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 마피아 멤버들. 비노드 코슬라, 빌 조이, 앤디 벡톨샤임, 스캇 맥닐리 from liveandventure.com



앞선 편에서 언급한 자바를 만들어낸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2009년 오라클에 인수되며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회사가 되었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초창기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은 실리콘 밸리의 역사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향후 구글의 CEO가 되는 에릭 슈미트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CTO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천재 프로그래머 빌 조이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막강한 멤버들의 영향력을 감안해서 실리콘 밸리의 한국계 벤처투자가이기도 한 Phil Yoon 님은 자신의 블로그 Live & Venture를 통해 이들을 "썬 마피아"로 표현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한 글이 있다. 이번 편에서는 Live & Venture 블로그에서 소개된 썬 마피아 멤버들 중 일부를 소개한다. 원문은 아래 참고자료에 링크된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연관글:


앤디 벡톨샤임 (Andy Bechtolsheim), 비노드 코슬라 (Vinod Khosla) 그리고 존 도어 (John Doerr)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 창업자는 모두 4명이지만, 앤디 벡톨샤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독일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공부하다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SUN이라는 워크스테이션 컴퓨터를 디자인하였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창업을 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1982년 시작된 회사가 바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이다. 그는 1995년까지 썬에서 일을 하였는데, 하드웨어 디자인을 총괄하였다. 썬을 떠난 이후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장비회사인 시스코(Cisco)의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엔젤투자자로도 활동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가 바로 절친이었던 스탠포드 대학의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 교수의  제자였던 두 명의 박사과정 학생의 회사에 대한 투자이다. 앤디 벡톨샤임은 한 눈에 이 학생들의 서비스의 가치를 알아보고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즉석에서 끊어주었는데, 이 투자가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자신에게도 수십 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부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구글이다. 앤드 벡톨샤임의 구글에 대한 이 투자는 벤터 투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투자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비노드 코슬라는 인도의 IIT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서 의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스탠포드 대학에서 MBA 공부를 마친 재원이었다. 그는 데이지시스템이라는 반도체 디자인 소프트웨어 회사를 다니던 중 앤디 벡톨샤임을 만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창업에 동참하였다. 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초창기인 1982년부터 CEO로 일을 하였는데, ICT 회사의 경영보다는 역시 벤처투자가 적성에 맞았는지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투자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86년 그는 실리콘 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인 KPCB에 합류하였고, 여기에서 성공적인 투자경력을 쌓았으며, 명쾌한 강의와 활발한 외부활동을 통해 자신의 개인 브랜드도 쌓아서 2004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코슬라 벤처스(Khosla Ventures)라는 벤처캐피탈을 설립하였다. 코슬라 벤처스는 주로 ICT와 환경과 관련한 기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곳으로 실리콘 밸리의 주요 벤처캐피탈로 그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여전히 활발한 외부활동을 하면서 많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고 있는 인물이다. 

