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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많은 열린 마음의 선지자들에 의해 발전된 인터넷은 사실 그 정의조차도 모호하게 이용되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TCP/IP 프로토콜을 이용한 네트워크를 모두 인터넷으로 칭하였지만, 기본적으로 ARPANET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소유와 운영, 관리 등에 있어 혼선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과 기업들, 기관들이 이용을 하면서 뭔가 제대로 인터넷을 정의하고, 단순한 국가에서 이용하는 학술적인 연구 네트워크 이상의 가치와 철학을 가지기 시작한 이 네트워크에 대한 운영과 관리를 보다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결국 1995년 인터넷은 새로운 정의를 가지게 된다.


ARPANET과 MILNET의 분리

다시 역사를 뒤돌아보자. 어찌보면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산물이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에 자극받은 미국이 만든 ARPA의 설립과 이들이 2차 세계대전 때의 효과적인 대학과 연구소, 그리고 군의 성공적이었던 네트워크의 위용을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구축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ARPANET이다. 그러나, TCP/IP를 만든 연구자들의 개방적인 성향과 수 많은 사람들과 기업들이 인터넷의 엄청난 효용성을 알게 된 이상, 처음의 의도와 같이 그냥 군사적인 목적의 학술 네트워크로 유지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제일 먼저 1983년 ARPANET을 일반인들을 위한 ARPANET과 군사용의 MILNET으로 분리하여, 이 연구의 성과가 민간에서 활용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고, 1986년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NSFNET이 가세하면서 전체적인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메일과 팀-버너스 리가 발표한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이 폭발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뭔가 명확하게 변화된 위상이 인터넷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새로운 인터넷의 정의 

1995년 10월 24일, 미국 연방네트워킹위원회(Federal Networking Council, FNC)는 만장일치로 인터넷(internet)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통과시켰다.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터넷(Internet)"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글로벌 정보 시스템을 일컫는다.


  1. 인터넷 프로토콜(Internet Protocol, IP) 또는 IP의 확장이나 후속 프로토콜에 기반을 둔 글로벌하게 유일한 주소공간에 의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 TCP/IP 프로토콜 또는 이의 확장이나 후속 프로토콜, 그리고 다른 IP와 호환되는 프로토콜을 이용한 통신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3. 위에 언급한 인프라구조나 통신 계층 위의 공공 또는 사적으로 고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사용, 접근이 가능하다.

이로써 인터넷은 그 모습을 드러낸지 20년 만에 중대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팅 환경은 중대형 컴퓨터를 시간을 나누어 활용하였기에 그런 환경에 맞추어 학술적인 네트워크를 잘 이용한다는 취지에서 인터넷이 발전하였지만, 80년대 이후 개인용 컴퓨터가 급속히 보급되면서 클라이언트-서버나 P2P(peer-to-peer, 컴퓨터간 동등한 수준의 연결) 네트워크 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 기술로 ATM이나 프레임 스위치 서비스 등이 나타나면서 초창기의 인터넷과는 그 용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초창기 인터넷은 주로 파일을 공유하고, 원격지에서 컴퓨터에 로그인을 하며, 막강한 중대형 컴퓨터의 자원을 어떻게 적절하게 공유하고 협업을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90년 대 이후에는 이메일의 활용과, 혜성같이 등장한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WWW) 등을 이용하는 것이 인터넷의 주된 용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 이제는 소수의 연구자들이 이용하던 네트워크가 아니라, 매년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지는 상업적인 산업의 영역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전화와 TV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통신 네트워크 인프라와는 완전히 다른 컴퓨터 중심의 통신 네트워크 시대를 여는 가장 중요한 인프라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다음 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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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된 더글라스 엥겔바트 from Wikipedia.org



오늘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마우스의 발명자이자 HCI(Human-Computer Interaction)의 사실 상의 아버지, 모든 데모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더글라스 엥겔바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비록 세상에는 스티브 잡스의 죽음처럼 떠들썩하게 알려지지는 않겠지만, 그의 유산과 업적은 스티브 잡스를 능가하는 것이기에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연재에서 순서와는 좀 다르지만 오늘은 더글러스 엥겔바트를 소개할까 한다.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1925년 오레곤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포틀랜드의 시골지역에서 자란 그는 대학도 오레곤주립대학에 들어가는데, 곧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미국 해군에 입대해서 2년간 필리핀 전선에서 레이더 기술자로 복무를 하였다. 군대에 있는 동안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 글을 하나 읽게 되는데, 그것이 베니바르 부시의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As We May Think)" 이다. 그는 메멕스라는 개념을 퍼뜨린 것으로 유명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에서는 하이퍼텍스트와 컴퓨터 네트워크의 출현을 예견하였다. 베니바르 부시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따로 한 번 다룬 바 있으므로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연관글을 참고하면 된다. 결국 엥겔바트는 베니바르 부시가 예견한 세상을 실제로 구현하는데 일생을 바친다.



