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 마피아 멤버들. 비노드 코슬라, 빌 조이, 앤디 벡톨샤임, 스캇 맥닐리 from liveandventure.com



앞선 편에서 언급한 자바를 만들어낸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2009년 오라클에 인수되며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회사가 되었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초창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은 실리콘 밸리의 역사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향후 구글의 CEO가 되는 에릭 슈미트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CTO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천재 프로그래머 빌 조이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막강한 멤버들의 영향력을 감안해서 실리콘 밸리의 한국계 벤처투자가이기도 한 Phil Yoon 님은 자신의 블로그 Live & Venture를 통해 이들을 "썬 마피아"로 표현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한 글이 있다. 이번 편에서는 Live & Venture 블로그에서 소개된 썬 마피아 멤버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원문은 아래 참고자료에 링크된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연관글:


앤디 벡톨샤임 (Andy Bechtolsheim), 비노드 코슬라 (Vinod Khosla) 그리고 존 도어 (John Doerr)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 창업자는 모두 4명이지만, 앤디 벡톨샤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독일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공부하다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SUN이라는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디자인하였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창업을 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1982년 시작된 회사가 바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이다. 그는 1995년까지 썬에서 일을 하였는데, 하드웨어 디자인을 총괄하였다. 썬을 떠난 이후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장비회사인 시스코(Cisco)의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엔젤투자자로도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가 바로 절친이었던 스탠포드 대학의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 교수의  제자였던 두 명의 박사과정 학생의 회사에 대한 투자이다. 앤디 벡톨샤임은 한 눈에 이 학생들의 서비스의 가치를 알아보고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즉석에서 끊어주었는데, 이 투자가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자신에게도 수십 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부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구글이다. 앤드 벡톨샤임의 구글에 대한 이 투자는 벤터 투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투자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비노드 코슬라는 인도의 IIT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서 의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스탠포드 대학에서 MBA 공부를 마친 재원이었다. 그는 데이지시스템이라는 반도체 디자인 소프트웨어 회사를 다니던 중 앤디 벡톨샤임을 만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창업에 동참하였다. 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초창기인 1982년부터 CEO로 일을 하였는데, ICT 회사의 경영보다는 역시 벤처투자가 적성에 맞았는지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투자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86년 그는 실리콘 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인 KPCB에 합류하였고, 여기에서 성공적인 투자경력을 쌓았으며, 명쾌한 강의와 활발한 외부활동을 통해 자신의 개인 브랜드도 쌓아서 2004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코슬라 벤처스(Khosla Ventures)라는 벤처캐피탈을 설립하였다. 코슬라 벤처스는 주로 ICT와 환경과 관련한 기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곳으로 실리콘 밸리의 주요 벤처캐피탈로 그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여전히 활발한 외부활동을 하면서 많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고 있는 인물이다. 

존 도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직접 일을 한 인물은 아니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직접 투자를 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한 인물이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가 아니더라도 그는 벤처투자 업계에서 전설적인 투자자로 명성을 쌓았다. 그가 투자해서 성공한 회사는 일일히 열거하기가 힘든 정도인데, 그 중에서 크게 성공한 회사의 일부만 나열하면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넷스케이프, 아마존, 구글 등을 꼽을 수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투자가 그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있었기 때문인지, 이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멤버들인 비노드 코슬라와 빌 조이를 자신이 있는 KPCB로 영입하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노드 코슬라는 벤처투자자로서도 크게 성공하였다.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와 캐롤 바츠 (Carol Bartz)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의 경력 이후 앤디 벡톨샤임과 비노드 코슬라 등이 투자자로서 유명해졌다면, 에릭 슈미트와 캐롤 바츠는 경영자로서의 실리콘 밸리의 성공신화를 이어갔다. 에릭 슈미트는 앞선 연재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커리어를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처음 성공적으로 그려 나갔다. 에릭 슈미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창업자 중의 한 명이자 최고의 개발자였던 빌 조이와 대학원에서 친구라는 인연으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이후 자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CTO 자리까지 올랐고, 노벨의 CEO를 거쳐 구글의 CEO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에릭 슈미트가 구글의 CEO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에는 KPCB의 존 도어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에릭 슈미트와 구글의 성공에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간접적인 영향력이 매우 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릭 슈미트와 함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출신으로 성공적인 경영자 경력을 쌓은 인물이자, 실리콘 밸리의 여성 CEO 파워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캐롤 바츠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초창기부터 일을 시작해서 세계총괄 영업/기술지원을 총괄하는 부사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캐롤 바츠의 커리어가 가장 빛난 것은 1992년 CEO로 자리를 옮긴 오토데스크(Autodesk)에서였다. 그녀는 오토데스크의 CEO로서 일한 14년간 회사의 매출을 3억 달러에서 15억 달러로 5배나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그녀와 관련한 일화도 실리콘 밸리에서 여러 개 전해지는데, 여성으로서 매우 거친 입담의 소유자로 다양한 이야기들도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 오토데스크 CEO로 부임하기 며칠 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힘든 함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오토데스크에서 풀타임 하면서 암을 이겨낸 이야기는 전설적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많은 기대를 안고 선임된 야후!에서의 CEO 경력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그녀의 CEO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는 그 밖에도 공동창업자이면서 동시에 CEO로 22년을 재직하면서 대표적인 얼굴로 자리매김한 스캇 맥닐리,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BSD 유닉스의 개발자로 이 연재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빌 조이 등 오늘날 실리콘 밸리를 뒤흔드는 페이팔 마피아와 비교하더라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들을 배출한 회사이다. 비록 이제는 오라클에 인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이름은 썬 마피아들의 이름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듯하다.