존 도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직접 일을 한 인물은 아니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직접 투자를 하면서 커다란 성공을 한 인물이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가 아니더라도 그는 벤처투자 업계에서 전설적인 투자자로 명성을 쌓았다. 그가 투자해서 성공한 회사는 일일히 열거하기가 힘든 정도인데, 그 중에서 크게 성공한 회사의 일부만 나열하면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넷스케이프, 아마존, 구글 등을 꼽을 수 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투자가 그 중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있었기 때문인지, 이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멤버들인 비노드 코슬라와 빌 조이를 자신이 있는 KPCB로 영입하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노드 코슬라는 벤처투자자로서도 크게 성공하였다.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와 캐롤 바츠 (Carol Bartz)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의 경력 이후 앤디 벡톨샤임과 비노드 코슬라 등이 투자자로서 유명해졌다면, 에릭 슈미트와 캐롤 바츠는 경영자로서의 실리콘 밸리의 성공신화를 이어갔다. 에릭 슈미트는 앞선 연재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커리어를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처음 성공적으로 그려 나갔다. 에릭 슈미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창업자 중의 한 명이자 최고의 개발자였던 빌 조이와 대학원에서 친구라는 인연으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이후 자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CTO 자리까지 올랐고, 노벨의 CEO를 거쳐 구글의 CEO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에릭 슈미트가 구글의 CEO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에는 KPCB의 존 도어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에릭 슈미트와 구글의 성공에도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간접적인 영향력이 매우 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에릭 슈미트와 함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출신으로 성공적인 경영자 경력을 쌓은 인물이자, 실리콘 밸리의 여성 CEO 파워를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캐롤 바츠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초창기부터 일을 시작해서 세계총괄 영업/기술지원을 총괄하는 부사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캐롤 바츠의 커리어가 가장 빛난 것은 1992년 CEO로 자리를 옮긴 오토데스크(Autodesk)에서였다. 그녀는 오토데스크의 CEO로서 일한 14년간 회사의 매출을 3억 달러에서 15억 달러로 5배나 끌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그녀와 관련한 일화도 실리콘 밸리에서 여러 개 전해지는데, 여성으로서 매우 거친 입담의 소유자로 다양한 이야기들도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 오토데스크 CEO로 부임하기 며칠 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힘든 함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오토데스크에서 풀타임 하면서 암을 이겨낸 이야기는 전설적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많은 기대를 안고 선임된 야후!에서의 CEO 경력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그녀의 CEO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는 그 밖에도 공동창업자이면서 동시에 CEO로 22년을 재직하면서 대표적인 얼굴로 자리매김한 스캇 맥닐리,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BSD 유닉스의 개발자로 이 연재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빌 조이 등 오늘날 실리콘 밸리를 뒤흔드는 페이팔 마피아와 비교하더라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들을 배출한 회사이다. 비록 이제는 오라클에 인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이름은 썬 마피아들의 이름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듯하다.


참고자료:



P.S. 이 시리즈는 이제 책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총 60편으로 진행될 연재가 모두 끝나고, 일부 내용의 윤문과 색인작업까지 마친 책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는 국내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대부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책을 보시면 더욱 좋겠구요. 여력이 안되는 학생들이나 여유롭게 블로그를 읽는 것이 더 좋으신 분들은 1주일에 1차례 정도 앞으로도 계속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니, 블로그를 구독하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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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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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IT의 역사, 지난 포스팅에서 안드로이드의 공식적인 발표와 함께 구글과 애플의 밀월관계가 깨지기 시작하였다는 언급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구글과 애플이 밀월관계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부터 깨지기까지의 과정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2006년 스티브 잡스의 집에서 로맨스가 시작되다.

구글과 애플의 로맨스는 스티브 잡스가 에릭 슈미트를 2006년 자신의 집에 초대하면서 시작됩니다.  두 명의 거물 CEO 는 스티브 잡스의 집 거실 테이블에서 바닐라 컵케이크와 차를 같이 하면서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2007년 출시할 예정인 아이폰의 성공을 위해 구글의 강력한 서비스들이 필요하였고, 구글은 차후 일전을 치르게 될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클라우드 서비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협력에 합의한 두 회사는 아이폰의 성공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합니다.

2007년 아이폰이 출시될 때에 맞추어 아이폰 전용으로 만든 구글지도(Google Maps), 검색, 메일 등의 앱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협력이 시작됩니다.  구글은 여러 인력을 투입하여 구글 최고의 서비스들을 아이폰에 이식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고, 애플은 아이폰의 가장 중요한 앱으로 구글의 서비스들을 낙점하는 배려를 하면서 협력은 순항을 합니다.  유튜브도 아이폰에 올라가도록 애플이 신경을 써주자, 구글은 유튜브에 애플의 퀵타임이 쉽게 올라올 수 있도록 모든 비디오를 플래시가 아닌 H.264 표준으로 동작할 수 있도록 하였고 심지어 모든 웹 앱들이 애플 아이폰에 최적화가 되도록 추가적인 작업까지 수행하였습니다.

