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라는 회사와 두 명의 창업자의 비전을 믿고 선뜻 투자를 했던 초기 투자자 네 명에게 받은 100만 달러와 일부 소액 투자자 등에게서 조달한 돈이 있었지만, 구글이라는 회사는 수익이 거의 없었다. 최초의 수익은 당시 공짜 오픈소스 운영체제로 유명했던 리눅스(Linux)를 배포하는 레드햇(RedHat)에게 검색결과를 제공하기로 계약하고 한달에 2천 달러를 받기로 한 것과 일부 사이트에 구글 검색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매우 적은 사용료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인터넷의 확장속도는 상상을 초월하였고, 매일 검색 수는 수만 건에 달하면서 네트워크 트래픽과 서버비용이 모두 크게 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구글의 장점이었던 빠른 검색 역시 트래픽과 정보량의 증가로 인해 3~4초씩 걸리는 등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과 투자가 필요했는데, 처음 창업했던 대학원의 친한 동료였던 수전 워지츠키의 차고는 비좁아서 더 이상 이들이 머무를 수가 없었다. 


1999년 구글은 팔로알토(Palo Alto) 도심에 있는 2층 건물로 옮겨서 엔지니어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누구나 새벽까지 먹을 수 있는 각종 간식과 회의실에서 마사지 서비스를 하고, 회의탁자를 겸해서 녹색 탁구대를 구매하는 등 회사를 거의 놀이터화하기 시작하였고, 직원들이 먹고, 놀고, 마시면서 일을 하는 현재의 구글의 원시적인 캠퍼스 형태가 탄생한다.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구글이었지만, 그들의 비즈니스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고, 인터넷은 너무 빨리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의 수혈이 필요했다. 이 작업을 위해 총대를 맨 것은 초기 투자자인 람 슈리람이었다. 슈리람은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를 연결하였다. KPCB 는 인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컴팩, 넷스케이프, 아마존 등에 투자를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시스코, EA, 오라클, 야후, 그리고 애플에 투자한 회사이다. 두 회사 모두 투자자금을 모을 때부터 아주 한정된 사람들이 아니면 돈을 낼 기회조차 주지않을 정도로 커다란 명성을 가진 곳들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회사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다. KPCB가 건물도 화려하고, 급진적이며 세련된 이미지를 준다면, 세콰이어 캐피탈은 오래된 빌딩에서 매우 보수적인 올드보이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인지, KPCB는 미래가치를 높이보는 편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향후 높은 가치를 돌려줄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보다 현실적이고 사업내용이나 계획, 그리고 경영자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구글의 상대를 맡은 사람은 KPCB의 존 도어(John Doerr)와 세콰이어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 였다. 존 도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로터스, 컴팩, 넷스케이프 등의 투자를 결정하면서 업계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고, 마이클 모리츠는 옥스포드 출신으로 <타임>지의 기자 출신이다. 마이클 모리츠의 경우 애플의 취재를 담당했다가 스티브 잡스의 독선적인 스타일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스티브 잡스가 실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게 만든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마이클 모리츠는 야후와 페이팔(PayPal)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들은 구글의 두 창업자와의 미팅을 통해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그들의 비전에 홀딱 반하게 되고,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KPCB와 세콰이어 캐피탈은 서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투자만 받으라고 구글의 두 창업자들을 설득하지만, 이들은 둘 모두에게 받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런데, 구글의 현재 평가액을 1억 달러로 두 벤처캐피탈이 공히 계산을 한 것이 돌파구를 찾아주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3의 벤처캐피탈이 1.5억 달러로 평가를 해준다면서, 둘 다 투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세르게이 브린의 으름장이 먹혀들면서 양쪽이 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투자를 하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7일, 실리콘밸리의 양대 벤처캐피탈이 구글이라는 신생회사에게 각각 1250만 달러 씩 25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지분을 25% 확보했다는 뉴스가 세상에 나오면서, 스타 벤처기업으로서의 길을 구글이 열어가게 되었다.


(후속편에 계속 ...)