참고자료:



P.S. 이 시리즈는 이제 책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총 60편으로 진행될 연재가 모두 끝나고, 일부 내용의 윤문과 색인작업까지 마친 책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는 국내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대부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책을 보시면 더욱 좋겠구요. 여력이 안되는 학생들이나 여유롭게 블로그를 읽는 것이 더 좋으신 분들은 1주일에 1차례 정도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니, 블로그를 구독하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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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현재는 과거의 위세를 잃고, 오라클(Oracle)에 인수되는 신세가 되었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는 한동안 구글의 CEO로 맹활약했고, 현재도 구글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에릭 슈미트(Eric Schmidt)가 CTO로서 일했던 실리콘 밸리를 대표했던 기술기업이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탄생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첫 번째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인 Sun-1 은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이 스탠포드 대학의 대학원 학생이던 시절에 처음 디자인하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3M(1 MIPS 속도, 1 MB 메모리, 1 메가픽셀 해상도) 개념을 현실화한 컴퓨터로 유닉스의 가상 메모리를 지원할 수 있는 메모리 관리유닛(MMU, Memory Management Unit)을 가진 모토롤라의 6800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1982년 2월 24일, 앤디와 함께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 스캇 맥닐리(Scott McNealy)가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하였다. 뒤를 이어 BSD 유닉스의 메인 개발자였던 버클리 대학의 빌 조이(Bill Joy)가 합류하면서 늦었지만 공동창업자의 일원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SUN 이라는 이름은 Stanford University Network 이라는 문구의 이니셜을 딴 것으로 그만큼 이들은 스탠포드 대학에 대한 애착이 컸다. 


뒤를 이어 1983년에는 이후 구글의 CEO 가 되는 에릭 슈미트가 입사를 한다. 그는 초기 썬의 워크스테이션부터 시작해서, 자바 개발과 관련한 프로젝트들을 많이 주도하면서 CTO(Chief Technology Officer)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데, 1997년 노벨(Novell)의 CEO로 자리를 옮긴다. 썬은 SPARC (Scalable Processor Architecture) 라고 불렸던 고성능의 RISC(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ing) 라는 CPU를 1986년에 발표하면서, 이를 이용한 첨단 워크스테이션으로 당시 대형서버와 PC 사이에 존재했던 워크스테이션 시장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였다. SPARC CPU는 당시 PC 에서 많이 이용되던 인텔의 286/386 등의 CISC(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ing) 계열 CPU 보다 훨씬 빠른 성능을 보였으며, 썬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유닉스 계열인 솔라리스(Solaris)라는 운영체제와 함께 이용될 경우 성능의 격차가 훨씬 커졌기 때문에 고가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나 연구소를 중심으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워크스테이션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자바, 인터넷을 만나 꽃을 피우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솔라리스라는 운영체제를 탑재한 워크스테이션과 서버를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 하드웨어 회사였지만, 오늘날 가장 많은 개발자들이 이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자바(Java)를 처음 만들어낸 회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자바는 제임스 고슬링(James Gosling)이 1991년 시작한 프로그래밍 언어 프로젝트로 원래는 제임스 고슬링이 많은 셋탑박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운영체제와 관계없이 한 번만 코딩을 하면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 환경과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진행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제임스 고슬링의 사무실에서 보이는 참나무(oak)에서 영감을 받아 Oak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이미 상표등록이 되어있다는 것을 안 뒤에 동료들과 여러 이름들을 자바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찾는 과정에서 커피의 산지를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제임스 고슬링은 하드웨어와 관계없이 동작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어떤 하드웨어나 운영체제에서도 동작할 수 있는 가상머신(virtual machine)을 만들고, 이 위에서 동작하게 만들면 한 번만 만들어서 여러 곳에서 쓸 수 있다는(Writing Once, Run Anywhere) 개념을 중요시하였고, 또한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하던 C/C++ 프로그래밍 언어와 문법이 비슷하지만 골치거리인 메모리 관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언어를 디자인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자바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를 통해 1995년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후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자바는 전세계 프로그래머들이 가장 사랑하는 언어로 그 자리를 공고하게 지켰다. 당대 최고의 컴퓨터 관련 기업이었던 IBM 역시 자바에 대해 강력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특히 강력한 웹 지원기능과 서버환경에 적합한 도구 및 기능을 제공하면서 WAS(Web Application Server) 소프트웨어들이 대세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썬 마이크로시스템스가 닷컴 버블 시절에 가장 많은 서버 장비를 판매하는 회사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만드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아이폰과 함께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역시 자바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자바의 영향력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에 있다고 하겠다. 