아이폰은 애플의 뛰어난 운영체제와 하드웨어, 그리고 앱 스토어도 빛났지만, 구글이 제공한 최고의 킬러 웹 서비스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최고의 성공을 만들어 내었고, 서로가 가지지 못한 영역을 메꾸어주는 파트너로서 외부에서 보기에도 최고의 찰떡궁합으로 보였습니다.


아이폰의 대성공, 구글의 고민

아이폰의 대성공은 PC 중심의 컴퓨팅 환경이 드디어 모바일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소비자 중심의 컴퓨팅이라는 구글이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환경으로의 변화를 앞당기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구글의 고민은 이런 대성공과 함께 커져갑니다.  구글은 모바일 컴퓨팅의 시대가 되면 가장 적합한 광고를 찾아서 전달하는 서비스의 중심이 되고 싶었지만, 아이폰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면 구글의 이러한 계획은 결국 애플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야만 한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글은 이미 2005년 안드로이드를 인수하면서 그와 관련한 작업을 진행할 인력과 자원을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아이폰의 성공을 보면서, 구글은 비밀리에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이상 아이폰이 세상을 장악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는 안된다는 판단이 섰던 것입니다.  구글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지배하는 세상보다는 모바일 환경에서도 웹이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을 위해서 낫다고 판단했고, 애플은 가능하면 아이폰을 포함한 디바이스 수준에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2007년 11월, 구글은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그것도 오픈소스이고, 휴대폰 제조업체나 이동통신사들이 마음대로 변형을 할 수 있는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 있어서는 정말 과거 매킨토시와 윈도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데 충분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때 구글에 대해 "배신감"을 느겼다고 표현하였고, 실제로 구글이 프로젝트를 발표하는데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로맨스는 끝나고 최고의 경쟁자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쟁의 심화

이때부터, 스티브 잡스는 구글과 안드로이드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구글의 모토인 "사악해지지 말자 (Don't Be Evil)" 은 정말로 "x같은 소리(It's bullshit)"라는 강도높은 말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면서 구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도 애플의 이사회에는 에릭 슈미트가 앉아 있었고, 에릭 슈미트는 점점 고립이 되었습니다.  에릭 슈미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애플과 구글은 둘다 세콰이어 캐피탈이라는 실리콘 밸리 최고의 벤쳐 캐피탈이 대주주로 있었고, 정말 형제처럼 이사회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구글의 안드로이드 프로젝트가 회사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으며, 애플이든 구글이든 선택을 해야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 슈미트는 2009년 8월까지 애플 이사회의 멤버 자리를 유지합니다.  에릭 슈미트에 따르면 그 때까지도 애플의 발전에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하였고, 실제로 아이폰 최고의 앱과 서비스들은 구글이 제공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글이 애플이 거의 인수할 뻔했던 최대의 모바일 광고회사인 애드몹(AdMob)을 중간에 가로채듯이 인수하면서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넙니다.  에릭 슈미트는 애플 이사회에서 사임을 하였고, 애플은 애드몹을 뺏긴 것이 분했지만 2위 업체인 쿼트로 와이어리스(Quattro Wireless)를 인수하면서 일전을 준비합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눈독을 들이고 인수하려고 작업을 하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라라(Lala)를 전격적으로 인수하면서 애드몹을 빼앗긴 사건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됩니다.  또한, 구글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고, 실제로 초창기 에릭 슈미트가 구글에 안착을 하고 창업자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끌어가는데 최고의 공헌을 했던 '코치' 캠벨을 반대로 구글과의 관계를 정리합니다.  이유는 형제와 다름 없었던 스티브 잡스가 있는 애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글과 애플의 싸움은 앞으로 계속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 아이폰 최고의 서비스 중의 하나인 구글 지도 역시 애플의 입장에서는 눈의 가시로 여겨지고 있어, 애플이 지도회사를 인수하고 독자적인 지도 서비스를 내놓는 순간 퇴출의 길을 걸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아이폰 4 부터는 검색을 구글에서 공동의 적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빙(Bing)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들의 적대의식이 얼마나 심화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애플은 아이폰을 구글에게서 완전히 독립시키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글이 아이폰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


(후속편에 계속 ...)