P.S. 이 시리즈는 메디치미디어의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라는 책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책을 구매하셔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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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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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와이드웹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 팀 버너스-리를 포함한 과학자 그룹이고, 이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해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만든 첫 번째 주인공을 넷스케이프와 마크 앤드리센과 짐 클라크라고 한다면, 그 뒤를 이어 커다란 대박을 터뜨린 기업이 바로 야후!(Yahoo!) 일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전자공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빗 파일로(David Filo)는 1994년 초 모자이크를 이용해서 전세계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얻은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생각에 수 많은 웹 사이트들을 종류에 따라 분류해서 목록을 만들게 되는데, 이 목록을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웹에 공개를 하였다. 이것이 훗날 야후!가 되는 "Je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 이다. 같은 해 4월 이들은 이 웹사이트를 "Yahoo!"로 개명하면서 처음으로 인터넷 포탈 사업을 시작하게 되며, 1995년 1월 18일 역사적인 "yahoo.com" 도메인을 획득하였다. 1995년 3월 1일 정식으로 회사를 창업한 이들은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정보를 찾는 사람들의 처음 기착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글자 그대로 인터넷으로 들어가기 위한 포탈(portal, 문)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인터넷 접속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때 구원의 손을 처음 내민 사람이 바로 넷스케이프의 마크 앤드리센이다. 1994년 투자를 받아 자금의 여유도 있었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인터넷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넷스케이프 입장에서는 야후!와 같이 인터넷 자체를 번성시켜줄 서비스 사업자가 필요하였고, 야후! 역시 늘어나는 인터넷 접속량을 넷스케이프 본사의 대형서버가 직접 담당해 주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동거관계는 금방 깨지게 된다. 그 이유는 야후!가 1995년 4월 5일 최고의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였던 세코야 캐피탈(Sequoia Capital)에게서 거액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인데, 이때 투자를 담당했던 사람이 KPCB의 존 도어와 함께 최고의 벤처 캐피탈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이다. 그에 비해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결정한 사람은 KPCB의 존 도어였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KPCB와 세코야 캐피탈은 실리콘 밸리 벤처캐피탈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라이벌이다. 이들의 라이벌 의식은 정말로 대단해서, 절대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불문율을 깨는 회사가 나오는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후 연재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세코야의 투자를 받은 야후!는 이런 주요 투자자들의 알력 때문에 할 수 없이 넷스케이프와의 협력관계를 정리하고, 독자적인 서비스에 나섰다. 


뒤를 이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야후!에 125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1.7%의 주식을 취득하였는데, 이 투자는 야후! 저팬이 설립되고, 한국에도 야후! 코리아가 생기면서 전 세계로 포탈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아직도 야후! 저팬은 일본의 포탈 1위의 지위를 지키고 있으며, 야후! 코리아도 초창기 한국의 인터넷 포탈을 대표하는 서비스로 자리매김했지만, 한국에서는 다음과 네이버의 부상으로 과거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한국시장에서 철수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외부에서의 호의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야후!는 창업한지 1년 만인 1996년 4월 12일, 아무런 수익모델도 없이 나스닥 상장을 시도한다. 짐 클라크가 넷스케이프를 통해 1995년에 기업공개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인터넷 기업에 대한 기대치가 상한가를 치고 있었기에 다소 무모해 보였던 이 시도는 성공을 하게 된다. 단숨에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야후의 창업자들은 "웹 포탈(web portal) = 야후!" 라는 이미지를 심으면서, 부침이 심했던 다른 포탈 또는 검색 서비스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된다. 그러나, 닷컴 열풍의 원조였던 넷스케이프가 인터넷 익스플로러와의 대결에서 참패를 하면서 급격하게 회사의 가치가 하락하고, 닷컴 회사들의 수익모델이 없다는 비판과 함께 비관적인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회사의 주가가 하락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야후!는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브랜딩 전략이 먹혀들면서 배너를 중심으로한 광고모델로 인터넷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다. 1999년 6천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면서, 닷컴 회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닷컴 회사의 마지막 자존심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지만, 2000년 들어 닷컴 회사 대부분의 가치에 대한 회의론이 빠르게 확산되며 급작스럽게 닷컴 버블이 터지는 위기를 겪으면서 야후!의 광고주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들의 퇴장으로 야후! 역시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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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에니악(ENIAC)을 개발한 펜실베니아 대학, 이 밖에도 컴퓨터 개발로 유명한 카네기 멜론 대학이나 일리노이 대학은 모두 동부에 있다. 이렇게 미국 동부가 컴퓨터 개발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대호 주변의 오하이오 주나 미시건 주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공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의 근간을 형성한 석유, 철강, 자동차 산업 등이 오대호 주변에서 번성했다. 


또한 산업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철도, 전력, 전화에 대해서도 동부에 투자가 집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기술적인 난제는 전화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 당시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이 중요하게 생각되었지만, 전통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통신 분야의 중요성이 컸다. 통신산업에도 컴퓨터를 이용한 기술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가 바로 미국의 틍신산업을 주도했던 AT&T의 벨 연구소이다. 



