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와이드웹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 팀 버너스-리를 포함한 과학자 그룹이고, 이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해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만든 첫 번째 주인공을 넷스케이프와 마크 앤드리센과 짐 클라크라고 한다면, 그 뒤를 이어 커다란 대박을 터뜨린 기업이 바로 야후!(Yahoo!) 일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전자공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빗 파일로(David Filo)는 1994년 초 모자이크를 이용해서 전세계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얻은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생각에 수 많은 웹 사이트들을 종류에 따라 분류해서 목록을 만들게 되는데, 이 목록을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웹에 공개를 하였다. 이것이 훗날 야후!가 되는 "Je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 이다. 같은 해 4월 이들은 이 웹사이트를 "Yahoo!"로 개명하면서 처음으로 인터넷 포탈 사업을 시작하게 되며, 1995년 1월 18일 역사적인 "yahoo.com" 도메인을 획득하였다. 1995년 3월 1일 정식으로 회사를 창업한 이들은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정보를 찾는 사람들의 처음 기착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글자 그대로 인터넷으로 들어가기 위한 포탈(portal, 문)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인터넷 접속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때 구원의 손을 처음 내민 사람이 바로 넷스케이프의 마크 앤드리센이다. 1994년 투자를 받아 자금의 여유도 있었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인터넷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넷스케이프 입장에서는 야후!와 같이 인터넷 자체를 번성시켜줄 서비스 사업자가 필요하였고, 야후! 역시 늘어나는 인터넷 접속량을 넷스케이프 본사의 대형서버가 직접 담당해 주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동거관계는 금방 깨지게 된다. 그 이유는 야후!가 1995년 4월 5일 최고의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였던 세코야 캐피탈(Sequoia Capital)에게서 거액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인데, 이때 투자를 담당했던 사람이 KPCB의 존 도어와 함께 최고의 벤처 캐피탈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이다. 그에 비해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결정한 사람은 KPCB의 존 도어였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KPCB와 세코야 캐피탈은 실리콘 밸리 벤처캐피탈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라이벌이다. 이들의 라이벌 의식은 정말로 대단해서, 절대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불문율을 깨는 회사가 나오는데,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후 연재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세코야의 투자를 받은 야후!는 이런 주요 투자자들의 알력 때문에 할 수 없이 넷스케이프와의 협력관계를 정리하고, 독자적인 서비스에 나섰다. 


뒤를 이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야후!에 125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1.7%의 주식을 취득하였는데, 이 투자는 야후! 저팬이 설립되고, 한국에도 야후! 코리아가 생기면서 전 세계로 포탈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아직도 야후! 저팬은 일본의 포탈 1위의 지위를 지키고 있으며, 야후! 코리아도 초창기 한국의 인터넷 포탈을 대표하는 서비스로 자리매김했지만, 한국에서는 다음과 네이버의 부상으로 과거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한국시장에서 철수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외부에서의 호의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야후!는 창업한지 1년 만인 1996년 4월 12일, 아무런 수익모델도 없이 나스닥 상장을 시도한다. 짐 클라크가 넷스케이프를 통해 1995년에 기업공개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인터넷 기업에 대한 기대치가 상한가를 치고 있었기에 다소 무모해 보였던 이 시도는 성공을 하게 된다. 단숨에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야후의 창업자들은 "웹 포탈(web portal) = 야후!" 라는 이미지를 심으면서, 부침이 심했던 다른 포탈 또는 검색 서비스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된다. 그러나, 닷컴 열풍의 원조였던 넷스케이프가 인터넷 익스플로러와의 대결에서 참패를 하면서 급격하게 회사의 가치가 하락하고, 닷컴 회사들의 수익모델이 없다는 비판과 함께 비관적인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회사의 주가가 하락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야후!는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브랜딩 전략이 먹혀들면서 배너를 중심으로한 광고모델로 인터넷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다. 1999년 6천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면서, 닷컴 회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닷컴 회사의 마지막 자존심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지만, 2000년 들어 닷컴 회사 대부분의 가치에 대한 회의론이 빠르게 확산되며 급작스럽게 닷컴 버블이 터지는 위기를 겪으면서 야후!의 광고주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들의 퇴장으로 야후! 역시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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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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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를 처음으로 열어젖힌 것이 넷스케이프와 마크 앤드리센과 짐 클라크라면, 그 뒤를 이어 커다란 대박을 터뜨린 첫번 째 기업은 바로 야후! 일 것입니다.  오늘은 야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후!의 탄생