연관글:

2013/01/17 -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3) - 냉전시대의 개막과 서부의 부상



전쟁이 끝나고 오레곤주립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1948년 전자공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이후 냉전시대 서부의 부상을 이끈 나사의 에이미스 연구센터의 전신인 NACA(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연구실에서 1951년까지 일을 했다. 그는 사람들의 집단지성을 모아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인류의 생활을 발전시킬 것으로 보고 그와 관련한 기술개발에 매진한다. 특히 레이다 기술자로 일하면서 컴퓨터가 분석한 데이터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기에, 인간과 컴퓨터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의중을 잘 표현하고 소통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들을 네트워크로 엮을 것인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민했고, 이것이 결국 그가 평생을 바친 연구분야가 되었다. 이런 연구를 위해서 NACA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UC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더 공부해서 195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버클리에서 했던 연구는 캘리포니아 디지털 컴퓨터 프로젝트(California Digital Computer project, CALDIC)을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엥겔바트는 몇몇 특허를 내게 된다. 


1957년 부터는 스탠포드 리서치 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 SRI)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많은 특허를 내면서 컴퓨터의 역사를 바꾸기 시작한다. 1962년에는 자신의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인간지능증강(Augmenting Human Intellect)에 대한 개념적 프레임워크를 설계하고, 이 프로젝트에 대해 ARPA의 연구자금을 받아서 자신의 리서치 센터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ARC(Augmentation Research Center)이다. 이 연구센터에서 탄생한 것이 마우스, 하이퍼텍스트, 비트맵 스크린, 협업도구, 최초의 GUI 인터페이스 등이다. 그의 연구성과는 대형컴퓨터 시대에 만들어졌기에 당시에는 지나치게 미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1970년대 이후 PC의 시대가 열리고도 한참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매킨토시와 윈도우를 통해 꽃을 피우게 되었다. 마우스의 경우 1967년에 특허를 출원했는데, SRI가 해당 특허에 대한 가치를 거의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마우스 특허는 그 가치를 알아본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사들이게 되는데, 이를 위해 지불한 비용은 4만 달러에 불과했다. 


마우스와 함께 엥겔바트 최대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1968년에 있었다. 그는 이 연재에서도 자주 언급한 스튜어트 브랜드와 제록스 파크 연구소와 역사적인 이벤트를 계획하게 되는데, 컴퓨터와 대화를 주고받거나 컴퓨터를 이용해서 여러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으로 개인이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멀티미디어를 이용해서 원격으로 데모를 하였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엥겔바트가 연출한 이 데모는 미디어를 이용한 현대식 프리젠테이션의 시초가 되었다. 엥겔바트는 청중 앞에 거대한 스크린을 설치하고 컴퓨터로 정보를 투사시켜 발표하는 방식을 처음 선보였는데, 스튜어트 브랜드는 이 데모를 총지휘하였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대항문화의 중심인물이었던 작가인 켄 키지와 함께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LSD 페스티벌을 기획한 경험을 엥겔바트의 데모에 십분 발휘하였다. 이 역사적인 데모영상은 아래에 임베딩하였다.


연관글:

2013/03/28 -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10) - 해커정신과 아르파넷의 꿈





이후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의 탄생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말년의 연구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너무 먼 미래를 보았기 떄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는 협업과 네트워크, 시분할 컴퓨팅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나 PC의 물결이 불면서 그의 젊은 제자들은 그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의견충돌도 많았고, 결국 대세가 되어 버린 PC 중심의 연구와 상업화된 기업들에 의해서 점점 잊혀져 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미래의 모습은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클라우드의 시대가 오면서 실체화되고 있다. 50년 전에 그가 꾸었던 꿈이 예언과도 같이 현재에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진정한 미래학자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허황된 미래의 모습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들을 만드는데 인생을 바쳤고,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개념과 기술의 유산을 이용해서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오늘 세상을 등진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세상을 위해 인생을 바쳤던 위인, 더글러스 엥겔바트의 명복을 빌면서 ... 이 글을 바친다.