참고자료



P.S. 이 시리즈는 이미 완결되어 출간이 되었으며, 전체 내용을 일괄적으로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광고된 도서를 구입하시면 보다 충실하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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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은 다시 구글로 넘어와서 조금씩 신임 CEO 인 에릭 슈미트와 두 명의 창업자들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구글이 관리위기에 빠지는 순간과 이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실리콘 밸리의 위대한 코치, 빌 캠벨(Bill Campbell)의 이야기 입니다.


신임 CEO, 창업자와의 갈등이 시작되다.

2001년 구글의 CEO 가 된 에릭 슈미트는 초기에는 주로 회사의 시스템과 문화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면서 무난하게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에릭 슈미트는 아무리 구글이라는 회사가 자유로운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조금은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와 관련한 일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그의 움직임에 대해 두 명의 창업자들은 회사가 지나치게 관료화되고 있다면서 회의를 할 때 종종 커다란 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신임 CEO 의 회사장악과 변신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에릭 슈미트는 이런 갈등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파워 싸움을 하기 보다는 매우 부드러운 방법을 선택하였는데, 그의 이런 우유부단해 보이는 모습은 강하고 경험이 많은 CEO 가 들어와서 구글의 체계를 잡아주기를 원했던 투자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세콰이어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는 에릭 슈미트의 행동을 보고서 그가 구글에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대단히 비관적인 전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에릭 슈미트는 묘수를 찾아내는데,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하기 보다는 외부의 존경받는 인물을 구글의 고문으로 모시고서 중재를 부탁합니다.  에릭 슈미트가 고른 사람이 바로 실리콘 밸리 전체에서 존경받고, 또한 포용력의 대가로 통하던 빌 캠벨 (Bill Campbell) 로, 에릭 슈미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사회 임원의 한 명이고 가장 큰 투자자의 대표였던 존 도어가 빌 캠벨을 구글을 돕도록 다리를 놓는데 큰 역할을 담당합니다.


미식축구의 코치, 전설적인 실리콘 밸리의 코치로 변신

빌 캠벨은 피츠버그 근처의 홈스테드라는 도시의 출신으로 명문인 컬럼비아 대학으로 진학을 해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선수로서의 활약보다 컬럼비아 대학의 미식축구팀 헤드코치로서의 명성이 더했던 그는 1970년대 후반 팀을 이끌면서 존경받는 코치생활을 했지만, 1978년 최대 라이벌 대학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경기를 끝으로 미식축구 코치생활을 접고, 마케팅 관련한 일을 시작합니다.

월터 톰슨이라는 광고 에이전시와 코닥을 거쳐, 그가 처음으로 실리콘 밸리에 자리를 잡게 된 곳은 바로 애플입니다.  존 스컬리가 애플의 CEO 가 된 1983년, 빌 캠벨은 존 스컬리의 부탁으로 애플의 마케팅 부분 부사장으로 실리콘 밸리에 입성합니다.  캠벨은 애플에 합류한지 몇 달만에 판매와 마케팅 부분을 모두 맡게 되었고, 인적혁신을 통해 젊지만 열정이 있는 사람들과 여성들을 대거 채용하고, 열정이 없이 현실에 안주만 하려는 직원들은 대거 해고를 하였습니다.  그는 앙숙이었던 스티브 잡스와 존 스컬리 모두와 친한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현재까지도 캠벨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스티브 잡스는 그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존 스컬리는 그를 존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존 스컬리가 1985년 스티브 잡스를 애플에서 쫓아내는 일을 도모할 때 캠벨을 이것이 애플 역사상 최악의 결정이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고, 존 스컬리의 거사가 성공한 이후 존 스컬리와 빌 캠벨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됩니다.  1987년 존 스컬리는 빌 캠벨을 애플의 클라리스라는 사업부분을 맡기고 이를 분리시켜서 빌 캠벨을 간접적으로 쫓아내려는 전략을 세우는데, 예상외로 클라리스가 번창하자 존 스컬리는 그 계획을 백지화하였고, 이에 반발한 빌 캠벨은 존 스컬리 밑에 있느니 차라리 실업자가 되겠다며 애플을 퇴사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이후, 빌 캠벨은 다시 회사의 이사회의 임원의 한명으로 자리를 차지 합니다.

