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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II, 새로운 세상을 열다.

스티브 잡스의 직관과 추진력,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걸출한 엔지니어, 그리고 마이크 마큘라라는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볼 줄 알았던 젊은 엔젤 투자자와 경영능력, 마지막으로 레지스 매키너라는 당대 최고의 마케터가 같이 뭉친 애플 II 는 세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당대 최고의 컴퓨터 회사였던 IBM의 CEO인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은 전 세계에서 새로운 컴퓨터를 필요로 하는 수요는 매년 5대 정도면 충분하다는 논리를 폈고, Altair 8800 이 나오면서 개인용 컴퓨터가 가능성을 비추면서 젊은 사업가들이 세상이 바꿀 것이라는 인식을 하기 시작할 때에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여겼습니다.  또한, IBM과 함께 대형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DEC의 CEO인 켄 올슨(Ken Olsen) 같은 사람은 가정에 어째서 컴퓨터가 필요하냐고 반문하면서 PC 사업을 쓸데없는 사업 정도로 여겼습니다.  애플을 비롯한 다른 어떤 회사보다도 나은 기술인력과 네트워크, 자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결국 애플 II 의 대성공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IBM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DEC는 결국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에는 회사가 매각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애플 컴퓨터 역시 스티브 잡스가 아닌 스티브 워즈니액의 기획의 전권을 쥔 엔지니어 마인드로 접근했다면 비슷한 결과를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아타리 컴퓨터에서 여러 작업을 하면서 컴퓨터가 인생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요소가 있으며, 게임을 비롯한 여러가지 용도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사용하기 편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으며, 마이크 마큘라나 레지스 매키너와 같은 동료들도 그런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컴퓨터 회사들과 차별화를 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런 사용자 편의적이고 즐거운 인생에 도움을 주는 도구라는 개념은 애플의 역사를 타고 도도히 이어져서 현재의 애플 컴퓨터가 만드는 제품들도 잘 살펴보면 개인의 인생과 생활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철학들이 담겨져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애플 II의 성공을 이끈 킬러앱, 비지캘크(VIsiCalc)

애플 II의 성공에는 물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천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또다른 숨은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댄 브리클린(Dan Bricklin)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댄 브리클린과 밥 프랭크스톤(Bob Frankston)이 공동 개발한 비지캘크(VisiCalc)는 컴퓨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소프트웨어 입니다.  이 소프트웨어 하나로 애플 II는 단순한 가정용 컴퓨터 기기를 너머서 기업에서도 꼭 필요한 컴퓨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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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하버드 MBA 과정에 있던 댄 브리클린은 전통적인 종이 스프레드 쉬트를 이용하여 교수가 강의를 할 때, 교수가 하나의 셀에서 실수를 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모든 셀의 값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훨씬 생산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실행력이 있어야 하는 법 ...  브리클린은 베테랑 프로그래머인 밥 프랭스턴을 고용합니다.  당시 컴퓨터가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컴퓨터를 가진 사람들을 수소문하는데, 이 때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컴퓨터가 바로 애플 II 였습니다.  애플 II에는 당시 정수베이직(Integer Basic)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밥 프랭스턴은 이 언어를 이용해서 데모 프로그램을 구현합니다. 

브리클린에게 애플 II를 빌려준 사람은 Personal Software사의 댄 필스트라(Dan Fylstra) 였습니다.  그 역시 애플 II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컴퓨터가 좋아서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에게 자사의 체스 프로그램을 애플 II 용으로 포팅하겠다고 하고 매우 싸게 애플 II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지캘크가 애플 II용으로 개발된 것에는 이렇게 대단한 행운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댄 필스트라는 브리클린과 밥 프랭스턴이 구현한 데모를 보고 즉시 제품개발 계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비지캘크를 발표한 Software Arts 입니다.  

비지캘크는 소프트웨어 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기록한 제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자 최초의 스프레드 쉬트입니다.  비지캘크가 정형화한 스프레드 쉬트의 형태는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애플 II는 하드웨어 사양에 있어, 폭으로 글자를 40자(40 컬럼)만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좌우폭의 한계 때문에, 비지캘크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었는데, 애플에서는 이를 80컬럼으로 늘리는 주변장치 카드도 판매하였는데 이 카드의 판매량도 비지캘크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비지캘크는 1979년 11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는데, 100 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립니다.  소프트웨어의 판매가 급성장하자, 애플 II도 번들 전략을 이용해서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수십 만대의 애플 II 컴퓨터들이 단지 비지캘크를 사용하기 위해서 팔리게 됩니다.  