참고자료:


Douglas Engelbart,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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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화에서도 언급했지만, 빈트 서프와 밥 멧칼프는 인터넷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꼽힌다. 인터넷의 근간을 이루는 TCP/IP 프로토콜을 개발한 빈트 서프는 밥 칸과 함께 공식적으로 '인터넷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인터넷을 네트워크간의 네트워크라는 개념에서 바라본 것으로 이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즐기고 있는 다양한 인터넷의 세상이 열렸으므로 빈트 서프와 밥 칸을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해도 지나침은 없다.


인터넷의 아버지, 빈트 서프

빈트 서프는 2005년 10월 구글에 입사하여 현재는 부사장겸 인터넷 전도의 책임을 맡고 있다. 그는 인터넷 기반의 다양한 첨단기술이 접목된 제품과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구글에 합류하기 전에는 MCI(현재의 월드콤)의 기술전략담당 부사장으로 재직했다. 스탠포드에서 DARPA와 함께 TCP/IP를 고안한 빈트 서프는 1976년 DARPA에 합류해서 인터넷과 인터넷 기반의 패킷 데이터와 보안과 관련한 다양한 기술개발을 주도했는데, 1982년 DARPA를 떠나 MCI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는 MCI 메일이라는 인터넷에 연결된 세계 최초의 상업용 이메일 서비스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빈트 서프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1965년 수학을 전공하고, IBM에서 2년 동안 일을 한 뒤에 UCLA에서 컴퓨터 과학으로 1972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어쩌면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1962년 MIT의 J.C.R. 리크리더(Licklider)는 '은하네트워크(Galactic Network)'라는 메모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모든 컴퓨터를 엮는 글로벌 네트워크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다. 같은 해 리크리더는 DARPA의 초대 컴퓨터 연구단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1965년에는 MIT의 연구자였던 로렌스 로버츠(Lawrence Roberts)와 토마스 메릴(Thomas Merrill)이 전화선에서 데이터의 패킷으로 컴퓨터간에 주의 경계를 넘어서 통신하는 실험에 성공하는데, 로렌스 로버츠는 이후 DARPA에 합류하여 리크리더의 꿈을 실현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1967년 탄생한 프로젝트가 ARPANET 프로젝트이다. 로렌스 로버츠가 실험했던 방식은 1961년 당시 MIT의 대학원생이었던 레오나드 클라인락(Leonard Kleinrock)의 데이터 패킷을 이용한 스위칭 이론과 관련한 논문에 바탕을 두었는데, 레오나드 클라인락은 박사학위를 마치고 UCLA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밥 칸과 함께 DARPA의 원대한 꿈을 같이 이끌어나가기로 합의하고 UCLA의 실험실이 ARPANET의 첫 번째 노드가 되도록 하였다. ARPANET의 두 번째 노드로는 SRI가 선정되었고 1969년 이 두 노드 사이의 역사적인 첫 번째 데이터 통신이 시도된다. 이 때 실무를 담당한 것이 바로 빈트 서프였다. 그는 이 두 호스트 사이의 통신 프로토콜이었던 NCP를 구현하였다. 1972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빈트 서프는 스탠포드로 자리를 옮기는데, NCP의 개선이 ARPANET 프로젝트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밥 칸이 1973년 빈트 서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바꾼 프로토콜의 발명이 시작되었다.


그는 또한 국제활동도 활발하게 한 인물이다. 향후에 좀더 자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인터넷을 편리하고 쉽게 이용하게 하기 위해  문자로 된 주소체계가 만들어지자 이런 주소를 관리하는 조직이 필요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 ICANN(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이라는 민간단체가 설립되는데, 빈트 서프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8년 간 이 단체의 의장을 맡아서 인터넷의 대표적인 얼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터넷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결사체인 인터넷 소사이어티(Internet Society)를 1992년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그 밖에도 청력장애인과 관련한 많은 국제 단체의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로컬 네트워크의 아버지, 밥 멧칼프


밥 칸과 빈트 서프를 '인터넷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밥 멧칼프는 '로컬 네트워크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멧칼프는 1946년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MIT에서 전자공학과 경영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응용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컴퓨터 과학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하면서 MIT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그 일자리가 바로 ARPANET 프로젝트에서 MIT에 의뢰한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이었다.