트랜지스터에서 싹튼 실리콘 밸리의 씨앗 


벨 연구소에서 개발한 트랜지스터는 1947년 세계최초로 개발된 이후 전 세계에 전자제품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세계 최초의 무선 장거리 통신기술, 세계 최초 TV방송위성인 텔스타도 벨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 그 밖에도 소니가 상용화한 디지털카메라용 반도체인 CCD나 최초의 실용적인 태양전지를 만들어 낸 곳도 벨연구소다. 


벨 연구소는 특허공유 등 공동연구의 원칙을 통해 연구소 내에서 생겨난 모든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연구소의 업적을 쌓아나갔고, 이것이 벨 연구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벨 연구소에는 수도 없이 많은 유명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인물로 클로드 섀넌이 있다. 1편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노버트 위너의 제자였던 섀넌은 비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하였고, 이를 이용한 정보이론을 만든 인물이다. 통신이 전통산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디지털 혁명이 전 세계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느꼈던 섀넌은 벨 연구소에 디지털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기술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의 이런 선견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벨 연구소는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군림하던 AT&T의 강력한 지배력을 이용해서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클로드 섀넌이 느꼈던 디지털과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는 세상 변화의 씨앗을 늦게 감지하였고, 1984년 미국의 반독점법에 의해 AT&T의 강제분할이 되면서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쇠락이 시작된다.


디지털 시대 힘의 이동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한 인물은 바로 벨 연구소와 트랜지스터와 관계가 있다. 트랜지스터는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라는 물리학자가 존 바딘, 월터 하우저 브래튼과 공동발명한 것으로 그는 이들과 함께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36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벨 연구소에 합류한 그는 바딘과 브래튼이 1947년 12월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자, 자신의 전기장 효과를 이용한 아이디어까지 각자 특허를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벨 연구소의 변호사는 쇼클리의 전기장 효과 원리가 1930년에 다른 사람에 의해 특허출원된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특허가 거부될 위험을 회피하고, 바딘과 브래튼의 디자인에만 적용해서 특허를 낸다. 쇼클리는 샌드위치 형태의 트랜지스터 개념을 생각해내고 지속적인 연구를 한 결과 1951년 접합 트랜지스터를 발명하고, 이 발명의 특허권을 가졌다. 쇼클리는 연설과 강의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미국 정부나 국방부의 고문으로도 활약했기에 대중매체들도 바딘과 브래튼 보다는 쇼클리를 더욱 조명하였다. 이렇게 쇼클리와 바딘과 브래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고, 쇼클리의 독단적인 성격이 벨 연구소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기에 그는 경영진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단지 연구자이자 이론가로서만 평가를 받았다. 이런 벨 연구소의 분위기에 실망한 쇼클리는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나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이 때 자신보다 10살 많지만, 대학동창으로 절친했던 아놀드 벡만(Arnold Orville Beckman)이 설립한 벡만 인스트루먼츠(Beckman Instruments)에서도 일자리를 얻었고, 그의 지원으로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설립하였다.


쇼클리는 자신의 명성과 벡만의 자금을 이용해서 벨 연구소에서 일하는 옛 동료들을 자신의 연구소로 데려오려 했으나, 대부분 그의 독선적인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부와 서부의 차이는 컸기 때문에, 동부의 우수한 인재들을 서부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쇼클리는 인근 대학을 돌며 뛰어난 졸업생을 찾아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연구는 생각보다 잘 진척되지 않았다. 연구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괴퍅한 성격을 견딜 수 없어서 결국 연구원 8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Fairchild Camera & Instrument)로 적을 옮겨서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하게 되는데, 쇼클리는 이들은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했기에 '배신자 8인'이라고도 불렀는데, 서부의 대학 졸업자들이었던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실리콘 밸리의 시작을 알린다.


'배신자 8인'에는 나중에 페어차일드를 떠나 인텔을 차린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와 고든 무어(Gordon Moore), 그리고 실리콘 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로 성장하게 되는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를 설립한 유진 클라이너(Eugene Kleiner) 등이 포함되어 있다. 페이처일드 반도체는 인텔 뿐만 아니라 내셔널 세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와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dvanced Micro-Devices)도 페어차일드에서 갈라져나온 회사이고, 이런 반도체 회사의 급성장으로 실리콘을 재료로 한 산업이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밸리지역을 번성하게 만들면서 이 지역을 실리콘 밸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


(다음 편에 계속)



참고자료:

<벨연구소 이야기>, 존 거트너 지음, 정향 옮김, 살림Biz, 2012

Farichild Semiconductor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William Shockley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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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도 구글의 초기 창업시절 이야기 입니다.


