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괴짜 스티브 워즈니액

애플 II의 아버지인 스티브 워즈니액은 사실 상 애플 II의 모든 것을 창조한 슈퍼 엔지니어입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과 게임 등 모든 면을 거의 혼자서 다 해치우던 그의 능력은 아직까지도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경지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지만, 다른 모든 사회생활과 관련한 부분은 글자그대로 '괴짜' 인생입니다.  

최근에도 매일같이 세그웨이(Segway)라는 외발 전동차를 타고서 실리콘 밸리 주변에서 출몰하며, 얼마전 아이패드가 출시되는 날에도 이것을 타고 줄을 서서 아이패드를 사가지고 떠나는 그의 모습이 언론에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어찌보면 그처럼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애플 II 의 대성공과 함께 1980년 애플의 기업공개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그동안 같이 일을 해온 동료들에게 매우 다른 행동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스톡옵션을 애플의 다른 직원들과 나누기를 거부하였지만, 워즈니액은 "The Woz Plan" 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스톡옵션의 상당한 양을 거의 공짜에 가까운 수준으로 직원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만큼 그는 어찌보면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습니다.

1981년 2월,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의 비행기를 몰고 산타크루즈 스카이파크에서 이륙하는 순간 사고를 당하고 맙니다.  사실 스티브 워즈니액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법적인 면허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비행기 조종에 익숙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사고는 자신이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사고로 스티브 워즈니액은 병원신세를 지게 되는데, 특히 특이한 형태의 기억상실증을 한동안 앓게 됩니다.  특히 비행을 했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고, 사고상황도 기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심지어는 자신이 병원에서 머물던 시기의 일도 한동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단기기억의 문제가 심각해서, 어딘가로 이동한 뒤에 자기가 왜 그곳에 왔는지를 자꾸 잊어버리고, 날짜 감각도 없어졌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스티브 워즈니액을 극진히 도와주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캔디스 클락(Candice Clark)이라고 하며 애플 창업시절 회계를 맡았던 여직원입니다.  그녀의 정성으로 애플 II 컴퓨터 게임과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티브 워즈니액은 결국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두 커플은 그해 연말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캔디스 클락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한 차례 결혼한 전력이 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결혼을 합니다.  워낙 성격이 한 여자와 오랫동안 같이 살기는 어려웠던 듯 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 애플을 떠나다.

비행기 사고 이후, 스티브 워즈니액은 바로 애플로 복귀하지 않고 UC 버클리로 돌아가서 못 끝낸 학업을 계속합니다.  이 때에도 그의 장난기는 여전해서, 학교에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대신 "Rocky Raccoon Clark" 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씁니다.  여기에서 Rocky 는 그가 기르던 개의 이름이고, Clark 은 부인의 과거 성입니다.  그는 결국 1986년 UC 버클리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합니다.  학교를 2년 정도 다니다가, 다시 애플에 1983년 복귀하면서 학교생활과 병행을 하기로 결심하는데, 애플로 돌아온 뒤에는 더 이상 자신이 엔지니어로서 애플에 별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스티브 잡스가 진행하면서 기존의 애플 II 팀과 라인업에 대한 지나친 공격과 애플 II와 함께 했던 많은 동료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애플에 대한 마음을 슬슬 접기 시작하였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1987년 2월 6일, 12년 동안의 애플에서의 상근 지위를 벗어 던집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는 애플의 파트타임 고용자로 남아있으며, 가장 중요한 주주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티브 잡스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자주 만나고 있으며, 후방에서 애플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괴짜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다.

애플을 떠난 스티브 워즈니액은 CL 9 이라는 벤처회사를 설립합니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로 유니버설 리모트 컨트롤러를 1987년에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그와 함께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2001년에는 Wheels of Zeus(WoZ) 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무선 GPS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2002년에는 Ripcord Networks 라는 통신관련 벤처회사의 이사회에 참여하는등 독특한 벤처회사들의 경영에 참여를 많이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교육과 관련한 사업에 기부합니다.  이를 통해, 이들 학교에 기술과 관련한 교육과정을 만들었고, 자신이 직접 가르치는 일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또한, Un.U.Son. (Unite Us In Song) 이라는 기구를 발족하여 2개의 축제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Stephen G. Wozniak Achievement Awards (흔히 Wozzie Award 라고 합니다) 를 만들어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비즈니스나 예술, 음악 등에 혁신을 일으킨 샌프란시스코 연안 지역 6개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에게 상을 주고 있습니다.  산호세에는 Children's Discovery Museum 이 있는데, 그는 이 박물관의 주된 기부자이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와도 같은 그의 기행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기억을 안겨주고는 했습니다.  테트리스와 같은 종류의 게임을 하면 언제나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으며, 하도 그런 경우가 많아서 가명을 많이 쓰기로도 유명했고, 얼마 전에는 "Dancing with Stars" 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멋진 춤실력을 뽐내기도 하였던 스티브 워즈니액, 그는 영원히 역대 최고의 엔지니어로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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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전설적 컴퓨터 모임, 홈브루 컴퓨터 클럽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이라는 전자제품 매니아들의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 클럽은 다양한 전자관련 부품들이나 회로, 그리고 정보를 교류도 하고, 컴퓨터 관련 장비를 직접 조립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해왔는데, 고든 프렌치(Gordon French)의 차고에서 1975년 첫 모임을 가지고 비정기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이때의 멤버들은 아직도 정기적인 미팅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이들의 수준은 정말 당대 최고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Altair 8800 컴퓨터가 나온 뒤에는 이와 유사한 컴퓨터를 조립하거나,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였으며, 가끔씩 발행하는 뉴스레터는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만드는 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라는 아이디어를 확산시키고 후에 애플 컴퓨터가 출범하게 되는데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였습니다.