비지캘크의 성공은 또다른 업무영 소프트웨어들의 발전을 자극하는데, 그 유명한 애쉬턴테이트사의 업무용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인 디베이스(dBase)와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스타(WordStar) 등이 PC 용으로 개발되어 판매가 되었고, PC가 바야흐로 사무자동화(OA, Office Automation)의 첨병으로 대접받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최초의 성공자,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댄 브리클린은 아담 오즈본(Adam Osborne)의 White Elephant 상을 수상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지캘크의 성공신화는  IBM PC의 등장과 함께 로터스의 1-2-3가 나오면서 저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해 동업자였던 Personal Software에서 1983년 법적 분쟁까지 겪으면서 결국 Software Arts는 로터스에 매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소프트웨어 특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현재도 소프트웨어 부분의 특허는 쉽지가 않습니다). 

비지캘크는 사무혁명을 일으킨 소프트웨어이자, 기업의 OA(Office Automation)라는 것을 처음으로 대중화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일종의 기계로 바라보던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도 비지캘크의 공입니다.  애플 II는 비지캘크를 무기로 당시 난립하고 있던 가정용 PC 시장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애플도 대단히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댄 브리클린이 비지캘크를 개발할 때, 애플 II 컴퓨터가 아니라 당시 경쟁을 하고 있는 라디오쉑(RadioShack)의 TRS-80이나 코머도어 같은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면 PC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을 테니까요 ...

그런데, IBM PC의 등장과 함께 시장을 지배하던 로터스 1-2-3 역시 시장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현재 잘 나가고 있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변화에 대한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혁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긴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 법입니다.


애플 II의 또 하나의 성공전략, 게임과 교육

애플 II의 성공에 직장에서는 비지캘크가 큰 역할을 했다면, 가정에 보급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게임과 교육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게임회사에 다녔고,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이 개발한 정수 BASIC을 게임 BASIC이라고 부를 정도로 게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해상도 그래픽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당시 경쟁대상이었던 어떤 컴퓨터 보다도 게임을 지원하기 위한 여건이 뛰어났습니다.

특히, 애플 II 는 다른 컴퓨터와는 달리 RF 모듈레이터라는 것이 있어서 컬러 TV에 연결이 가능해서 컬러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 애플 II+ 컴퓨터를 구매했을 때, 전용 모니터를 사지않고 TV를 연결해서 이용했었는데, 컬러 TV에 연결해서 즐기던 게임들은 다른 어떤 PC들보다 우수하고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지캘크를 통해 사무실을 장악한 애플 II가 또 하나의 거대한 바람을 일으킨 시장은 교육시장이었습니다.  애플 II는 아이들의 학습도구로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대규모 캠페인을 이용해서 학생들이 미래를 위해 컴퓨터 한대 정도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성공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특히 캘리포니아주 모든 학겨에 애플 II 컴퓨터를 한 대씩 무료로 기증하는 과감한 행보와 함께, 광고로 애플 II 컴퓨터로 학교 리포트를 작성하거나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통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부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컴퓨터 교육과정이 정규과정으로 편성이 되면서,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더욱 익숙했던 애플 II는 자연스럽게 다른 경쟁 컴퓨터들을 제치고 부모들이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주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집에 컴퓨터를 한 대씩 장만하는 투자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렇게 애플 II 가 급속도로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당시 큰 인기를 끌던 가정용 게임기가 우수한 컴퓨터 게임 소프트웨어를 통해 붕괴되는등 만만치 않은 산업적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컴퓨터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프린터도 판매가 되면서 EPSON 등과 같은 라인 프린터 회사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고, 또한 애플 II 의 성공에 자극받아서 많은 수의 개인용 컴퓨터 제조사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코모도어 64라는 제품을 앞세웠던 코모도어사는 1700~2500만대 정도의 컴퓨터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결국 IBM 이라는 거인이 PC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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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다.