이후 구글의 CEO가 된 에릭 슈미트는 이런 부분에 주목을 하였고, 자바의 활용과 관련한 많은 정책과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CTO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닷컴버블 기간인 1995~2000년 사이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정말 대단한 성장을 하였다. 수요가 많았기에, 투자도 많이 하였고 온통 장미빛 전망에 휩싸였기에 지출도 그만큼 늘어나면서 비약적으로 회사의 규모가 커졌다. 이런 성장에는 닷컴버블기간 자금이 풍부했던 벤처회사들이 효율성을 중시하면서 적절한 서버에 투자를 하기보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 같은 회사의 고가의 서버에 과감히 투자하는 사례가 늘어난 측면도 많았기에, 닷컴버블이 꺼지면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도 x86 계열의 저가 서버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주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자바스크립트의 탄생

자바스크립트는 이름은 자바와 비슷하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뿌리를 가졌다. 자바스크립트는 넷스케이프사의 브렌단 아이크(Brendan Eich)에 의해 개발된다. 그가 넷스케이프에 취직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최고의 브라우저 자리는 모자이크(Mosaic)가 쥐고 있었다. 브렌단 아이크는 모자이크를 잡기 위해서는 웹에 프로그래밍의 힘을 부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웹 디자이너들이 HTML을 이용해서 홈 페이지를 만들면서 웹 페이지에 직접 삽입이 가능한 간단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안하기로 하였다. 당시 가장 유명한 프로그래밍 언어는 C/C++ 였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발표한 자바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복잡한 언어를 새로 고안하기 보다는 자바의 문법을 일부 빌어와서 스크립트 언어를 정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바스크립트이다. 자바스크립트는 컴파일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쓸 수 있어야 했고, 쉽게 이용해야 했지만 자바와 이름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허락을 얻어야 했는데, 당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를 이끌던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인 빌 조이(Bill Joy)가 쉬운 스크립트 언어의 문법에 자바의 요소가 일부 들어가고 널리 확산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좋아했기에 별다른 무리없이 자바스크립트라는 이름을 쓸 수 있었다.

자바스크립트를 디자인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쉽게 카피/페이스트해서 기능을 그대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디자이너들이 내부에서 프로그램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비주얼한 효과를 보고서 해당 코드 블록을 복사해다가 삽입하면 그대로 동작하는 그런 편리한 활용성이 가장 중시했고, 이런 편리함 때문에 실제로 많은 웹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비주얼 효과를 가진 자바스크립트를 사용하면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초창기의 브라우저 전쟁에서는 자바스크립트의 강렬한 비주얼 효과때문에 되려 지나치게 화려하고 귀찮은 페이지들도 많이 등장했고, 이에 따른 사용자들의 불만이 폭주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우저들 사이의 호환성 문제도 발생하면서 문제점도 적지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후 웹 기반의 기술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브라우저가 고도화되면 될수록 자바스크립트의 활용성은 점점 높아져서, 이제는 자바스크립트를 빼놓고는 인터넷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자바와 함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스크립트 언어의 자리를 공고히하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참고자료:

IEEE Brendan Eich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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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PA에서는 버클리 대학에 유닉스 개발을 맡기고, 네트워크 망과 관련한 프로토콜로 TCP/IP를 유닉스를 포함시키고자 했다. TCP/IP(Transmission Control Protocol / Internet Protocol)는 빈톤 서프(Vinton Cerf)밥 칸(Bob Khan)이 고안한 것으로 오늘날의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프로토콜로 인터넷 상에 있는 컴퓨터끼리 데이터를 주고 받는 방법을 정의하고 있다. 

DARPA는 TCP/IP 프로토콜을 C언어로 구현하는 프로젝트를 버클리 대학이 아니라 보스턴에 있는 BBN(Bolt, Beranek and Newman)이라는 회사에 맡겼다. 그런데, BBN이 작성한 TCP/IP 코드를 버클리의 빌 조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천재개발자라고 불리는 그답게, 빌 조이는 BBN의 코드를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더욱 뛰어난 TCP/IP 코드를 작성한 뒤에 이것을 BSD 유닉스에 탑재하겠다고 DARPA에 주장을 하였다. DARPA에서 큰 돈을 투자해서 이 분야에서 최고라고 했던 기업에 맡겨서 작성한 코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버클리 대학의 20대 대학원생인 빌 조이가 작성한 코드가 더 뛰어난 성능을 보인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작성된 빌 조이의 TCP/IP 코드는 주로 이더넷으로 구성된 대학의 네트워크에서 최적의 성능을 보였고, 뛰어난 운영체제에 분산된 네트워크 환경에 최적화된 프로토콜을 멋지게 통합함으로써 오늘날의 인터넷이 기지개를 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인터넷에게 있어 TCP/IP는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 인프라와도 같은 것이다. 90년대 이후에 인터넷이 급격하게 팽창했을 때에도 BSD 유닉스의 TCP/IP는 이를 무리없이 처리하였고,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이후 AT&T와의 법정소송에서 BSD 유닉스가 승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AT&T와 버클리의 법정 싸움

벨 연구소에서 개발된 유닉스는 AT&T가 1984년 반독점법에 의해 여러 회사로 강제분할이 되면서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게 된다. AT&T가 더 이상 독점기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AT&T가 유닉스를 상업화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제동을 걸기 어려워진다. AT&T는 공공적인 측면을 감안하여 1년에 99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에 이미 많은 대학과 기업에 라이센스를 주고 있었는데, 상업화의 길이 열리자 라이센스 비용을 25만 달러까지 올렸다. 그런데, 버클리의 BSD 유닉스가 널리 활용이 되기 시작했고, 버클리의 CSRG 출신들이 설립한 BSDi 라는 회사와 버클리 대학에서 저렴한 비용에 자신들의 유닉스를 판매되었기 때문에 사업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AT&T는 1992년 BSDi와 버클리 대학이 자신들의 코드를 훔쳤다며 미국 법정에 제소를 하였다.

그런데, 당시 AT&T가 상업화의 중요한 제품인 시스템 5(System 5)에는 많은 BSD 유닉스의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TCP/IP 코드는 기능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기도 하였다. 버클리 대학은 자신들의 코드를 해당 소스의 저작권이 버클리 대학에 있다는 것만 명시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정작 AT&T는 저작권 문구를 삭제하고 마치 자신들이 개발한 것처럼 시스템 5를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버클리 대학의 변호사들이 AT&T를 맞고소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소송은 AT&T에 불리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결국 벨 연구소에서 고유로 작성한 코드를 제거하는 조건으로 이 소송은 합의에 이르게 되는데, 버클리 대학의 뛰어난 해커들은 벨 연구소에서 만들어진 코드를 완전히 없애고 BSD 유닉스를 완전히 자유로운 운영체제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천재 개발자 빌 조이

어찌보면 빌 조이의 TCP/IP에 대한 치기어린 고집이 오픈소스 정신을 완고한 저작권 법정에서 살려낸 것이다. 빌 조이는 TCP/IP 뿐만 아니라, 화면의 특정위치에 커서를 배치할 수 있는 새로운 터미널 기기들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vi 편집기도 작성을 했는데, 아직도 이 편집기는 전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유닉스 계열의 운영체제에도 기본적으로 탑재되는 중요한 소프트웨어이다. 

