를 원활하게 쓸 수 있는 곳으로 단기적으로 원정을 가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수퍼컴퓨터를 주로 핵무기를 만들거나 핵과 관련한 최고의 기밀로 가득한 국가연구기관에서 보유하고 있어서, 복잡한 절차를 거친 뒤에 잠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민간에서는 국가안보와도 관계가 있어서 수퍼컴퓨터가 확산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이런 연구환경에서 래리 스마르는 하버드 대학의 연구 펠로우 시절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Marx Planck Institute)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는데, 이곳에서 미국의 내로라 하는 다양한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모두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자유로운 환경에서 마음놓고 수퍼컴퓨터를 이용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수퍼컴퓨터는 미국에서 발명한 것인데 이렇게 독일에 와서야 신나게 연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결정적으로 래리 스마르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은 그가 독일에 있는 동안 파티를 주최한 한 독일 과학자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당신들 미국인들은 부끄럽지도 않소? 당신들은 크고, 부자이며 모든 것을 다 가진 나라가 아니오? 당신들은 이렇게 작은 우리나라에 와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쟁에서 진 이후에 간신히 가난에서 벗어나 부를 쌓아서 이제서야 수퍼컴퓨터를 사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런데, 전쟁에서 이긴 미국인들이 이제 우리에게 와서 우리들의 시간을 빼앗고 귀한 장비를 사용하고 있소. 어떻게 그런 마음가짐으로 당신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단 말이오? 나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소.

 그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 돌아온 래리 스마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UIUC의 교수로 발령을 받은 이후, 래리 스마르는 무작정 UIUC의 과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아마도 당신은 저를 모르실겁니다. 저는 이제 막 학교에 부임한 조교수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당신은 부족한 자원들로 제대로 연구를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특히 수퍼컴퓨터 말입니다.

그의 이런 전화에 많은 교수들이 황당해하거나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지만, 화학과 생물학, 농학 등의 교수들 중의 일부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몇몇 교수들을 설득한 래리 스마르는 미래의 과학연구를 위한 수퍼컴퓨터 인프라에 대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게 되는데, 여기에 참여한 래리 스마르를 포함한 8명의 교수들이 이후 인터넷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을 남긴 국립수퍼컴퓨팅 응용센터(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 이하 NCSA)의 설립의 원안이 되는 10페이지 남짓한 블랙 제안서(Black Proposal)를 작성하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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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의 등장에 일조한 팀 버너스-리의 NeXTcube 사진 (from Wikipedia)


지난 번 포스팅에서 NeXT 를 다루면서 살짝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이번에는 구글의 영지로 가장 중요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영토의 개척과 관련한 역사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인터넷, 그리고 웹의 시작

1969년 9월 2일, UCLA의 Leonard Kleinrock 교수의 실험실에서는, 몇명의 컴퓨터 과학자 그룹이 몇 비트의 데이터를 한 컴퓨터에서 다른 컴퓨터로 회색의 케이블을 통해 전달하는 실험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데이터가 넘어간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는데, 이 실험이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인터넷의 첫번째 태동이 되었습니다.  Kleinrock과 그의 동료들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정부의 차세대 네트워크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Network (ARPANET) 입니다.  

일부에서는 인터넷 탄생일을 1969년 10월 29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10월 29일은 Kleinrock이 첫 번째 메시지를 UCLA와 스탠포드를 연결하는 2개의 노드 사이에서 전송하는데 성공한 날입니다.  그 메시지는 "LO." 이었는데, "LOGIN"을 전송하려고 하다가 Kleinrock이 "LO."까지 입력하니 시스템이 다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즉, 9월 2일은 최초의 데이터 비트들이 실험실 내의 컴퓨터들 사이에서, 10월 29일은 외부를 연결하는 컴퓨터 사이에 문자가 전송된 첫번째 날입니다.

그로부터 40년간, 인터넷은 미국의 군용 네트워크에서 전세계를 연결하는 기간 백본으로 성장했습니다.  1970년 대에는 e-mail과 TCP/IP 통신 프로토콜이 정립되었고, 이를 통해 정형화된 인터넷의 주소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1980년대에는 숫자로 되어있던 주소체계에 이름이 붙으면서 오늘날 누구나 알고 있는 ".com", ".org" 등이 주소의 이름으로 널리 이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터넷이 실제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사랑받기 시작한 것은 웹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영국의 물리학자였던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HTML 언어와 웹을 만들어 내면서, 인터넷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세계와 우리의 일상생활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HTML 과 웹 서버를 처음 만들어낸 것이 1989년으로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최초의 웹 서버가 돌아가는 컴퓨터로 스티브 잡스가 설립한 NeXT 컴퓨터의 2세대 제품인 NeXTcube 가 이용되었습니다.  

CERN 에서 주로 과학을 중심으로 한 웹 환경을 구축하던 팀 버너스리는 1994년 MIT에 오늘날 웹 표준을 끌고 나가고 있는 World Wide Web Consortium (W3C) 을 설립하고 웹과 관련한 다양한 표준과 권고안 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인터넷이 품고있는 자유와 비특허, 비로열티 정책은 W3C 의 개방철학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팀 버너스리의 업적은 앞으로도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마크 앤드리슨과 모자이크의 등장

넷스케이프의 창업자로도 유명한 마크 앤드리슨은 무척 젊은 나이에 세상을 놀라게 했기에 굉장히 오래된 인물로 생각되지만, 1971년 생으로 필자보다도 나이가 어립니다.  그가 일리노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NCSA(National Center for Supercomputing Applications, 미국국립 슈퍼컴퓨터 활용센터)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마크 앤드리슨은 대형컴퓨터가 아니라 일반인들의 컴퓨터에도 설치할 수 있고,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특히, 웹의 가능성을 보고 웹에 있는 다양한 과학정보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해서 볼 수 있도록 브라우저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NCSA에서 일하던 뛰어난 프로그래머인 에릭 비나(Eric Bina)와 함께 유닉스(Unix)를 기반으로 하는 웹 브라우저를 개발합니다.  이들은 3개월 정도의 작업을 통해 1993년 오늘날 웹 브라우저 역사에 길이 남는 범용 브라우저인 모자이크(Mosaic)를 완성시킵니다.  마우스 만으로 인터넷을 브라우징할 수 있는 클릭앤포인트(Click and Point) 방식을 처음으로 구현한 모자이크는 인터넷이 진정한 정보의 바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성공합니다.  이들의 성취를 보고 NCSA 에서는 몇 명의 인원을 더 보강해서 PC와 매킨토시를 지원하는 모자이크도 같은 해 11월 발표하게 되는데, 2달 동안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브라우저를 다운로드 받아서 이용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인터넷 웹 시대를 화려하게 여는 장본인이 됩니다.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아르바이트 대학생이었던 탓이었는지 NCSA 에서는 에릭 비나를 포함한 정규 모자이크 개발팀을 중심으로 관리를 하려고 하였고, 마크 앤드리슨을 홀대하였습니다.  그러자, 마크 앤드리슨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NCSA 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실리콘 밸리로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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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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