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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라 재단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미치 카포는 본래 세계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든 엔지니어였다. 그는 IBM PC 시절 최고의 스프레드 시트로 이름을 날렸던 로터스 1-2-3의 개발자이자 로터스의 창업자이다. 그는 모질라 재단과 함께 인터넷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체인 전자프론티어재단(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 이하 EFF)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FF는 1990년 미치 카포와 존 페리 바를로가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는데, 표현의 자유, 저작물의 자유로운 사용,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 정보 투명성을 위한 활동을 하며, 세계 모든 정부의 인터넷 검열에 반대하여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는 블루 리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가 상업적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를 판매하는 회사를 창업했음에도 이렇게 인터넷의 표현의 자유와 오픈소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에는 1989년의 불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89년 FBI가 미치 카포를 찾아왔다. 실수로 애플 매킨토시의 운영체제의 일부 소스 코드가 담긴 디스켓을 잘못 보냈다가 돌려받은 사건에 대한 조사 때문이었는데, FBI에서 파견된 2명의 수사관은 총을 가지고 굉장히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조사를 진행했는데, 이들은 컴퓨터와 인터넷, 소스 코드 등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사건은 무혐의로 처리되었지만, 미치 카포는 이 때의 사건으로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등을 포함한 디지털 시대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EFF가 전세계의 디지틸 양극화의 간극도 메꿀 수 있기를 바랬다.


미치 카포는 1971년 예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는데,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목표를 정하지 못해 많은 방황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학제간 전공이었던 사이버네틱스를 전공하면서 심리학과 언어학,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로 잡은 일자리도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코네티컷의 프로그레시브 락음악을 주로 방송하는 라디오 방송인 WHCN-FM의 라디오 DJ 였다. 이후 메사추세츠 주의 한 병원에서 정신건강 카운셀러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그의 미래는 1978년 애플 II를 만나면서 바뀌게 된다. 이 매력적인 기계에 흠뻑 빠진 미치 카포는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면서 당시 최초의 스프레드 시트로 애플 II를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PC로 만들어준 것으로 유명한 비지캘크(VisiCalc)를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1982년 조나단 삭스(Jonathan Sachs)와 함께 로터스 개발주식회사(Lotus Development Corp., 이하 로터스)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둘은 워드 프로세서와 스프레드 시트를 개발하면서 회사를 키워 나갔다. 특히 IBM-PC에 최적화된 로터스 1-2-3는 뛰어난 성능으로 비지캘크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매년 수백 %에 이르는 기록적인 매출성장세를 기록하며 IBM PC 시대의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 중의 하나로 그 자리를 공고히 했다. 미치 카포는 로터스가 한창 잘 나갈 때인 1982년부터 1986년까지 CEO를 맡아서 회사를 이끌다가, 1986년 짐 만지(Jim Manzi)에게 CEO 자리를 넘겨주고 자신은 이사회 의장으로 직접 경영에서는 물러났다. 그가 창업한 로터스는 이후 윈도 3.1 이후 오피스 제품군을 앞세운 마이크로소프트와 치열한 경쟁을 하던 중 1995년 IBM에게 35억 달러라는 거액의 M&A를 통해 매각되었다.

 

그는 많은 면에서 기술 만을 좋아했던 컴퓨터 과학 엔지니어와는 달랐다. 특히 그는 아내인 프리다 카포 클라인(Frieada Kapor Klein)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클라인은 사회학을 전공했고, 테크 커뮤니티의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미치 카포와 클라인은 사람들에게 자유도 중요하지만, 책임도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며, 특히 휴머니티에 악영향을 미치는 여러 행위들을 경계하였다. 열심히 일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실리콘 밸리의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경우에 따라서는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그는 2013년 SFGate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똑같이 그다지 좋지 않은 PT를 끝낸 스탠포트 출신의 컴퓨터 과학 전공자인 백인 청년과 대학을 나오지 않은 소수민족 청년이 있었다면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들은 보통 둘다 투자를 거절하겠지만, 소수민족 기업가에게는 이런 말을 꼬리표처럼 합니다. "보세요. 인상적인 이력을 가지지 못한 친구들은 경쟁이 안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정을 그런 식으로 내려서는 안됩니다. 실리콘 밸리는 단순히 전통적인 이력서와 비즈니스적인 계산 만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더욱 사회적 이익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많은 기업가들이 정말로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실리콘 밸리 투자자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단순한 실리콘 밸리의 성공한 기업가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모질라 재단을 세운 것도, EFF라는 현재까지도 가장 중요한 인터넷과 디지털 세계에 대변자 역할을 하는 재단을 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최근에 그는 사회적 벤처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탈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60대가 넘어선, 실리콘 밸리에서는 정말 오래 전에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그의 노익장과 연륜이 빛나는 것은 이처럼 순수한 인터넷의 철학과 정신이 그의 인생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음 편에 계속 ...)