개발자인 빌 조이에 대해서도 주변의 다양한 평가가 있다. 그가 작성한 코드는 지저분하고 다른 사람들이 읽기가 매우 힘든 것으로 악명 높아서, 유지보수하는데 엄청난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뛰어난 개발자라도 일주일 이상 걸릴 일을 빌 조이는 자신 만의 방식으로 하루 정도에 해결을 했다고 한다. 그는 매우 방대한 코드를 순식간에 읽고, 이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대규모 코드를 금방 고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생활에서도 그런 그의 능력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여러 가지 일을 전혀 간섭을 받지 않고 나누어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뛰어난 개발자였기에, 빌 조이는 리눅스의 정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오픈소스의 힘이 수많은 개발자들의 참여와 열정에서 나온다는 리눅스의 평등주의적인 윤리관을 믿지 않았다. 리눅스의 기저에는 모든 개발자들이 뛰어난 코드를 작성하지 못해도, 여럿이 함께 코드를 검토하고 개발을 한다면 결국 위대한 코드가 나타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에 비해 빌 조이는 참여하는 대부분의 개발자들은 실력이 떨어지며, 그 중에서 버그를 찾아내고 이를 제대로 개선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몇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오픈소스 개발방법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핵심개발자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빌 조이와 버클리 등이 관여한 오픈소스 운동은 버클리 캠퍼스에서 시작된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의 또 하나의 변형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소스코드는 어찌보면 독특한 언어로 만들어진 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기계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 언어는 컴퓨터로 하여금 어떤 동작을 하도록 만들고, 컴퓨터의 동작에 의한 상황변화에 따른 상태를 컴퓨터에게 들을 수 있는 대화의 도구이다. 그리고, 이런 컴퓨터들의 네트워크는 자유로운 연설과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인터넷의 힘에 의해 해방의 기운을 느낀 버클리의 해커들은 “기계로서의 컴퓨터”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인간과 기계, 그리고 기계를 매개로 한 인간과 인간의 의사소통을 촉진시켰다. 이것이 해커들과 자유언론운동, 그리고 오늘날의 인터넷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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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 Joy from Wikipedia.org



유닉스에서 시작된 혁신의 바람이 미국 서부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곳으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버클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이다. 그리고, 버클리에서 시작된 변화의 소용돌이에 여러 인물들이 큰 역할을 하게 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천재 개발자로도 불리던 빌 조이(Bill Joy)가 있다.


켄 톰슨과 자유언론운동, 그리고 빌 조이와의 만남

유닉스를 만든 켄 톰슨(Ken Thompson)은 1966년 버클리에서 전기공학 학위를 취득하고, 벨 연구소에서 근무를 하였다. 켄 톰슨이 버클리에서 학교를 다니던 당시 버클리 대학은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의 발상지로 유명했는데, 이 운동은 버클리 캠퍼스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으로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권리와 학술적인 자유를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버클리 캠퍼스 내부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이후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시민의 자유권리에 대한 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켄 톰슨은 벨 연구소에서 동료들과 같이 개발한 유닉스에 대해서 거리낌없이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사상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75년 벨 연구소로부터 안식년 휴가를 받아서 버클리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켄 톰슨이 버클리로 돌아온 1975년, 버클리에는 21세 약관의 나이로 미시건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버클리 대학원에 입학한 뛰어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빌 조이다. 빌 조이의 천재성과 관련해서는 많은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 그 중 대학 구술시험을 할 때 새로운 정렬 알고리즘을 그 자리에서 창안해서 면접을 본 교수들이 "흡사 어릴 적의 예수를 보는 듯하다"라는 평까지 들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1975년의 버클리는 켄 톰슨이 다니던 시절과는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과거와는 달리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곳이 되어 있었고, 대신 컴퓨터 과학과 관련한 연구를 수행하기에는 좋았다. 빌 조이는 버클리에서 몇몇 동료 대학원생들, 그리고 연구원들과 함께 벨 연구소의 유닉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버클리판 유닉스(Berkeley Unix) 또는 버클리 소프트웨어 배포판(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 BSD) 으로 불리는 BSD 유닉스이다. BSD 유닉스는 벨 연구소의 오리지널 유닉스보다 훨씬 훌륭한 성능을 자랑했기에, 이후 인터넷의 모태가 되는 미국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아르파넷(ARPANET) 프로젝트의 기본 컴퓨터 환경으로도 선택되었다. 