1972년 ARPANET 컨퍼런스에서 그는 ARPANET을 이용한 19가지 시나리오를 담은 팸플릿과 데모를 하였다. 이 때 AT&T에서 온 10명의 전문가들 앞에서 기술과 시나리오를 실제로 시연하였는데, 팸플릿에 적은 것처럼 동작하지 못하고 시스템이 죽어버렸다. 당시로서는 기술이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데모 프로그램에도 문제가 있었던 탓이었겠지만, 멧칼프에 따르면 이 때의 데모 실패가 당시 통신을 독점하고 있었던 AT&T에게는 패킷을 이용한 데이터 통신 방식이 전화에서 이용되는 회선전환 방식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ARPANET 프로젝트는 멧칼프의 인생을 바꾸어놓게 되는데,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버드 대학에서 그의 논문이 '충분히 이론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학위논문으로 인정하지 않자, 이에 분노하여 반발하였다. 대학 측에서는 그를 진정시키기 보다는 되려 더욱 권위적으로 그를 압박하였고, 하버드 대학과 멧칼프는 크게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이 때 그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본 제록스 PARC 연구소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했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PARC 연구소에 입사하였다.


그의 새로운 박사학위 논문의 아이디어는 하와이 대학에서 연구되던 ALOHA 네트워크에 대한 논문에서 나오게 되는데, 이 네트워크는 데이터 전송을 위해 전화선을 이용하지 않고 전파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전파는 동시에 데이터 패킷이 두 군데에서 같은 채널을 통해 전송될 경우 서로가 간섭을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와이 대학에서는 컴퓨터가 전송할 데이터가 있을 때 언제든 데이터를 전송하도록 허용하고, 목적지 컴퓨터에서 패킷이 도착했다고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을 이용하였디. 패킷이 충돌하거나 도착알림이 없으면 기다리는 시간을 매우 짧게 랜덤으로 기다리게 한 뒤에 이를 넘을 경우 재전송을 하게 했는데, 이를 통해 같은 데이터가 계속 충돌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를 랜덤접근(random access) 방법이라고 한다. 멧칼프는 이 방식의 문제점을 파악했는데, 잘못하면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점을 개선하여 데이터 트래픽에 따라 기다리는 시간을 역시 랜덤이기는 하지만 조절하여 데이터 전송효율을 매우 높였다. 그제서야 그의 학문적 성취를 인정한 하버드 대학에서 멧칼프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제록스 PARC에서 그는 개인용 PC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통신방식을 고안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전 세계에 LAN 열풍을 일으킨 이더넷(Ethernet) 기술이다. 이더넷은 제록스 PARC의 기념비적인 컴퓨터인 알토(Alto)에 구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게 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앞선 연재를 통해 수 차례 언급한 바 있으므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그는 이더넷을 단순히 개인이나 특정 연구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연결하는 기술로 널리 보급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오늘날까지 전 세계 네트워크 기술을 대표하는 회사인 3Com(Computers, Communications, Compatibility - 컴퓨터, 통신, 호환성을 의미)을 1979년 공동창업하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는 그의 기술을 한 회사에 종속시키지 않고, 산업계 표준으로 공개하면서 여러 회사들이 제품을 저렴하게 내놓고 네트워크의 잇점을 수 많은 사람들에게 누릴 수 있게 한 점이다. 그의 의도대로 1980년대 들어 LAN(Local Area Network)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대학이나 기업 등에 도입되면서 인터넷의 중요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술의 판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멧칼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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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멧칼프는 이더넷을 만들고, 3Com 이라는 회사를 창업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어의 법칙(Moore's law), 코즈의 정리(Coase theorem)와 함께 인터넷 경제의 3원칙으로 불리는 멧칼프의 법칙(Metcalfe's law)으로 더욱 많이 알려졌다. 그가 처음 이야기한 것은 통신에서의 네트워크 효용성에 대한 것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전화나 팩스에 비해, 이더넷을 이용한 네트워크의 효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현재는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더 나아가서는 경제와 비즈니스 경영 등의 영역에도 널리 활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다.