이 컴퓨터 클럽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스티브 워즈니액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하드웨어 디자인, 조립실력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으로 클럽 멤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애플 컴퓨터, 드디어 깃발을 올리다.

이렇게 새로운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에 스티브 워즈니액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컴퓨터를 설계하고, 차고에서 컴퓨터를 조립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 로널드 웨인(Ronald Wayne)과 함께 3명이서 애플 컴퓨터의 깃발을 올립니다.  로널드 웨인은 아타리에서 스티브 잡스와 일을 했었고, 스티브 워즈니액의 기술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첫번째 애플 로고도 그리고, 애플-1 의 매뉴얼을 작성하는 작업과 각종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의 실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면서 애플의 주식 10%를 가졌는데, 2주 뒤에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고 $800에 자신의 주식을 매각하고 애플을 떠납니다. 웨인은 당시 상황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지만, 현재의 애플이라는 회사의 가치를 생각하면 아마도 마음이 많이 상할 것 같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스티브 잡스의 차고에서 만든 애플 I 퍼스널 컴퓨터 키트를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애플-1 은 Altair 8800과 비슷한 형태를 가졌는데, 내부에 확장 카드를 꽂을 수 있도록 하였고, $25 정도하였던 MOS 6502 라는 CPU를 가졌으며, 256 바이트의 ROM과 4K~8K 바이트 RAM을 가졌습니다.  디스플레이 컨트롤러는 40열에 24개의 행을 표시할 수 있었는데, 케이스나 파워, 키보드, 디스플레이 등도 없이 보드만 판매하는 형태였습니다.  사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애플 컴퓨터에 Altair 가 사용한 인텔의 8080 칩을 쓰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격이 무려 $179 달러나 하였기 때문에 포기를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모토롤라의 6800 을 고려하였지만, 역시 최고로 낮출 수 있는 가격이 $175 달러나 하였습니다.  결국 애플이 이름없는 회사의 기능도 많이 떨어지는 CPU인 6502를 채택한 것에는 월등히 싼 가격이 한 몫을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6502는 6800 CPU와 상당히 기능적으로 비슷하였고, 4KB RAM 에 올라가서 동작하는 BASIC 인터프리터를 만들어서 올리고 판매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 밸리의 여러 컴퓨터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애플 컴퓨터를 보여주고 주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은 $666.66 달러로 결정하였는데, 그 의미와 애플의 로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이 연재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제품을 주문한 곳은 바이트(Byte) 라는 가게를 새로 열려고 했던 폴 터렐(Paul Terrell) 이었습니다. $500 달러에 50대의 애플-1을 구매하기로 하였는데, 문제는 애플이 100대를 제작할 수 있는 부품을 구하기 위한 자본금이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팔았고, 스티브 워즈니액은 자신이 아끼던 HP의 최고급 공학용 전자계산기까지 팔았지만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는 특유의 영업력과 화술로 부품을 공급하는 가게들에게 신용으로 상당부분 부족한 부분을 메꾸었으며, 추가로 은행에서 $5,000 달러의 빚을 얻어서 부품을 구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뛰어난 기술자였지만, 사람들하고 협상을 하거나 계약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였고, 그냥 컴퓨터와 기술이 좋아서 그것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 비해, 스티브 잡스는 재능있는 사람과 가능성을 볼 줄 알았고, 처음보거나 잘 모르는 사람도 잘 설득할 수 있는 화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니아가 아닌, 일반인들을 위한 컴퓨터를 기획하다.

애플-1 은 200대 정도가 제작이 되었고, 약 10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대부분 판매가 됩니다.  애플-1 은 Altair 와 비교했을 때 그래도 사용하기 편리한 편이었지만, 조립이 간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BASIC을 이용하게 만들려면, ROM에 3K 정도 되는 16진수 바이트 코드를 입력해야 했는데, 적어도 20~30분 정도는 소요가 되는 작업이었고,  스티브 잡스는 이래서는 매니아들을 위한 컴퓨터는 될 수 있어도,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쓰는 자신들이 꿈꾸던 세상을 위한 컴퓨터로서의 자격은 없다는 판단을 합니다.