빌 캠벨은 애플에서 퇴사한 이후에 존 도어의 도움을 받아서 Go Corporation 이라는 회사의 CEO 가 됩니다.  이 회사는 펜 컴퓨터 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이를 직접 운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빌 캠벨은 1993년 이 회사를 AT&T 에 매각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가 선택한 회사는 인튜잇(Intuit)으로 개인과 소규모 사업자들에게 재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현재까지도 잘 나가는 회사입니다.  빌 캠벨은 이곳의 CEO 로 일하면서, 존 도어와 자주 만남을 가졌는데 존 도어가 구글에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듣고서 이를 흔쾌히 승낙합니다.  

빌 캠벨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말이나 평일의 저녁시간에 대학의 스포츠 바에서 항상 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고, 언제나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지만 업무에 대한 비밀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는 신뢰성까지 갖추어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실리콘 밸리의 코치입니다.  언제나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듣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북돋아주고 격려하는 것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서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고 합니다.


빌 캠벨, 구글의 가교가 되다.

빌 캠벨은 예의 뛰어난 친화력으로 금방 에릭 슈미트, 그리고 두 명의 창업자와 스스럼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됩니다.  캠벨은 에릭 슈미트의 고민과 구글의 창업자들의 고민을 모두 이해하였고, 이런 고민을 당사자들이 바로 충돌을 하게 만들기 보다는 중간에서 중재를 하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가 했던 역할은 단순히 창업자들과 CEO 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 갈등이 투자자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사회와 구글 경영진들과의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이사회에서는 언제나 구글의 수익을 빨리 확보하기 위해 안달을 하였고, 경영진들은 지나치게 무리한 수익화 추진을 반대하였습니다.  캠벨은 이런 갈등도 중재하면서 초창기 구글이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역할은 구글의 창업자, CEO, 그리고 이사회, 더 나아가서는 다른 경영진들과 직원들의 신임을 얻어야 가능한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이들의 중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경영시스템이 자리를 잡고, 괜찮은 인재들을 채용하고, 경영회의와 이사회와의 관계 및 시스템을 정비하는데 효과적인 조언을 함으로써 오늘날 구글의 성공을 이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매주 월요일 경영진 회의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수 차례 엔지니어들의 프로젝트 회의에도 항상 동석하였고, 여러 명의 이사들과 정기적으로 일대일 미팅을 가지고 격려를 하는 등 정말 대단한 열정으로 구글이라는 회사의 코치역할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직도 구글의 코치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의 누구도 그가 나타나면 환영을 하며, 구글에서는 정말 특별한 대우로 그에게 전용 주차공간을 할애하였다고 합니다.  


실리콘 밸리의 가장 존경받는 인물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들처럼 엄청난 부자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것에는 모두들 동의한다고 합니다.  그는 가장 성공한 기업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마크 앤드리센, 스티브 잡스를 포함한 최고의 인재들의 개인 멘토로서 주말이면 같이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간의 10%를 애플에, 35%를 구글에 투자를 하며, 35%를 인튜잇에 투자하고, 10%를 컬럼비아 대학 이사회에 할애하는 그는 나머지는 정말 다채로운 생활에 쓴다고 말합니다.  

실리콘 밸리는 너무 급변하고 기술위주로 변해갔기에, 어찌보면 이렇게 가장 인간적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건네주고, 마음을 전달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미식축구 코치의 인화력이 가장 필요했던 곳인지도 모릅니다.  빌 캠벨은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실리콘 밸리를 일으켜세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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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IT 삼국지는 역동의 2001년, 구글의 CEO 자리에 오른 에릭 슈미트가 구글이라는 황당한 조직문화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많이 헤치지 않으면서도 관리체계를 잡아가던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CEO의 첫 출근 책상은 다른 사람 차지?