놀이터형 회사의 탄생

초기 구글이라는 회사와 두 명의 창업자의 비전을 믿고 선뜻 투자를 했던 초기 투자자 네 명에게 받은 100만 달러와 일부 소액 투자자 등에게서 조달한 돈이 있었지만 구글이라는 회사는 수익이 거의 없었습니다.  최초의 수익은 당시 공짜 오픈소스 운영체제로 유명했던 리눅스(Linux)를 배포하는 레드햇(RedHat)이라는 회사에게 검색결과를 제공하기로 계약하고 한달에 2천 달러를 받기로 한 것과 일부 사이트에 구글 검색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매우 적은 사용료를 받은 것이 전부 였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의 확장속도는 상상을 초월하였고, 매일 검색 수는 수만 건에 달하면서 네트워크 트래픽과 서버비용이 모두 크게 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구글의 장점이었던 빠른 검색역시 트래픽과 정보량의 증가로 인해 3~4초씩 걸리는 등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과 투자가 필요했는데, 차고는 비좁아서 더 이상 이들이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1999년 구글은 차고에서 나와서 팔로알토(Palo Alto) 도심에 있는 2층 건물로 옮겨서 엔지니어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누구나 새벽까지 먹을 수 있는 각종 간식과 회의실에서 마사지 서비스를 하고, 회의탁자를 겸해서 녹색 탁구대를 구매하는 등 회사를 거의 놀이터화하기 시작하였고, 직원들이 먹고, 놀고, 마시면서 일을 하는 현재의 구글의 원시적인 캠퍼스 형태가 탄생합니다.


미국의 벤처캐피탈, 구글의 진가를 알아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구글이었지만, 그들의 비즈니스는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고, 인터넷은 너무 빨리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의 수혈이 필요했습니다.  이 작업을 위해 총대를 맨 것은 초기 투자자인 람 슈리람이었습니다.   슈리람은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이자 IT 삼국지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양대산맥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를 연결합니다.  

KPCB 는 인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컴팩, 넷스케이프, 아마존 등에 투자를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시스코, EA, 오라클, 야후, 그리고 애플에 투자한 회사입니다.  두 회사모두 투자자금을 모을 때부터 아주 한정된 사람들이 아니면 돈을 낼 기회조차 주지않을 정도로 커다란 명성을 가진 곳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회사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습니다.  KPCB는 건물도 화려하고, 급진적이며 세련된 이미지를 준다면, 세콰이어 캐피탈은 오래된 빌딩에서 매우 보수적인  올드보이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래서인지, KPCB는 미래가치를 높이보는 편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향후 높은 가치를 돌려줄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보다 현실적이고 사업내용이나 계획, 그리고 경영자 등을 꼼꼼하게 살펴본다고 합니다.

구글의 상대를 맡은 사람은 KPCB의 존 도어(John Doerr)와 세콰이어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 였습니다.  존 도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로터스, 컴팩, 넷스케이프 등의 투자를 결정하면서 업계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고, 마이클 모리츠는 옥스포드 출신으로 <타임>지의 기자 출신입니다. 마이클 모리츠의 경우 애플의 취재를 담당했다가 스티브 잡스의 독선적인 스타일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스티브 잡스가 실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게 만든 장본인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랬던 그가 애플의 가장 중요한 투자자인 세콰이어 캐피탈의 파트너로서 일을 하게 된 것도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마이클 모리츠는 야후와 페이팔(PayPal)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구글의 두 창업자와의 미팅을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그들의 비전에 홀딱 반하게 되고,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KPCB와 세콰이어 캐피탈은 서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투자만 받으라고 구글의 두 창업자들을 설득하지만, 이들은 둘 모두에게 받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런데, 구글의 현재 평가액을 $1억 달러로 두 벤처캐피탈이 공히 매긴 것이 돌파구를 찾아줍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3의 벤처캐피탈이 $1.5억 달러로 평가를 해준다면서, 둘 다 투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세르게이 브린의 으름짱이 먹혀들면서 양쪽이 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투자를 하게 된 것입니다.


