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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터넷이 전쟁과 국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연구자들의 네트워크와 대학을 엮으면서 학술적인 목적의 공유를 위한 목표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일부 일반인들이 대학의 계정을 얻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에 참여한 영리기업들에 의해 전화접속을 이용한 서버를 호스팅하는 서비스들이 조금씩 활성화되었다. 


또 한 가지 변화의 바람은 PC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과거에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컴퓨터를 집에 갖추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PC의 보급은 워드프로세서나 스프레드 시트 등의 업무용 소프트웨어와 베이식 등의 프로그래밍 언어, 그리고 PC게임 등의 활성화와 같이 초기에는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보급과 활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지만, 전화선에 연결해서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있는 모뎀(modem)이라는 주변기기가 개발되고 그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일반인들도 다양한 방식의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들 중에서, 열정을 가진 일부는 BBS(Bulletin Board System, 주로 사람들의이 모여서 글을 올리고, 읽고, 찾을 수 있는 게시판)라는 소프트웨어를 PC에 설치하고, 자신의 PC를 호스트로 하는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이렇게 호스트를 구성하고 서비스를 하기 위해 많은 비용과 자신들의 노력을 들였는데, 순전히 자발적인 열정에 의한 활동이었다. 놀랍게도 이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단시일 내에 폭발적으로 늘면서 전 세계에 BBS 바람이 일어나게 되었다. 호스트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모뎀이 필요했는데, 모뎀은 전화선을 이용해서 음성신호와 디지털 신호를 변환하는 장치로 모뎀을 이용해서 호스트에 접속할 때의 특유한 "삑~ 끽 ~" 거리는 사운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다. 전화선을 통화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속하기 때문에, 해당 전화선에 누군가 접속해 있으면 통화 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열성적인 BBS 호스트는 하나의 회선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 개의 전화회선과 모뎀, 호스트 PC등을 확보해서 서비스를 하였다. BBS의 운영자는 흔히 시삽(sysop)이라고 불렀는데, 이후 대규모의 BBS들을 모아서 서비스하는 PC통신 서비스의 동호회 운영자도 시삽이라고 불리게 된다. 


최초의 BBS의 역사에 대해서는 캘리포니아와 시카고의 시스템들을 거론한다. 1973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는 터미널들을 유선으로 연결한 커뮤니티 메모리(Community Memory)라는 BBS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성된다. 커뮤니티 메모리는 터미널의 사용자들이 동전을 넣고 연결을 한 뒤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BBS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네트워크 구성으로는 BBS라고 부르기 어렵지만, 키워드로 메시지를 태그하거나 검색 등도 가능했으며, 글을 올리고 읽는 방식은 이후 만들어지는 BBS들과 거의 똑같았다. 전화선을 이용해서 모뎀으로 연결하는 BBS는 1978년 시카고에서 워드 크리스텐센(Ward Christensen)과 랜디 수에스(Randy Suess)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이들은 1978년 2월 16일 CBBS(Computerized Bulletin Board System)이라는 서비스를 오픈하는데, 이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BBS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3년 미국에는 6만 개가 넘는 BBS가 운영되었을 정도로 호황기를 맞게 되었고, PC를 이용한 컴퓨터 통신 또는 네트워크는 곧 BBS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BBS 문화는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PC를 이용한 데이터통신이 시작된 것은 1987년의 한글전자사서함서비스(H-mail)이 처음이다. 이 서비스는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 LG U+에 현재는 인수합병됨)이 1984년 미국의 다이얼콤(Dialcom), 노티스(Notice) 등과 연결한 상용서비스였는데,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PC통신 은 한국경제신문사가 1988년 9월 개시한 케텔(KETEL, Korea Electronic Economic daily TELepress) 이었는데, 필자도 서비스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한국경제신문사의 충정로 사옥에 찾아가서 당시 호스트로 이용되던 피라미드 컴퓨터에 아이디를 등록하고 이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에는 1200 bps(bits per second) 라는 느린 속도의 모뎀(이 정도 속도면 한줄 한줄 옆으로 글자가 찍히는 것이 보인다)으로 서비스를 했었는데, 초기에는 끊어지지만 않으면 한 통화로 무료 통신을 할 수 있었기에 집의 전화기를 완전히 불통상태로 만들어 놓고 서비스를 이용해서 아이들과 부모들의 묘한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이후 종량제가 도입되면서, 아이들이 과다하게 이용하여 전화요금이 수십 만원이 청구된 사건 등이 신문이나 TV뉴스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케텔과 양대산맥을 이룬 서비스는 데이콤의 PC서브/천리안이었는데, 유료서비스여서 사용자 수는 적지만, 상대적으로 사용자 연령대가 높고 서비스가 쾌적하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차별화 포인트가 있었기에 사용자들은 흔히 케텔을 '개털' PC서브를 '피박'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이는 가난한 케텔 사용자들과 사용료가 비싼 PC서브의 특징을 서비스의 발음과 연계지었던 별명인데, 당시의 PC통신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PC 통신을 통해 형성된 “동호회"는 ‘정모', ‘번개', ‘공구'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온라인 공동체 문화를 형성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PC통신을 대표하던 한국경제신문의 케텔은 이후 한국통신과 한국PC통신(주)에 인수되면서 하이텔(HiTEL)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회사 이름을 KTH로 바꾸면서 완전히 인터넷 서비스로 전환한 것이 파란닷컴(Paran.com)이었는데, 파란닷컴이 2012년 7월 31일 24시를 기준으로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이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설 BBS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과 1988년 5월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가 효시가 되었는데, 대구에서 4개의 접속노드를 갖추어 다중접속자를 지원한 '달구벌'이 개설되고, 이듬해에는 '엠팔(EMPal) BBS'가 개설되면서 초기의 열성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게 되었다. 당시 엠팔의 사용자들은 실제로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커뮤니티가 된다. 초창기에는 외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을 한글화해서 사용했지만, 1990년 10월에 최초의 국산 호스트 프로그램인 '카페'가 조병철에 의해서 공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성욱의 '곰주인', 김성철의 '밀키웨이'가 나왔으며, 1991년 최고의 BBS 호스트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최오길의 '호롱불'이 등장하면서 전국적인 사설 BBS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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