2001년 8월 구글의 CEO 자리에 오른 에릭 슈미트는 늘 입던 정장을 벗어 던지고, 구글의 문화에 맞추어 검은색 구글 로고가 새겨진 골프 티셔츠를 입고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에릭 슈미트의 사무실에는 2개의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한 엔지니어가 빈 사무실을 보고 먼저 자리를 잡아 버리는 바람에 그 엔지니어의 옆에 앉아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구글은 그런 회사였습니다.  한 눈에 구글이라는 회사의 상태를 파악한 에릭 슈미트는 그 엔지니어를 쫓아내지 않고, 조용히 옆자리에 앉아서 사무실 동료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에릭 슈미트는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휘어잡기 보다는 장점은 최대한 수용하고, 단점이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조금씩 점진적으로 바꾸어 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구글이라는 조직은 두 명의 창업자의 지휘아래 기술과 상품에 집중을 하였고, 관료주의는 혐오하는 그런 회사가 되었고, 이런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유로운 엔지니어와 관료주의가 자리잡지 못하면서도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투명한 회사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관리시스템의 정착이 처음 CEO 로 취임한 에릭 슈미트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언제나 톡톡 튀고, 실현가능성이 없는 계획까지 해보자고 말을 던지는 두 명의 창업자들을 컨트롤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두 명의 창업자들은 회사의 재무를 분석하거나 기자를 만나서 회사의 이야기를 하거나, 여러 산업과 정부 등과의 협력관계 등과 같은 여러가지 일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온전히 에릭 슈미트의 차지였고, 회사의 입장에서도 정말 중요한 일들 이었는데, 에릭 슈미트는 무난하게 이런 문제들을 경륜을 가지고 해결해 나갑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경계하다.

당시 구글은 검색 부분에서 1위에 올라선 이후에 알타비스타나 야후, 오버추어 등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에릭 슈미트는 두 창업자들에게 결국 구글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 마이크로소프트가 검색시장에 뛰어들 것이라는 경고를 합니다.  당시 무서운 것이 없었던 구글이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여간 신경쓰이는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구글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비교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통해서 가장 잘 나가고 선발주자로 입지를 다져온 넷스케이프를 물리치고 브라우저 경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가 검색에 뛰어들 수도 있다는 에릭 슈미트의 경고는 구글에게 보다 신중한 대비를 하도록 경종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릭 슈미트의 경고를 바탕으로 두 창업자와 구글은 혹시라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뛰어들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체 응용 프로그램과 브라우저까지 만들고, 이를 통한 독립성을 확보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런 결정과 노력을 통해 탄생한 것이 바로 구글 독스(Google Docs) 서비스와 크롬(Chrome) 브라우저 입니다.


야후의 인수제안, 그리고 오버추어 갈등의 시작

에릭 슈미트가 CEO 로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글 3인방은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회사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제리 양을 대신하여 야후의 CEO 로 등극한 테리 세멀(Terry Semel)의 연락을 받습니다.  테리 세멀은 인터넷 기업이나 IT 기술 전문가가 아닌, 세계적인 미디어 회사인 워너 브라더스의 공동 CEO 로 24년을 재직한 콘텐츠와 미디어 산업 전문가입니다.  그런 그가 야후라는 당시 가장 커다란 인터넷 대표기업의 CEO 로 선임된 것에 대해서 기대도 있었지만, 주변의 우려도 많았습니다.  거기에 야후는 한 때 시가총액 1,270억 달러에 육박했었던 시절을 뒤로 하고, 닷컴 버블의 붕괴와 함께 회사가치가 1/10로 떨어지는 위기상황을 겪고 있었기에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낼 반전의 카드가 필요했습니다.

테리 세멀이 처음 신경을 쓴 것은 야후가 외부의 콘텐츠만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고, 미디어 회사처럼 광고도 더 많이 판매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후에 합류한 후 닷컴 버블 붕괴의 여파로 회사는 9,800만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테리 세멀은 야후가 구글의 주식을 일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주식은 야후의 검색엔진으로 구글을 이용하게 되면서 현물로 받은 것)을 알게된 이후 구글 3인방을 만나서 구글을 아예 인수할 수 있을지 의중을 떠보기로 했습니다.  내부적으로 약 10억 달러 정도를 투자할 생각을 가지고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해 보았지만 3명 모두 전혀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만 확인하였습니다.