1977년 애플 II 가 출시될 당시, PC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소프트웨어는 BASIC 언어를 해석해서 실행을 해주는 인터프리터였습니다.  애플 II 에는 스티브 워즈니액인 만든 정수 BASIC (Integer BASIC) 이라는 인터프리터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 BASIC 언어는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실수에 대한 처리와 일부 문자열 처리를 하는데에 문제가 있어서 비즈니스용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7~1979년 6월까지 정수 BASIC 은 애플 II 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BASIC 인터프리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로 인하여 애플은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BASIC 인터프리터를 제공하기를 원했는데, 그 파트너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선택합니다.

앞선 연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이크로소프트는 1975년 이후 BASIC 인터프리터 개발과 관련해서는 당대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976년 중반 마이크로소프트의 첫번째 직원인 마크 맥도널드(Marc McDonald)는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6502 를 이용한 PC는 애플-1 밖에 없었고 애플 II 가 출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티브 잡스에게 전화를 해서 혹시 새로운 BASIC에 관심이 없는지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렇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스티브 워즈니액이 만든 정수 BASIC 이 있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자신들은 이미 BASIC을 가지고 있다면서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맥도널드는 6502용 BASIC을 그냥 만들기 시작합니다.   애플은 애플 II 를 출시하면서 탑재한 정수 BASIC의 성능에 대한 불만족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수정요구가 많아 졌지만, 혼자서 BASIC 을 개발한 스티브 워즈니액은 새로운 DISK II 라는 인터페이스 카드를 디자인하느라 BASIC을 손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1976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안했던 내용을 기억하고 새로운 BASIC을 만들어 줄 수 없냐고 1977년 8월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접촉합니다.  1977년 8월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10년간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6502 BASIC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수정하는 권한을 애플이 가지는 것으로 $10,500 달러짜리 개발계약을 맺게 되는데, 마이크로소프트는 1976년 10월 코모도어의 PET에 탑재되는 ROM BASIC을 개발하는데 역량을 많이 썼음에도, 하드웨어 제작 및 판매가 지연되면서 일시적인 자금의 경색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드웨어 판매당 로열티 방식으로 하던 계약을 고집하지 않고 일반 개발계약에 동의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새로 만드는 BASIC이 기존에 만들어둔 BASIC을 약간만 손을 보면 되는 수준으로 쉽게 만들 수 있었고, 애플에서 그 이후의 수정개발을 랜디 위긴턴과 같은 자사의 엔지니어를 통해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는 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이 계약은 협상의 귀재인 빌 게이츠 답지 않게 애플 II의 대성공의 과실을 같이 많이 누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BASIC의 이름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이름을 따서 애플소프트 BASIC(Applesoft BASIC)으로 결정되고, 1977년 11월 카세트 테이프에 담겨져서 처음으로 출시됩니다.

이처럼 처음으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벌였던 줄다리기(?)와 협력에서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판정승을 거둡니다.  일반적인 로열티 계약 대신에 자사의 엔지니어를 투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10년간 마음대로 고쳐쓸 수 있는 계약을 이끌어낸 스티브 잡스도 대단하지만, 천하의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도 회사 초창기 돈이 궁하던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인간적(?)인 면도 보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애플소프트 BASIC II와 애플 II+ 출시

초창기 애플소프트 BASIC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테이프로 로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프로그램을 돌리더라도 컴퓨터를 껐다켜면 BASIC을 다시 로드하고 프로그램을 다시 돌려야 했습니다.  또한, 애플 II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쓰기 위한 메모리 영역을 침범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래픽 언어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처리할 수 있는 BASIC은 애플소프트 BASIC 밖에 없었기에 비즈니스용 어플리케이션 개발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978년 봄, 랜디 위긴턴과 애플의 동료들은 애플소프트 BASIC을 업그레이드 합니다.  버그도 고치고, 애플 II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쉽게 쓸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도 하면서 "애플소프트 BASIC II"를 출시합니다.  이 BASIC은 카세트 테이프와 RAM, 펌웨어 카드 ROM, 언어카드 ROM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출시가 되는데, 언어 자체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특히 ROM 으로 출시한 것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면서 소비자들은 애플소프트 BASIC을 본체에 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침내 애플 II의 메인보드에 기본으로 탑재하도록 결정하는데, 이것이 바로 애플 II+ 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애플 II+ 는 애플 II와 큰 차이는 없지만 무엇보다 애플소프트 BASIC이 메인보드에 ROM으로 기본탑재가 되었고, RAM의 가격이 다소 떨어졌기 때문에 기본 메모리를 48KB로 늘립니다.  또한, 일부 문제가 있었던 버그를 고치고, 메인보드의 디자인도 업그레이드한 뒤에 1979년 6월 애플 II+를 출시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애플 컴퓨터 복제회사들이 원형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애플 II+ 입니다.  일부 컴퓨터는 16KB의 RAM을 더 탑재해서 64KB 로 내놓기도 했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1983년 애플 II 호환기종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구입했는데, 이 역시 16KB RAM이 확장된 애플 II+ 호환기종이었습니다.