내용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그는 '하나의 네트워크의 효용성은 그 네트워크 사용자 숫자의 제곱' 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하나의 전화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나 두 개가 연결되면 유용하며, 백만 개가 연결되었다면 그 효용성이나 가치는 백만의 제곱이라는 것이다. 이 법칙은 네트워크의 노드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가능한 연결의 갯수를 수학적으로 계산한 것에서 도출되었는데, 정확하게는 수학에서의 조합으로 보아야 하므로  노드의 수를 n으로 보았을 때 2개의 노드의 연결의 수는 'n(n-1)/2'로 표현할 수 있다.


멧칼프의 법칙은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사용자 수의 제곱에 의해 네트워크 효과가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은 네트워크가 누군가의 소유로 있을 때보다 널리 이용되어 사용자가 늘어날 때 효용성이 급격히 증가하는 사회적인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고, 멧칼프는 이런 교훈을 자신의 비즈니스에도 충실하게 접목해서 기술을 개방하고 네트워크를 설치한 PC의 수가 늘어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3Com을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시켰다. 인터넷이 저렴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될 때 그 가치가 급격히 늘어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저렴한 초고속인터넷 통신망의 보급에서도 증명된 바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면 그 가치가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다음 회에 계속 ...)



참고자료:


Vinton Cerf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Vinton Cerf ICANN 소개

MIT Inventor of the Week Archive: Vinton Cerf

Robert Metcalfe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Internet Pioneers: Bob Metcalfe

Metcalfe's law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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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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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독립적인 다양한 형태의 네트워크들을 엮어내겠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인터넷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ARPANET은 이를 위해서 기존의 전화망 이외에 위성을 이용한 통신망이나, 지상의 무선 네트워크 등도 포괄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대세를 이루던 전화망 스타일의 서킷(circuit)기반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데이터의 패킷을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 이론과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또한, 여러 네트워크 기술들과 구조를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오픈 아키텍처(open architecture)를 통해서 미래로의 확장성도 확보하고, 어느 한쪽이 송신을 하고 다른 편이 수신을 하는 역할을 분담하는 시나리오보다는 각 네트워크의 말단이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각자의 소통이 가능한 P2P(Peer-to-Peer, 각각의 말단이 대등하게 주고받는 형태) 시나리오를 지원해야 했다.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에서는 각각의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자신들만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서비스를 사용자들에게 제공하고, 이들 간의 네트워크를 다시 구성할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ISP, Internet Service Provider) 개념이 나오게 된다. 



인터넷 통신의 핵심, TCP/IP 프로토콜의 탄생


이처럼 혁명적인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 개념은 DARPA의 밥 칸(Bob Kahn)에 의해 1972년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이런 개념이 실질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뢰성 있는 네트워크 단말 사이의 통신 프로토콜(Protocol)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 이유는 데이터 중심의 통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태의 전파나 전기간섭, 방해 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환경을 가정할 경우에도 터널을 지나거나, 통신 인프라가 열악한 산간지역 등에서 통신이 끊어지는 것 등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밥 칸이 처음 고안한 것은 다양한 통신 네트워크를 지원하기 보다는 주로 지상에서의 무선통신 환경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토콜이었는데, 이것이 NCP(Network Control Protocol)이다. 초기의 ARPANET 프로젝트에는 NCP가 활용되었는데, 1969년 IMP(Interface Message Processor)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4개의 노드인 UCLA,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 유타주립대학을 연결했던 역사적 사건에도 NCP가 호스트간 통신을 담당했다. 그런데, NCP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NCP는 컴퓨터와 같은 기계 단말의 고정된 목적지를 제외한 주소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일단 구성된 ARPANET에 등록된 기계 이외에는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가 없기에 자율적인 확장을 생각했던 인터넷의 개념과는 맞지 않았다. 또한 에러 처리가 불완전해서 중간에 패킷이 소실되면 멈추는 일도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밥 칸은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 환경에 잘 맞는 새로운 버전의 프로토콜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초기의 NCP는 IMP라는 기계를 위한 일종의 하드웨어 드라이버와 유사한 형태였는데,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를 위해서는 통신 프로토콜의 형태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각각의 네트워크는 독립적으로 유지되면서도, 네트워크 간의 네트워크인 인터넷에 접속될 때 특별한 변화나 조작이 없어야 했다. 데이터 덩어리인 패킷이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는 일이 있으면, 멈추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면 원래 발신한 곳에서 재전송이 일어나야 했으며, 네트워크들 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보편적인 블랙박스 같은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네트워크 사이를 연결하는 장치는 이후에 게이트웨이(gateway)와 라우터(router)라고 부르게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는 주소와 관련된 것이다. 사라지는 패킷을 처리하고, 재전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데이터 패킷에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야 했다. 게이트웨이가 패킷을 벗겨서 네트워크가 흘러가는 길의 정보(루트, route)와 인터페이스 처리, 필요하다면 데이터 패킷을 잘게 자르는 등의 정보를 해석할 수 있어야 했는데, 이런 정보를 IP(Internet Protocol) 헤더에 담도록 하였다. 또한, 에러 등의 이유로 순서를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데이터 패킷을 나중에 재조합을 하고, 잘 전송되었는지 모르고 다시 전송한 데이터와 같은 중복처리도 해야하므로 체크섬을 계산하도록 했다. 또한, 호스트 사이의 흐름도 제어하고, 전체적인 시스템의 완결성을 위해서는 주소체계도 필요하였다. 이렇게 해야할 일이 많아지자, 밥 칸은 1973년 빈트 서프(Vint Cerf)에게 상세한 디자인과 관련한 도움을 요청한다. 