참고자료


Mitchell Kapor seeks to meld business, social good

Mitch Kapor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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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라 프로젝트는 1998년 네비게이터와 익스플로러와의 브라우저 전쟁에서 세불리를 느낀 넷스케이프에서 브라우저 스위트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여 수천 명에 이르는 프로그래머들이 일으키는 혁신의 힘으로 브라우저 시장을 다시 한번 리드해 나가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한 해가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커뮤니티 멤버들은 실제로 새로운 기능과 기존 기능의 업그레이드와 함께 프로젝트 자체의 기획과 관리에도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비록 특정 기업에서 주관하였지만, 오픈 커뮤니티로서 모질라 프로젝트는 이미 기업의 조직범위를 넘어서서 성장하기 시작했고, 커뮤니티 멤버들은 프로젝트가 원래 지향했던 미션의 범위를 넘어 다양한 다른 브라우저나 개발도구의 개발 등과 같은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모질라 프로젝트에 공헌을 했는데, 이들의 노력은 2002년 모질라 1.0 버전이 출시되면서 그 빛을 보게 된다. 이 버전은 기존의 네비게이터 브라우저의 기능을 크게 업그레이드 했을 뿐만 아니라, 이메일 클라이언트를 포함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들도 포함된 스위트의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이미 브라우저 시장의 판도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넘어간 상태였다. 2002년 90%가 넘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사용자들이었고, 모질라의 발표가 이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그 힘이 너무 미약하였다. 모질라에서의 새로운 브라우저인 피닉스(Phoenix)도 2002년에 발표되었는데, 이 브라우저가 이후 파이어폭스(FIrefox)가 되면서 구글의 크롬이 나오기 전까지 입지를 조금씩 넓히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그나마 대항할 수 있는 브라우저로서 분전하였다.


2003년 모질라 프로젝트는 AOL의 손을 떠나 독립적인 비영리 재단인 모질라 재단으로 이관된다. 새로운 모질라 재단은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혁신과 인터넷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파이어폭스와 썬더버드(Thunderbird) 등이 발표될 수 있도록 하였고, 웹의 접근성 확대와 같은 공익적인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연구기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2004년 발표된 파이어폭스 1.0은 큰 성공을 거두면서, 1억 건 이상의 다운로드를 기록하였고, 그 이후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면서 2008년에는 전 세계 브라우저 시장의 20%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질라 프로젝트와 모질라 재단의 이런 성공은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픈소스 프로젝트는 그냥 놔둔다고 알아서 굴러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넷스케이프는 모질라 프로젝트를 위해 운영진으로 6~8명의 인력을 투입했고, 100~150명 정도의 넷스케이프 제품 엔지니어들이 만든 코드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모질라 프로젝트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넷스케이프를 사들인 AOL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AOL은 넷스케이프 클라이언트를 통해서 AOL 웹사이트로 들어오는 트래픽이 늘기를 바랬지만, 모질라 프로젝트 팀은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운영원칙에 따라서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야 했기 때문에 AOL의 다양한 압력에 저항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모질라의 운영진들은 모질라 프로젝트가 AOL에 소속된 넷스케이프 엔지니어들이 주도하게 되기 보다는 외부의 순수한 개발자들에 의해 주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가능한 핵심 기술이 새로운 오픈소스 개발자들에게서 개발될 수 있도록 꾸준히 유도하였다. 이런 와중에 넷스케이프 제품군의 시장점유율은 꾸준히 하락한다.