애플 II, 마이크 마큘라 그리고 레지스 매키너

애플 II의 탄생에는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과 함께 마이크 마큘라(Mike Makkula)와 레지스 매키너(Regis MacKenna)의 공이 컸습니다.  애플-1에서 약간의 성공을 했지만, 하드웨어 사업을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스티브 잡스는 자금을 지원해줄 사람을 찾아다니기 위해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먼저 전 직장인 아타리의 사장 놀란 부쉬넬을 찾아가 투자를 부탁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잘 나가던 아타리와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자금난을 겪고 있었기에 놀란 부쉬넬은 아타리의 투자자인 돈 밸런타인(Donald Valentine)을 소개합니다.  돈 밸런타인은 실리콘 밸리의 영향력있는 벤처 캐피탈의 할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아직도 최고의 벤처 캐피탈 중의 하나로 꼽히는 세코이어 캐피탈(Sequoia Capital)을 1972년에 설립한 사람입니다.  돈 밸런타인은 편집증 환자에 전혀 격식이라고는 없었던 스티브 잡스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스티브 잡스가 끈질기게 찾아가자 돈 밸런타인은 인텔에서 큰 돈을 벌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한 마이크 마큘라(Mike Makkula)에게 일을 떠 넘깁니다.  

돈 밸런타인의 부탁을 받은 마이크 마큘라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스티브 잡스를 따라서 애플의 본거지였던 스티브 잡스의 차고를 찾아갔다가 스티브 워즈니액이 개발 중이던 애플 II를 보고서 바로 성공을 직감합니다.  그는 즉시  $25만 달러의 투자를 결정하는데, $8만 달러로 애플주식의 1/3을 사들이고, 나머지 $17만 달러는 싼 이자로 대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애플의 3번째 직원이 되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인텔이라는 성공적인 벤처 회사의 마케터로 일했던 그는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을 도와 애플을 제대로 돌아가는 회사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첫번째 사장으로 내셔널 세미컨덕터에서 마이클 스캇(Michael Scott)을 앉히고, 그 밖에 여러 인재들을 합류시켰으며, 동시에 돈 밸런타인을 포함한 여러 투자자들까지 설득해서 애플의 재정이 문제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레지스 매키너는 실리콘 밸리에서 1970~80년대 최고의 홍보전문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애플 II의 성공을 위해 레지스 매키너와 같은 홍보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스티브 잡스는 돈 밸런타인을 찾아갔을 때처럼 끊임없이 구애를 하면서 레지스 매키너를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애플 II와 함께 나온 애플 II를 대표한 6색 사과 로고가 바로 그의 첫번째 작품으로 컴퓨터에 컬러를 제공한다는 느낌과 함께 베어먹은 금단의 사과의 느낌이 나는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스티브 잡스가 처음에는 이 디자인을 거부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에는 그 뒤로 수십 년간 애플을 대표하는 로고가 됩니다.

이처럼 애플의 초창기 성공에는 스티브 잡스의 끈질긴 집념과 마이크 마큘라와 같이 성공할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하는 엔젤 투자자들, 그리고 회사의 약점을 메꾸어 주었던 뛰어난 관리인력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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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전설적 컴퓨터 모임, 홈브루 컴퓨터 클럽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전자제품 매니아들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클럽은 다양한 전자관련 부품들이나 회로, 그리고 정보를 교류도 하고, 컴퓨터 관련 장비를 직접 조립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해왔는데, 고든 프렌치(Gordon French)의 차고에서 1975년 첫 모임을 가지고 비정기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의 멤버들은 아직도 정기적인 미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이들의 수준은 정말 당대 최고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Altair 8800 컴퓨터가 나온 뒤에는 이와 유사한 컴퓨터를 조립하거나,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으며, 가끔씩 발행하는 뉴스레터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만드는 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라는 아이디어를 확산시키고 후에 애플 컴퓨터가 출범하게 되는데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였습니다.