스탠포드 대학의 전자공학과 대학원을 다니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빗 파일로(David Filo)는 1994년 초 모자이크를 이용해서 전세계 웹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얻은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생각에 수많은 웹 사이트들을 종류에 따라 분류해서 목록을 만들게 되는데, 이 목록을 하이퍼링크의 형태로 웹에 공개를 합니다.  이것이 훗날 야후!가 되는 "Je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 입니다.  같은 해 4월 이들은 이 웹사이트를 "Yahoo!"로 개명하면서 처음으로 인터넷 포탈 사업을 시작하게 되며, 1995년 1월 18일 역사적인 "yahoo.com" 도메인을 획득합니다.  1995년 3월 1일 정식으로 회사를 창업한 이들은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정보를 찾는 사람들의 처음 기착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글자 그대로 인터넷으로 들어가기 위한 포탈(portal, 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인터넷 접속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때 구원의 손을 처음 내민 사람이 바로 넷스케이프의 마크 앤드리센입니다.  1994년 투자를 받아 자금의 여유도 있었고,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인터넷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넷스케이프 입장에서는 야후!와 같이 인터넷 자체를 번성시켜줄 서비스 사업자가 필요하였고, 야후! 역시 늘어나는 인터넷 접속량을 넷스케이프 본사의 대형서버가 직접 담당해 주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거관계도 금방 깨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야후! 가 1995년 4월 5일 최고의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였던 세코야 캐피탈(Sequoia Capital)에게서 거액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투자를 담당했던 사람이 유명한 벤처 캐피탈리스트인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입니다.  그에 비해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한 회사는 클라이너 퍼킨스(Kleiner Perkins)로 세코야 캐피탈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벤처 캐피탈로, 이들의 라이벌 의식은 정말로 대단해서, 절대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불문율을 깨는 회사가 나옵니다).  세코야의 투자를 받은 야후! 는 넷스케이프와의 협력관 계를 정리하고, 독자적인 서비스에 나섭니다.  뒤를 이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가 125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 1.7%의 주식을 취득하는 등 급속도로 회사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닷컴 버블의 시작

야후! 는 창업한지 1년 만인 1996년 4월 12일, 아무런 수익모델도 없이 나스닥 상장을 시도합니다.  물론 그전에 짐 클라크가 넷스케이프를 통해 1995년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인터넷 기업에 대한 기대치가 상한가를 치고 있었기에 이 시도는 성공을 하게 됩니다.  단숨에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야후의 창업자들은  "웹 포탈(web portal) = 야후!" 라는 이미지를 심으면서, 부침이 심했던 다른 포탈 또는 검색 서비스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닷컴 열풍의 원조였던 넷스케이프가 인터넷 익스플로러와의 대결에서 참패를 하면서 급격하게 회사의 가치가 하락하고, 닷컴 회사들의 수익모델이 없다는 비판과 함께 비관적인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회사의 주가가 하락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후!는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브랜딩 전략이 먹혀들면서 배너를 중심으로한 광고모델로 인터넷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합니다.  1999년 6천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면서, 닷컴 회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닷컴 회사의 마지막 자존심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닷컴 회사 대부분의 가치에 대한 회의론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급작스럽게 닷컴 버블이 빠지기 시작하고, 야후! 의 광고주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이들의 퇴장으로 야후! 역시 심각한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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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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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 구글 ... 현재의 인터넷 기업을 대표하는 이 두 기업의 운명이 최근 극명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구글은 매년 폭발적인 성장을 하면서 광고시장을 완전히 장악해 나가고 있지만, 한 때 인터넷 기업의 대표주자로서 이름을 날리던 야후는 이제 제리 양 회장이 공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에 피인수되기를 희망하는 발언을 할 정도로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합니다.

야후와 구글은 모두 스탠포드 대학의 공학도들이 창업한 회사입니다. 

야후는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비드 필로(David Filo)가 1995년 3월 1일에 설립한 회사입니다.  이후 미국에서의 인터넷 닷컴 열풍의 바람을 타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이 되었습니다.  구글은 1998년 창업을 한 뒤 역시 인터넷 닷컴 기업에 대한 투자바람을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회사를 키워 나갔으며, 검색 부분에 있어서는 최고의 기업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야후와 구글은 닷컴 버블이 꺼진 다음에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인터넷 기업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닷컴 버블 직후 회사의 진로를 결정하는 방식이 달랐고, 결국에는 이 때의 큰 결정이 오늘날의 두 기업의 명암을 가르게 되는 한 요인이 되고 맙니다. 