이 미팅 이후, 오버추어의 빌 그로스가 테리 세멀을 찾아옵니다.  빌 그로스는 자신들의 특허기술을 이용해서 야후의 광고를 더욱 많이 판매해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테리 세멀은 빌 그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버추어와 검색광고 계약을 맺고 광고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단 1년 만에 2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립니다.  이 과정에서 야후에 검색엔진을 공급하던 구글은 야후의 결정에 반발을 했지만, 결국 테리 세멀은 많은 실적을 내주고 있는 오버추어와 잉크토미(Inktomi)를 인수하기로 결정합니다.  2002년 검색엔진을 제공하는 잉크토미를 $2억 3500만 달러에, 2003년 7월 오버추어를 $16.3억 달러에 인수한 야후는 구글과의 검색계약도 파기합니다.  이와 함께 2002년 4월에 오버추어가 구글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침해 소송도 그대로 인수합니다.  이는 야후가 잉크토미를 새로운 검색엔진으로, 그리고 오버추어를 통한 검색광고 사업을 중요한 성장엔진으로 삼은 것인데, 이 결정은 야후의 검색의 품질을 떨어뜨리면서 결국 구글에 비교가 되지 않는 검색엔진 2위로 떨어지게 만들게 됩니다.  비록 당장의 광고수익은 더 많이 올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 결정은 야후가 회복할 수 없는 검색점유율 하락을 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실책이 되면서 결국 최고의 인터넷 기업의 자리를 구글에게 내놓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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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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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삼국지, 오늘은 최고의 검색엔진에 등극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날이 갈수록 수익구조는 악화되었던 구글의 수익모델을 찾기 위한 노력과 CEO 선임이 이루어진 2000년 전후의 이야기 입니다.  


AdWords 의 탄생, 그리고 CEO를 찾아라

세계 최고의 트래픽을 몰고다니는 서비스가 되었지만, 구글에게는 이제 이런 트래픽을 비즈니스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글의 공동 창업자들은 구글 검색에 과도한 비즈니스적인 요소를 연결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들의 이런 생각은 가장 커다란 투자자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의 마이클 모리츠와 존 도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으며 꼭 두 창업자를 끌어줄 수 있는 CEO 를 외부에서 영입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하였습니다.

구글은 2000년 10월, 첫 번째 광고 프로그램인 애드워즈(AdWords)를 테스트 합니다.  350개의 광고업체만 받아서 그들이 선택한 키워드가 검색어로 들어오면 검색결과 옆에 작은 광고가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광고주들은 해당 키워드를 몇 번이나 사용자들이 이용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분석도구도 엉성했고 생각처럼 쉽게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애드워즈는 광고주들이 광고가 화면에 몇번 노출되는지를 기준으로 비용책정을 했는데, 이런 모델은 기존 배너광고에서 이용되는 CPM(Cost-Per-Mille, 1000번 노출당 단가) 방식의 변형이었고 GoTo.com 이 이미 CPC(Cost-Per-Click, 클릭당 단가) 방식의 검색광고를 시작한 상태였고, 그 반응도 좋았기 때문에 기존의 CPM 방식을 채용한 애드워즈는 그렇게 큰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다양한 형태의 광고방식이 제안되었지만, 거의 대부분 구글의 창업자들에 의해 광고가 검색과 확실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집어넣을 수 없다는 고집스러운 철학에 가로막혔습니다.  존 도어와 마이클 모리츠는 이대로는 구글의 미래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하에, 투자를 했던 당시의 약속인 '새로운 CEO를 영입하라'는 말을 지키라고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두 공동창업자들은 약속을 지켜야 했기에 마지못해 여러 명의 CEO 후보자들과 미팅을 가지지만, 대부분 장난스러운 인터뷰를 하다가 '기술을 모른다'는 핑게로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퇴짜를 놓은 CEO 후보들이 15명이 넘어가자, 존 도어와 마이클 모리츠는 이 두 사람이 CEO 를 선임하지 않으려고 그냥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 한 해가 이런 식으로 CEO 선임을 위한 작업으로 저물어 갔지만, 결국 CEO 는 뽑을 수 없었고, 전문경영인도 없었으며, 회사의 관리체계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야심차게(?) 내놓은 애드워즈는 그다지 커다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고, 비용을 수반하는 쓸데없는 트래픽만 자꾸 늘어나면서 과연 구글이라는 회사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론마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나마 해를 넘겨 2001년 1월에 애플,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등에서 운영 부사장으로 일했던 웨인 로징(Wayne Rosing)을 뽑으면서 엔지니어의 문화를 존중하지만 관리가 가능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중책을 맡게 됩니다. 