이 컴퓨터 클럽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스티브 워즈니액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하드웨어 디자인, 조립실력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으로 클럽 멤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애플 컴퓨터, 드디어 깃발을 올리다.

이렇게 새로운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티브 워즈니액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컴퓨터를 설계하고, 차고에서 컴퓨터를 조립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 로널드 웨인(Ronald Wayne)과 함께 3명이서 애플 컴퓨터의 깃발을 올립니다.  로널드 웨인은 아타리에서 스티브 잡스와 일을 했었고, 스티브 워즈니액의 기술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애플 로고도 그리고, 애플-1 의 매뉴얼을 작성하는 작업과 각종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의 실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면서 애플의 주식 10%를 가졌는데, 2주 뒤에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고 $800에 자신의 주식을 매각하고 애플을 떠납니다. 웨인은 당시 상황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지만, 현재의 애플이라는 회사의 가치를 생각하면 아마도 마음이 많이 상할 것 같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스티브 잡스의 차고에서 만든 애플 I 퍼스널 컴퓨터 키트를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애플-1 은 Altair 8800과 비슷한 형태를 가졌는데, 내부에 확장 카드를 꽂을 수 있도록 하였고, $25 정도하였던 MOS 6502 라는 CPU를 가졌으며, 256 바이트의 ROM과 4K~8K 바이트 RAM을 가졌습니다.  디스플레이 컨트롤러는 40열에 24개의 행을 표시할 수 있었는데, 케이스나 파워, 키보드, 디스플레이 등도 없이 보드만 판매하는 형태였습니다.  사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애플 컴퓨터에 Altair 가 사용한 인텔의 8080 칩을 쓰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격이 무려 $179 달러나 하였기 때문에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모토롤라의 6800 을 고려하였지만, 역시 최고로 낮출 수 있는 가격이 $175 달러나 하였습니다.  결국 애플이 이름없는 회사의 기능도 많이 떨어지는 CPU인 6502를 채택한 것에는 월등히 싼 가격이 한 몫을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6502는 6800 CPU와 상당히 기능적으로 비슷하였고, 4KB RAM 에 올라가서 동작하는 BASIC 인터프리터를 만들어서 올리고 판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 밸리의 여러 컴퓨터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애플 컴퓨터를 보여주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은 $666.66 달러로 결정하였는데, 그 의미와 애플의 로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이 연재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제품을 주문한 곳은 바이트(Byte) 라는 가게를 새로 열려고 했던 폴 터렐(Paul Terrell) 이었습니다. $500 달러에 50대의 애플-1을 구매하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애플이 100대를 제작할 수 있는 부품을 구하기 위한 자본금이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팔았고,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이 아끼던 HP의 최고급 공학용 전자계산기까지 팔았지만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는 특유의 영업력과 화술로 부품을 공급하는 가게들에게 신용으로 상당부분 부족한 부분을 메꾸었으며, 추가로 은행에서 $5,000 달러의 빚을 얻어서 부품을 구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뛰어난 기술자였지만, 사람들하고 협상을 하거나 계약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였고, 그냥 컴퓨터와 기술이 좋아서 그것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 비해, 스티브 잡스는 재능있는 사람과 가능성을 볼 줄 알았고, 처음보거나 잘 모르는 사람도 잘 설득할 수 있는 화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니아가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컴퓨터를 기획하다.

애플-1 은 200대 정도가 제작이 되었고, 약 10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대부분 판매가 됩니다.  애플-1 은 Altair 와 비교했을 때 그래도 사용하기 편리한 편이었지만, 조립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BASIC을 이용하게 만들려면, ROM에 3K 정도 되는 16진수 바이트 코드를 입력해야 했는데, 적어도 20~30분 정도는 소요가 되는 작업이었고,  스티브 잡스는 이래서는 매니아들을 위한 컴퓨터는 될 수 있어도,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쓰는 자신들이 꿈꾸던 세상을 위한 컴퓨터로서의 자격은 없다는 판단을 합니다.