급기야 AOL 내부에서 2가지 대립되는 시각이 등장하였다. 하나는 오프소스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커다란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로 경영진에서 가진 시각으로 모든 결정은 이익에 기반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질라 운영진들은 AOL의 경영진들과 의견이 매우 달랐다. AOL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방향으로 운영을 해서는 자발적인 자원봉사자들과 다른 상업적 파트너들의 열성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없고, 그로 인해 프로젝트의 질이 떨어진다면 결국 모질라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갈등의 와중에 발표된 넷스케이프 6기 시장에서 처절한 실패를 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UI 요소를 둘러싼 양측의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특정 버튼을 다아서 AOL 사이트로 유입하게 한다거나, 광고와 관련한 요소를 집어넣고, 돈을 지불한 파트너들이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넣는다는 것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런 갈등이 지속되면서 모질라 프로젝트의 운영진들은 AOL의 직원으로서의 지위와의 상충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로젝트의 본질을 훼손할 수 없었기에 사사건건 경영진들과 충돌하는 양상이 계속되었다. 넷스케이프 6의 발표 이후 넷스케이프 브라우저를 이용한 매출이 계속 감소하자 결국 AOL은 칼을 빼들었다. 그들은 2001년 모질라 프로젝트를 이끌던 미첼 베이커(Mitchell Baker)를 해고하고, 모질라 프로젝트를 직접 접수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모질라 프로젝트의 운영진들도 그렇게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외부에 권력투쟁 양상으로 비치는 다양한 사건이 모질라 프로젝트에 있었다. 특히 해고된 미첼 베이커는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원봉사자로 직위를 바꾸고 계속 출근을 하면서 프로젝트를 지켰다. 2002년 마침내 이렇게 지켜낸 프로젝트의 산물이 모질라 1.0이 출시되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프로젝트의 완성도에 놀라면서도 그다지 좋은 사용자 경험은 주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당시 미첼 베이커는 모질라 프로젝트 이외에 로터스 1-2-3를 만들었던 미치 카포(Mitch Kapor)와 다른 오픈소스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치 카포는 미첼 베이커와 브렌단 아이크(Brendan Eich)에게 자신이 투자를 할테니 독립적인 모질라 재단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하였다. 


결국 2003년 AOL은 웹 브라우저 클라이언트에 대한 투자를 완전히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미첼 베이커는 AOL에게 모질라에 최소한의 초기 자금을 준다면 이를 자신들이 운영하겠다고 설득을 해서 2백만 달러의 자금을 받아내고 AOL이 모질라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불확실한 오픈소스 재단의 일을 위해 브렌단 아이크와 브라이언 벨렌도르프(Brian Belendorff), 크리스 블리자드(Chris Blizzard)도 넷스케이프를 나와서 이사진에 합류를 하면서, 모질라 재단이 탄생하였다. 모질라가 독립할 경우 이들을 적극 지원할 생각이 있었던 미치 카포는 30만 달러를 출연하면서 모질라 재단의 초대 이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 와중에 모질라와 뜻을 같이 하는 일부 엔지니어들이 동참을 하면서 모질라 재단은 10명 정도의 소규모 인력으로 거대한 오픈소스 플랫폼을 운영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모질라 재단의 시작도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운영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이렇게 커다란 커뮤니티를 관리하면서 일을 진행시키기에 일하는 사람의 수가 너무 적었다. 특히 무엇보다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제품인 파이어폭스는 15개월 이후에 출시될 예정이었고, 최소한 이 때까지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자금부터가 당장 문제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모질라에 우호적인 파트너가 사무실을 임대하고, 적은 공간이지만 임대료 없이 공짜로 공간을 빌려주었다. 비록 작고 아무것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모질라 재단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희망과 행복감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비록 핵심연구자들의 수는 적었지만, 이들은 정말 열심히 모질라 프로젝트를 위해서 일을 하였고, 완전한 오픈소스 운영조직으로서 사람들이 정말 원할만한 소비자 제품으로서의 브라우저 제품군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의 힘을 모으자 그 성과는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비주얼 디자인 요소가 중요했는데, 캐나다의 센터 아일랜드(Center Island)에서 몇몇 비주얼 디자이너들이 멋진 로고와 과거에는 보지 못했던 신선한 비주얼 요소들을 만들어 제공하였다. 마지막으로 검색이 문제였는데, 이 부분에는 구글과 야후! 등의 경쟁구도를 이용해서 검색박스를 이용한 모질라의 초기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면서 오늘날의 모질라 재단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오픈소스 정신과 철학으로 거대 기업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이들의 적극적인 투쟁이 오늘날의 모질라를 있게 하였다. 