야후는 닷컴 버블 이후,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오프라인 비즈니스와의 연계를 최우선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위해 회사를 인터넷 기업에서 '미디어 기업'으로 변신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인터넷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시장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런 결정은 일견 타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위해, 워너브라더스(Warner Brothers)의 엔터테인먼트 부문의 회장을 지낸 테리 시멜(Terry Semel)을 CEO로 영입하고 두 명의 공동 창업자들은 이 때부터 경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게 됩니다.

야후는 이후 기술보다는 미디어 기업으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뉴스를 편집할 때에도 우수한 저널리스트 출신의 직원들이 참여하여 멋진 첫 페이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며, 이러한 우수한 직원들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부가가치 창출을 하는 것입니다. 

테리 시멜은 야후의 CEO 자리에 오르면서, 워너 브라더스에서 보여주었던 뛰어난 협상실력을 발휘하여 대형 인수합병 및 협력계약을 계속 성사시킵니다.   2002년 미국 통신회사인 SBC 커뮤니케이션즈와 광대역 사업 제휴 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통해 초고속 인터넷 시장에 이름을 내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에는 버라이존(Verizon)과 DSL 사업을 같이 시작하게 되며, 이러한 초고속 인터넷 사업 진출을 통해 매년 수 천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검색 부분에 있어서도 일대 변화를 주었는데, 초창기 검색 서비스를 직접 개발했던 야후 이지만, 2000년 부터는 자사의 검색엔진을 구글로 대체했었습니다.  그러나,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가 검색 부분을 더욱 강화하며 야후의 최대 경쟁자로 떠오르는 상황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검색서비스 전문업체인 오버추어를 2003년 총액 16억 3천만 달러 규모로 인수합니다. 

이후에도 테리 시멜은 2007년 6월 경영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될 때까지 야후를 "인터넷 상의 디지털 디즈니랜드"로 변신시키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추진합니다.   

그에 비해 구글은 닷컴 버블 붕괴 이후에도 자사의 핵심역량인 기술개발을 고집스러게 밀고 나가는 '기술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지킵니다.  이러한 구글의 기술개발에 의한 서비스는 당시만 해도 무모한 것으로 비추어졌고, 구글의 성공신화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2003년 구글은 인터넷 상에 있는 전 세계의 뉴스 사이트를 모두 찾아다니며 뉴스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자동으로 판정하고 순위를 매겨 편집을 하는 구글 뉴스를 선 보입니다.  이 서비스는 당시 전 세계의 미디어 산업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집니다.  구글 뉴스는 구글이 하나의 엔지니어링 솔루션으로 선을 보였고, 뉴스의 편집권을 비롯한 인간의 재량에 의한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서비스입니다.

구글 역시 미디어와 컨텐츠, 그리고 오프라인 비즈니스와의 연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야후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동방향이 달랐습니다.  구글은 광고 영업을 강화하고, 미디어와 관련한 각종 서비스를 주도하는 기업을 인수합병하며, 핵심적인 기술개발에 매달렸지만, 미디어 산업의 경영진으로 회사의 색깔을 바꾸는 것과 같은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인간이 개입하지 않고 정보발전소에서 가공하는 수 많은 정보들에 의해 원하는 수준의 미디어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상황을 최대한 앞당기는 것을 최선으로 본 것입니다.

인터넷 산업에 있어서 앞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부분은 영상과 음악 등을 포함한 멀티미디어 컨텐츠 부분입니다.  야후는 이를 위해 수 많은 컨텐츠 제공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거대한 공급자가 되는 것을 전략으로 가져갔으며, 구글은 새로운 기술 솔루션을 통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2006년 구글은 구글 비디오 스토어 서비스를 공개합니다.  이 서비스는 TV 프로그램이나 과거의 영상 필름, UCC 등을 인터넷으로 배급하는 서비스입니다.  향후 고도의 비디오 검색 기능이나 영상내용의 자동해석 및 이를 이용한 광고삽입 등과 같은 미래형 기술개발이 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07년 6월 야후는 테리 시멜을 해고하고, 다시 창업주인 제리 양이 경영의 전면에 나섭니다.  미디어 기업으로서의 변신을 시도했던 야후가 전략적인 접근의 오류를 인정한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리 양은 취임 후 멀리 도망가버린 구글을 잡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미 떠나버린 버스 뒤에서 손을 흔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2001년 당시의 야후의 선택이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글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야후의 몰락은 일견 당연한 것 같지만,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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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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