애플-1 을 추가로 생산하기 보다는 사용자가 사용하기 편리한 형태의 컴퓨터 기술들을 스티브 워즈니액과 스티브 잡스는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초기 애플-1 판매에 큰 도움을 준 바이트 샵의 폴 터렐이 소비자 입장에서 원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여러가지 기능개선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카세트 테이프에 저장과 불러들이기가 가능하도록 카세트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고, 마더보드에 추가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워즈니액이 만든 BASIC 언어를 담아서 팔기 시작했으며, 폴 터렐은 나무로 만든 박스에 마더보드를 넣어서 애플-1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애플 II 는 처음부터 예쁜 플라스틱 케이스와 키보드가 통합된 형태로 디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스티브 워즈니액이 스티브 잡스와 아타리에서 진행했던 벽돌깨기(Breakout) 프로그램을 동작시킬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컬러를 지원하기로 합니다.  이를 위해 라인을 그리고, 컬러를 바꾸는 등의 새로운 BASIC 언어들과 루틴들을 추가하고 동시에 소리를 내기 위한 사운드 작업과 본체에 스피커까지 달게 됩니다. 이처럼 애플 II는 게임을 좋아했고, 벽돌깨기 게임 프로젝트를 사랑했던 스티브 워즈니액에 의해 게임을 즐기기 쉬운 컴퓨터로 재탄생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향후 애플 II 용으로 수많은 컴퓨터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애플 II가 PC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추가적으로 RAM 의 증설에도 신경을 썼는데, RAM 의 크기에 따라 다양한 가격의 제품들이 나오게 됩니다.  4KB 부터 최대 48KB 까지 메모리를 설치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척 우스운 크기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커다란 메모리 용량이었습니다.  16KB 의 RAM이 1977년 당시 $500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에, 가장 커다란 가격의 압박요소가 되었는데, 경쟁사였던 코모도어(Commodore)의 PET나 라디오쉑(Radio Shack) 의 TRS-80 의 경우에는 개방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향후 확장이 가능하도록 마더보드를 제작함으로써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애플 II 에 8개의 확장 슬롯을 설계해서 마더보드에 통합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경쟁제품들에 비해 강력한 차별점으로 부각되는데, 수많은 주변기기 제작회사들이 다양한 확장카드들을 만들면서 애플의 전성시기를 열었습니다.  사실 이때에도 스티브 잡스는 프린터와 모뎀을 위한 확장슬롯 2개 정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며, 쓸데없이 제작비만 올리게 된다며 반대했지만 워즈니액은 HP 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성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8개의 슬롯을 모두 지킬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저 역시 어렸을 때 애플 II 를 이용했는데, 애플의 개방형 아키텍처(Open Architecture)는 정말 강력한 생태계를 구성했고, 애플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개방형 철학에 대해 처음부터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애플 II가 그렇게 개방적인 컴퓨터가 되었던 것은 스티브 워즈니액의 영향력이 당시에는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액과는 달리 애플 II 가 정말 다른 컴퓨터들과는 차별화된 다른 모습을 가진 컴퓨터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스케치와 모형을 만들어 가면서, 기존의 각이 진 육면체 형태의 모습을 탈피한 새로운 컴퓨터의 모습을 디자인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자제품 매니아들처럼 부품을 구해서 조립을 하거나, 케이스가 있어도 상자같은 형태에 나사가 여기저기 보이는 등 예쁘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비대칭이면서도 날카로워 보이고, 기능성도 겸비한 케이스를 원했고, 나사가 하나도 겉에서 보이지 않는 케이스를 디자인하였습니다.  나사는 모두 바닥에 위치를 시켰고, 또한 누구나 쉽게 보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컴퓨터 케이스 뚜껑을 쉽게 열 수 있도록 하였으며, 확장슬롯에 카드를 새로 꼽는 작업이 간편한 디자인을 멋지게 해냅니다.  또한 키보드의 컬러와 파워, 냉각팬 등에도 대단한 신경을 썼습니다.  아타리에서 같이 일했넌 로드 홀트(Rod Holt)라는 아날로그 회로 전문가를 고영해서 경량의 파워와 냉각팬을 디자인하였는데, 그의 경량 파워 서플라이와 TV와의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만든 디자인은 애플 II의 경쟁력을 한층 높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애플 II 의 디자인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고,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 외관역시 애플 II의 대성공에 한 몫하게 됩니다.


from Flickr by Marcin Wichary


이렇게 당대 최고의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액과 스티브 잡스가 각자 자신의 장점과 특기를 최대한 발휘하여 완성한 애플 II 컴퓨터는 1977년 4월 일반에 공개가 되면서, 아래와 같은 새로운 애플의 로고와 함께 전세계가 PC 열풍에 빠져들게 만들게 됩니다.