비록 1975년에는 버클리 캠퍼스에 과거 자유언론운동의 정신이 잊혀지고 있었지만, 버클리로 돌아온 켄 톰슨은 자유언론운동의 정신을 또 다른 세계적인 운동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빌 조이 등이 있었던 에반스 홀 건물(Evans Hall) 4층에서는 수시로 켄 톰슨이 주재하는 유닉스 소스코드 강독회의가 열렸다. 수십 명의 서부해안의 열성적인 개발자들이 그의 회의에 참여하였고, 여기에서 오픈소스 운동의 싹이 트게 된다. 켄 톰슨은 버클리로 돌아와서 자유언론운동을 다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코드를 이용해서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준 것이다.


BSD 유닉스와 오픈소스 개발방법론

BSD 유닉스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소프트웨어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BSD는 소수의 핵심 개발자들이 네트워크상의 다수의 공헌자들의 성과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개발이 되었는데, 이것이 "오픈소스 개발방법론"의 시초가 되었다. BSD 유닉스가 탄생한 이후 유닉스는 다양한 변신을 하게 되는데,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벨 연구소의 모기업인 AT&T와의 법정소송을 겪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수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새로운 개방된 운영체제의 역사를 쓴 BSD 유닉스에 대해 어떠한 법적인 책임을 물리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90년대 초 지리한 법정싸움 끝에 BSD 유닉스는 100% 자유롭게 배포가능한 소프트웨어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그 이후에 FreeBSD, OpenBSD, NetBSD 등과 같은 여러 후손들이 생겨났다.

BSD 유닉스를 이끌던 빌 조이는 1982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가 설립되면서 공동창업자로 IT산업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떠난 뒤의 BSD 유닉스의 지위는 사실 과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개발자 집단이 분열하였고, AT&T와 소송전이 지속되면서 동력이 약해졌던 것이 큰 원인이다. BSD의 빈 자리는 핀란드의 신성 리누스 토발즈가 지휘한 리눅스가 메꾸게 되었으며, 리눅스는 현재 모든 컴퓨터 운영체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BSD 유닉스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은 BSD 유닉스의 핵심커널이 리눅스보다 기술적으로 훨씬 우수하기 때문에 앞으로 새로운 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BSD 유닉스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빌 조이지만,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만든 CSRG(Computer Systems Research Group, 컴퓨터시스템연구그룹)를 조직한 버클리 대학의 컴퓨터과학과 교수인 밥 파브리(Bob Fabry)도 큰 공로자이다. CSRG는 빌 조이를 비롯해서 샘 레플러(Sam Leffler), 커크 맥쿠식(Kirk McKusick), 키스 보스틱(Keith Bostic) 등과 같은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그는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과의 관계가 좋아서, 많은 연구지원금을 타낼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아르파넷과 BSD 유닉스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밥 파브리가 유닉스를 선택한 것은 비용적인 문제가 컸는데, 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대세를 이루던 메인프레임(mainframe) 컴퓨터와 터미널 방식으로 학생들이 컴퓨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당 5만 달러 정도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유닉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DEC의 PDP 계열에서도 문제없이 동작했고, 적은 라이선스 비용으로 소스코드까지 받아서 쓸 수 있었기에 대학에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유닉스의 장점은 아르파넷 프로젝트의 핵심 운영체제를 선정할 때에도 그대로 접목되었다. 아르파넷 프로젝트에 이용된 DEC의 VAX 컴퓨터는 DEC의 VMS라는 운영체제가 기본으로 이용되었는데, VMS는 이 기기 만을 위해 만들어진 상업적 운영체제로 소스코드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스코드를 보고 고칠 수 있으면서 VAX 컴퓨터에서 이용될 수 있는 BSD 유닉스가 대안으로 선택되었다. 어쩌면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에는 이렇게 운영체제를 선택할 때부터 과거의 철학과는 다른 접근방식을 가졌던 역사가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밥 파브리는 2000년에 이루어진 Salon.com의 앤드류 레너드(Andrew Leonard)와의 인터뷰에서 "단 한번도 소프트웨어가 공짜이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적이 없냐?" 라는 질문에 대해 "소스코드를 돈 받고 팔아야겠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제 생각에는 그 질문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이와 같이 BSD 유닉스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은 마치 교수들이 수천년동안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공개해왔듯이 BSD 유닉스를 학문공동체와 공유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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