빈트 서프는 오리지널 NCP 디자인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운영되던 다양한 컴퓨터 운영체제에 어떻게 이런 내용을 인터페이스로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최고의 조력자가 될 수 있었다. 밥 칸의 뛰어난 아키텍처 개념에 빈트 서프의 NCP 및 운영체제에 대한 지식이 합쳐지자 결국 성과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인터넷 기기들의 소통언어라고 할 수 있는 TCP/IP(Transmission Control Protocl / Internet Protocol) 프로토콜이다. TCP/IP는 1973년 9월 서섹스(Sussex) 대학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조직된 INWG(International Network Working Group)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으며, 빈트 서프는 이 그룹의 의장으로 초대되어 TCP/IP로 전 세계를 엮어나가는 역사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더넷의 등장


TCP/IP 프로토콜과는 별도로 제록스 파크 연구소에서는 이더넷(Eternet)이라는 새로운 네트워크 기술이 연구되고 있었다. 이더넷은 원래 제록스 파크에서 1973년 로버트 멧칼프(Robert Metcalfe)가 박사 학위를 위해 연구하던 ALOHAnet의 아이디어에서 메모를 하나 적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를 좀더 체계화를 해서 1975년 제록스 파크 연구소에서는 특허를 출원하고, 1976년에 로버트 멧칼프와 데이비드 복스(David Boggs)가 <이더넷: 분산 패킷교환 로컬 컴퓨터 네트워크(Ethernet: Distributed Packet-Switching For Local Computer Networks)>라는 책을 통해 정체를 공개했다. 멧칼프는 개인용 컴퓨터와 당시 급부상하던 가정과 사무실 등에서의 LAN (Local Area Network)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 1979년에 제록스를 떠나 3Com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DEC, 인텔과 제록스 등을 설득하여 1980년 이더넷 표준을 채택하도록 하였고, 실제로 이더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LAN의 시대가 열리고, 사무실에서 PC를 활발하게 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3Com은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하였다. 무선의 시대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더넷 시장은 여전히 커지고 있어서 2010년에는 160억 달러를 넘었다.


어쨌든 이더넷이 개발되고 있을 당시의 제록스 파크에서는 이렇게 LAN이 금방 활성화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인터넷과 관련한 프로토콜을 디자인한 빈트 서프나 밥 칸도 별로 다르지 않아서, 가능한 주소의 수가 32비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현재와 같은 4바이트의 32비트 IP 주소체계가 세워지게 되는데, 이제는 주소가 완전히 포화가 되어 IPv6라고 불리는 128비트 주소체계로 전환되고 있으니 기술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음 회에 계속 ...)



참고자료: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Ethernet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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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닉스와 UC 버클리, 그리고 MIT에서 일을 했던 리처드 스톨만, 그리고 리눅스로 이어지는 역사에 공통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해커(Hacker)이다. 페이스북이 기업공개를 하면서, CEO인 마크 주커버그가 주주들에게 남겼던 편지에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 되었던 것이 또 "해커정신(Hacker Way)"이다. 