(후속편에 계속 ...)


 

참고자료:

모질라 재단 홈페이지

IEEE Mitchell Baker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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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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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를 처음 구현한 프로그래머들은 주로 지식을 교환하기 위한 학자들과 연구를 위해 컴퓨팅 자원을 공유해서 이용해야 했던 과학자들을 위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에 비해, BBS를 만들고 열정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간 사람들은 또 다른 문화를 가진 집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인터넷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커뮤니티는 컴퓨터 컨퍼런싱이라는 테마로 뭉쳤던 WELL이다. WELL은 작은 타운과도 같았는데,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였기에 다양한 문화가 싹트는 그런 가상의 타운이었다. WELL의 탄생에는 대항문화의 보급과 확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홀어스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의 발행인인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가 다시 등장한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동료들은 1985년 봄에 한 시간에 3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컴퓨터와 모뎀을 활용해서 가상의 컨퍼런스 커뮤니티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하는데, 이것이 WELL이다. 


WELL에 참여한 인물들은 이후 인터넷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은데, 후에 와이어드(Wired)를 창간하고, 인터넷의 발전과 관련한 유명한 TED 강연을 하기도 했던 케빈 켈리(Kevin Kelly)는 WELL을 처음 설립한 그룹 중의 한 명이다. 또한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 존 길모어(John Gilmore), 미치 카포(Mitch Kapor, 당시 IBM 최고의 인기 소프트웨어였던 로터스 1-2-3의 디자이너이자 창업자) 등은 WELL에서 처음 만나서 EFF(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 전자프론티어재단)를 설립하게 되는데, EFF는 인터넷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제기되는 사회적, 법률적 문제들에 대하여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조직으로 인터넷과 관련한 의견을 모으고 발표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간 비영리조직으로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가 WELL을 설립한 비전은 3가지 였다. 첫 번째는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의 재미있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낮은 가격에 전자회의 솔루션과 이메일 등을 제공하였다. 일단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는 인기가 있을만한 사람들에게 공짜 계정을 주고 호스트로 초대를 하는 전략을 펼쳤다. 그래서 파리의 살롱과 비슷한 분위기를 온라인 상에 만들기 시작했다. 홍보를 할 때에도 돈이 많이 드는 광고보다는 기자들에게 공짜 계정을 나누어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WELL의 문화에 빠져들고, 이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도록 유도하였다. 이런 전략이 먹혀들면서, WELL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케빈 켈리는 당시 홀어스리뷰(Whole Earth Review)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었는데, WELL에 참여하면서 그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게 된다. 


그런데, WELL은 다른 BBS와는 차별화된 문화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실명을 쓰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가명을 쓸 수는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반드시 실제 실명 아이디와 연결이 되어 있어야 글을 포스팅할 수 있었다. 다소 페쇄적이고 까다롭게 느낄 수 있는 이런 전략이 WELL만의 강력한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이들이 신뢰를 바탕으로 이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WELL과 비슷한 역할을 한 커뮤니티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엠팔(empal)을 꼽을 수 있다. 1988년 설립된 사설 BBS로 전자메일(e-mail)과 ‘펜팔(penpal)’의 합성어였다. 특히 1989년 데이콤에서 서비스하던 H-Mail'에서 커밋(kermit)이라는 프로토콜을 차단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를 이른바 ‘개구리 사건’이라고 한다. '개구리 사건'이라는 명칭은 프로토콜의 이름인 커밋이 당시 미국에서 유명했던 TV인형극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에 등장하던 개구리 캐릭터인 '커밋(Kermit the Frog)'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당시 H-Mail 사용자들이 파일교환을 할 때 주로 이용하던 이 프로토콜을 한국데이터통신이 갑자기 차단하면서 이용자들이 분노하여 대거 엠팔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엠팔에서 특히 '초이스'라는 동호회가 인기를 끌었는데, 컴퓨터 전문가들이 주로 모인 이 동호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PC 동호회로도 유명하다. 엠팔 초이스 초기 창립 멤버 20 여명은 우리나라의 인터넷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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