1999년 6월 7일, 실리콘밸리의 양대 벤처캐피탈이 구글이라는 신생회사에게 각각 $1250만 달러 씩 $25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지분을 25% 확보했다는 뉴스가 결국 세상에 나오면서, 공동 기자회견도 하는 등 한 순간에 스타 벤처기업으로서의 길을 구글이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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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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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IT 삼국지는 미국의 세계적인 기업들을 만들어낸 벤처 캐피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미국의 벤처 캐피탈의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 캐피탈 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면서 유명해진 것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성공한 2개의 라이벌 벤쳐 캐피탈로 꼽히는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와 세콰이어 캐피탈(Sequoia Capital)이 설립된 1972년 부터 입니다.  이들은 윗 사진에 보이는 실리콘 밸리 멘로파크(Menlo Park)의 Sand Hill Road 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8년 부터로, 이 해에 약 $7억 5천만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이는 미국의 연기금 등을 벤처 캐피탈과 같은 위험성이 있는 곳에 투자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1978년에 완화가 되면서 이들에게 자금 유입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런 여력을 바탕으로 여러 회사들에 투자를 하는데, 1980년대 초에 이들 중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사례들이 나오면서 1980년대 1차 번성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서, 1980년대 말에는 벤처 캐피탈의 수가 무려 650 개에 육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부 벤처 캐피탈들이 손실을 기록하기 시작하고, 특히 1987년에 있었던 한국과 일본에서 촉발된 주식폭락 사태와 맞물려 위기를 겪는 곳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현상에 따라 난립했던 벤처 캐피탈 업계도 경험과 실적을 바탕으로 구조가 조정이 되면서 소수의 성공적인 곳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 (KPCB) 

KPCB 는 4명의 설립자인 Eugene Kleiner, Tom Perkins, Frank J. Caufield, Brook Byers 의 이름에서 첫 글자를 모아서 만든 이름입니다.  1972년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벤쳐 캐피탈들이 경제나 경영학을 전공한 배경을 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KPCB의 설립자들을 각 산업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Kleiner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설립자 중의 한 명이고, Perkins 는 Hewlett-Packard 의 컴퓨터 하드웨어 부분의 리더 중의 한 명 이었습니다.  

KPCB는 현재까지 300개가 넘는 IT 기업과 바이오 회사에 투자를 해왔습니다.  이들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Amazon.com, America Online, 컴팩(Compaq), EA(Electronic Arts), 제넨텍(Genentech), 구글, 마크로미디어(Macromedia), 넷스케이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활발하고, 좋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파트너들이 많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KPCB 에는 정말 유명한 파트너들도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구글의 이사회에서도 활약하고 있고, 스티브 잡스와 함께 iFund 를 조성하기도 한 존 도어(John Doerr) 입니다.  존 도어에 대해서는 향후 한 차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세콰이어 캐피탈 (Sequioa Capital)

KPCB 최대의 라이벌인 세콰이어 캐피탈은 돈 밸런타인(Don Valentine)이 1972년에 설립한 곳입니다.  이들 역시 훌륭한 파트너들과 함께 수많은 회사들에게 투자를 해왔는데, 대표적인 기업들이 애플, 구글, 유튜브, 페이팔, 시스코, 오라클, EA(Electronic Arts), 애드몹(Admob), 자포스(Zappos) 등이 있습니다.

KPCB에 비해 IT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편입니다.  돈 밸런타인은 IT 삼국지에서도 한 차례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무턱대고 찾아와서 투자해 달라고 조른 사건이나, 스티브 잡스를 그렇게나 싫어했기에 당시 인텔에서 은퇴한 젊은 사업가인 마이크 마큘라(Mike Makkula)를 소개시켜서 면피를 했었던 사건은 매우 유명합니다.  마이크 마큘라가 애플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투자를 결정하고, 그와 함께 애플에 투자를 하게 되어 세콰이어 캐피탈의 세계적인 성공사례를 만들어 주었기에 세콰이어 캐피탈과 애플의 인연은 각별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이었던 두 회사는 정말 라이벌 의식이 심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덜 하지만, 초창기에는 상대편이 투자한 회사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았고, 괜찮은 회사를 발굴하면 어떻게는 먼저 투자를 하고 상대편의 투자를 막기 위해서 방해를 했었던 관계입니다.  KPCB가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하였는데, 야후!가 넷스케이프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확장하고 있던 시절에 세콰이어 캐피탈이 야후!에 투자를 하고 넷스케이프와의 관계를 끊도록 한 사례는 이런 관계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치열한 라이벌 관계와 같은 회사에 동시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뒤이어 등장하는 위대한 하나의 회사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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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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