마크 주커버그가 언급한 해커정신은 백마디 말과 계획을 세우기보다 바로 실행해보고 혁신을 하는 문화이다. 실패를 하더라도 빨리 실패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어서 더 나은 서비스와 경험을 고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 그가 남긴 편지의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페이스북은 원래 기업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세상을 더 열린 공간과 서로 연결된 곳으로 만드는 사회적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사람은 관계를 통해 새로운 생각을 나누고, 세상을 이해하며, 궁극적이고 장기적인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커문화와 해커정신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가? 그리고, 인터넷의 시작은 이러한 해커문화와 무슨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해커문화의 탄생과 해커정신

해커라는 용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스튜어트 브랜드가 롤링스톤에 기고한 "스페이스워(Spacewar)" 기고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매사에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사람이 ‘플래너(Planner)’라면 이와 반대로 즐거움에 이끌려 임의적으로 새로운 혁신을 하거나 발명하는 사람을 ‘해커(Hacker)’라 불렀다.


제록스 파크 연구소의 해커들은 PDP-7 컴퓨터를 이용해서 우주전쟁을 테마로 한 텍스트 게임인 스페이스워 게임을 개발하고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네트워크가 필요했고, 이때 이용했던 네트워크가 오늘날 인터넷의 효시인 아르파넷(ARPANET)이 되었다. 이와 같이 컴퓨터는 대항문화와 연관이 되었고, 컴퓨터 게임과 해커들의 문화,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데 필요한 초기 인터넷까지 제록스 파크 연구소에서 실연이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의 웹 문화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스튜어트 브랜드의 스페이스워 기고문에 등장하는 파크 연구원 중에는 최초로 태블릿 컴퓨터를 구상했던 앨런 케이(Alan Kay)도 등장한다. 앨런 케이는 스튜어트 브랜드와 엥겔바트의 데모에서 컴퓨터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전까지 컴퓨터를 계산과 시뮬레이션 등의 용도로 생각했다가 이 때부터 개인용 컴퓨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앨런 케이가 구상한 개인용 컴퓨터는 제록스 알토(Xerox Alto)로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티브 잡스도 제록스 알토에서 영감을 얻어 매킨토시를 개발하였다. 앨런 케이는 개인용 컴퓨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컴퓨터를 미디어로 소비기기로 취급한 최초의 태블릿 PC인 다이나북(Dynabook)도 구상했다. 다이나북은 태블릿의 형태이면서, 터치패널 입력도 구현하였는데, 이것이 1968년의 일이니 무려 40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패드라는 태블릿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냉전의 산물에서 인터넷의 효시가 된 아르파넷

제록스 파크에서 스페이스워를 즐겼던 해커들이 이용한 아르파넷은 오늘날 인터넷의 전신이 된 컴퓨터 네트워크이다. 아르파라는 이름은 미국의 고등연구계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약자에서 따온 것으로 1969년에 개발되었다. DARPA는 미국이 1957년 소련(구 러시아)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자, 그 다음 해인 1958년 첨단기술 연구를 위해 설립한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약했던 군과 대학을 포함한 민간연구기관의 협력체제를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미국 전역의 유수의 연구기관들의 연구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교환하는 인프라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동시에 냉전 당시에 가장 위협적인 시나리오였던 핵 공격이 있을 경우에 통신기능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네트워크 기술이 필요하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화망과 같이 각각의 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형태보다는 효율성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우회를 통해서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구조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가용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잘게 잘라서 복수의 경로를 통해서 보내더라도 수신 측에서 이를 재구성이 가능하도록 패킷(packet)을 활용하도록 설계하였다. 또한, 네트워크 일부가 파손되어도 쉽게 복구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 간의 통신 규칙인 프로토콜을 정해서, 프로토콜만 준수하면 손쉽게 새로운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르파넷은 미국 고등연구계획국이 연구비를 투자한 여러 연구기관을 연결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최초의 노드간의 상호연결은 1969년 10월 29일 UCLA와 SRI(Stanford Research Institute) 연구소간에 연결되었다. 그래서, 10월 29일을 인터넷의 탄생일로 간주하기도 한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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