(... 후속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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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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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애플의 대성공은 길게 보면, 초창기 PC 시장을 주도하면서 전세계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애플 II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애플 II의 성공에는 물론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이라는 천재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실제로 PC라는 것의 대성공을 이끈 숨은 장본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댄 브리클린(Dan Bricklin)입니다.

댄 브리클린과 밥 프랭크스톤(Bob Frankston)이 공동 개발한 비지캘크(VisiCalc)는 컴퓨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소프트웨어 입니다.  이 소프트웨어 하나로 애플 II는 단순한 가정용 컴퓨터 기기를 너머서 기업에서도 꼭 필요한 컴퓨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의 실수를 보고 시작된 아이디어

1978년 하버드 MBA 과정에 있던 댄 브리클린은 전통적인 종이 스프레드 쉬트를 이용하여 교수가 강의를 할 때, 교수가 하나의 셀에서 실수를 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를 고치기 위해서 모든 셀의 값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이를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훨씬 생산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실행력이 있어야 하는 법 ...  브리클린은 베테랑 프로그래머인 밥 프랭스턴을 고용합니다.  당시 컴퓨터가 없었던 주변에서 PC를 수소문하는데, 간신히 구할 수 있었던 컴퓨터가 바로 애플 II 였습니다.  애플 II에는 당시 정수베이직(Integer Basic)이 구현되어 있었는데, 밥 프랭스턴은 이 언어를 이용해서 데모 프로그램을 구현합니다.

브리클린에게 애플 II를 빌려준 사람은 Personal Software사의 댄 필스트라(Dan Fylstra) 였습니다.  그 역시 애플 II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컴퓨터가 좋아서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에게 자사의 체스 프로그램을 애플 II 용으로 포팅하겠다고 하고 매우 싸게 애플 II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애플 II용으로 개발된 것에는 이렇게 대단한 행운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댄 필스트라는 브리클린과 밥 프랭스턴이 구현한 데모를 보고 즉시 제품개발 계약을 맺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회사가 바로 비지캘크를 발표한 Software Arts 입니다.


소프트웨어 역사의 한획을 긋다.

비지캘크는 소프트웨어 역사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많이 기록한 제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자 최초의 스프레드 쉬트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비지캘크가 정형화한 스프레드 쉬트의 형태는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애플 II는 하드웨어 사양에 있어, 폭으로 글자를 40자(40 컬럼)만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좌우폭의 한계 때문에, 비지캘크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애플에서는 이를 80컬럼으로 늘리는 주변장치 카드를 판매하였는데 이 카드의 판매량도 비지캘크로 인해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비지캘크는 1979년 11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는데, 100 달러라는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립니다.  소프트웨어의 판매가 급성장하자, 애플 II도 번들 전략을 이용해서 같이 성장하였습니다.  수십 만대의 애플 II 컴퓨터들이 단지 비지캘크를 사용하기 위해서 팔리게 됩니다. 


최초의 성공자, 그러나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하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댄 브리클린은 아담 오즈본(Adam Osborne)에게서 White Elephant 상을 수상받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비지캘크의 성공신화는  IBM PC의 등장과 함께 로터스의 1-2-3가 나오면서 저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더해 동업자였던 Personal Software에서 1983년 법적 분쟁까지 겪으면서 로터스에게 비지캘크를 판매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비지캘크라는 소프트웨어는 그 생명을 다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소프트웨어 특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Software Arts는 로터스에 매각이 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비지캘크는 사무혁명을 일으킨 소프트웨어이자, 기업의 OA(Office Automation)를 일으키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컴퓨터를 일종의 기계로 바라보던 관점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도 비지캘크의 공입니다.  애플 II는 당시 난립하고 있던 가정용 PC 시장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애플도 대단히 운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댄 브리클린이 비지캘크를 개발할 때, 애플 II 컴퓨터가 아닌 TRS-80이나 코머도어같은 당시 애플 II와 경쟁하던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다면 PC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을 테니까요 ...

그럼에도 현재 이 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셀이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판도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더라도, 그리고 현재 잘 나가고 있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변화에 대한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혁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긴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 법입니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 VisiCalc
The First Spreadsheet - VisiCalc - Dan Bricklin and Bob Frankston By Mary Be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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