에릭 슈미트와의 인터뷰, CEO 를 찾아내다.

구글이라는 회사의 CEO 를 찾는 작업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KPCB 의 존 도어에게는 구글의 CEO 로 적임자로 떠오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존 도어의 절친한 친구였던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입니다.  에릭 슈미트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CTO 로 일하다가, 더욱 큰 꿈을 안고 노벨(Novell)의 CEO 로 적을 옮기게 되는데,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는 달리 노벨에서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가 합류했을 때 노벨의 4분기 매출은 목표액에 1,460만 달러나 적었고, 경영진들은 이를 분식회계로 메꾸는 방법을 제안하지만, 에릭 슈미티는 그대로 발표하기로 하고 노벨의 주가는 곤두박질치면서 회사가 바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큰 꿈을 안고 들어간 회사가 입사하자마자 위기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존 도어의 추천과 함께 웨인 로징에 대한 평판을 알기 위해 세르게이 브린이 에릭 슈미트에게 전화를 해서 장시간 통화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구글에 잠시 들르기로 합니다.  2000년 12월, 에릭 슈미트는 약속대로 구글을 방문합니다.  2000년 당시 구글이 사용하던 건물은 마운틴 뷰의 빌딩21 이었는데, 이 건물은 에릭 슈미트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재직하던 시절에 썬의 건물로서 일하던 건물이었기 때문에 회사는 달랐지만 장소라는 측면에서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CEO 인터뷰를 위해 일부러 만든 자리는 아니었지만, 에릭 슈미트는 존 도어에게 언질을 받은 상태였고, 또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역시 에릭 슈미트가 과연 구글 CEO 가 될만한 사람인지 알고 싶었기에, 이 때의 만남은 서로의 기싸움이 되는 중요한 미팅이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에릭 슈미트를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노벨에서 내린 결정에 대한 기술적 비판을 합니다.  노벨이 전략적으로 인터넷 속도를 높이기 위해 개발한 프록시 캐시(proxy cache)라는 기술이 결국 초고속 인터넷이 늘어나게 되면 무용지물이 될텐데 쓸데없는 곳에 투자를 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니냐는 날선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에릭 슈미트는 자신의 논거를 앞세워 거세게 반론을 하였는데, 이런 논쟁이 무려 1시간 30분 가까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보통의 인터뷰였다면 완전히 실패했을 이런 논쟁이, 결국은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가 에릭 슈미트라는 사람을 구글의 CEO 적임자로 인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에릭 슈미트 역시 구글의 이런 문화가 싫지 않았습니다.  2001년 2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에릭 슈미트에게 정식으로 구글의 CEO 자리를 제안하였고, 에릭 슈미트는 노벨의 합병을 마무리하고 구글의 CEO 를 맡는 대신 3월 부터 일단 회장의 자리에 취임을 합니다.  그해 8월 에릭 슈미트는 구글의 CEO 자리에 오르면서, 세루게이 브린이 기술부문 사장을 맡고 래리 페이지가 제품부문 사장을 맡는 구글의 3두체제가 완성됩니다.  이때 정해진 연봉과 함께, 에릭 슈미트는 1500만 주에 육박하는 엄청난 주식을 스톡옵션으로 받으면서 구글의 명실상부한 공동책임자가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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