애플-1 을 추가로 생산하기 보다는 사용자가 사용하기 편리한 형태의 컴퓨터 기술들을 스티브 워즈니액과 스티브 잡스는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초기 애플-1 판매에 큰 도움을 준 바이트 샵의 폴 터렐이 소비자 입장에서 원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여러가지 기능개선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카세트 테이프에 저장과 불러들이기가 가능하도록 카세트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고, 마더보드에 추가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워즈니액이 만든 BASIC 언어를 담아서 팔기 시작했으며, 폴 터렐은 나무로 만든 박스에 마더보드를 넣어서 애플-1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애플 II 는 처음부터 예쁜 플라스틱 케이스와 키보드가 통합된 형태로 디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스티브 워즈니액이 스티브 잡스와 아타리에서 진행했던 벽돌깨기(Breakout) 프로그램을 동작시킬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먼저 컬러를 지원하기로 합니다.  이를 위해 라인을 그리고, 컬러를 바꾸는 등의 새로운 BASIC 언어들과 루틴들을 추가하고 동시에 소리를 내기 위한 사운드 작업과 본체에 스피커까지 달게 됩니다. 이처럼 애플 II는 게임을 좋아했고, 벽돌깨기 게임 프로젝트를 사랑했던 스티브 워즈니액에 의해 게임을 즐기기 쉬운 컴퓨터로 재탄생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향후 애플 II 용으로 수많은 컴퓨터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애플 II가 PC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추가적으로 RAM 의 증설에도 신경을 썼는데, RAM 의 크기에 따라 다양한 가격의 제품들이 나오게 됩니다.  4KB 부터 최대 48KB 까지 메모리를 설치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척 우스운 크기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커다란 메모리 용량이었습니다.  16KB 의 RAM이 1977년 당시 $500 달러에 육박했기 때문에, 가장 커다란 가격의 압박요소가 되었는데, 경쟁사였던 코모도어(Commodore)의 PET나 라디오쉑(Radio Shack) 의 TRS-80 의 경우에는 개방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향후 확장이 가능하도록 마더보드를 제작함으로써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애플 II 에 8개의 확장 슬롯을 설계해서 마더보드에 통합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경쟁제품들에 비해 강력한 차별점으로 부각되는데, 수많은 주변기기 제작회사들이 다양한 확장카드들을 만들면서 애플의 전성시기를 열었습니다.  사실 이때에도 스티브 잡스는 프린터와 모뎀을 위한 확장슬롯 2개 정도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며, 쓸데없이 제작비만 올리게 된다며 반대했지만 워즈니액은 HP 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성의 중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8개의 슬롯을 모두 지킬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저 역시 어렸을 때 애플 II 를 이용했는데, 애플의 개방형 아키텍처(Open Architecture)는 정말 강력한 생태계를 구성했고, 애플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개방형 철학에 대해 처음부터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애플 II가 그렇게 개방적인 컴퓨터가 되었던 것은 스티브 워즈니액의 영향력이 당시에는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액과는 달리 애플 II 가 정말 다른 컴퓨터들과는 차별화된 다른 모습을 가진 컴퓨터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스케치와 모형을 만들어 가면서, 기존의 각이 진 육면체 형태의 모습을 탈피한 새로운 컴퓨터의 모습을 디자인하는데 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자제품 매니아들처럼 부품을 구해서 조립을 하거나, 케이스가 있어도 상자같은 형태에 나사가 여기저기 보이는 등 예쁘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비대칭이면서도 날카로워 보이고, 기능성도 겸비한 케이스를 원했고, 나사가 하나도 겉에서 보이지 않는 케이스를 디자인하였습니다.  나사는 모두 바닥에 위치를 시켰고, 또한 누구나 쉽게 보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컴퓨터 케이스 뚜껑을 쉽게 열 수 있도록 하였으며, 확장슬롯에 카드를 새로 꼽는 작업이 간편한 디자인을 멋지게 해냅니다.  또한 키보드의 컬러와 파워, 냉각팬 등에도 대단한 신경을 썼습니다.  아타리에서 같이 일했넌 로드 홀트(Rod Holt)라는 아날로그 회로 전문가를 고영해서 경량의 파워와 냉각팬을 디자인하였는데, 그의 경량 파워 서플라이와 TV와의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만든 디자인은 애플 II의 경쟁력을 한층 높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애플 II 의 디자인은 정말 파격적인 것이었고, 이렇게 멋있어 보이는 외관역시 애플 II의 대성공에 한 몫하게 됩니다.


from Flickr by Marcin Wichary


이렇게 당대 최고의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액과 스티브 잡스가 각자 자신의 장점과 특기를 최대한 발휘하여 완성한 애플 II 컴퓨터는 1977년 4월 일반에 공개가 되면서, 아래와 같은 새로운 애플의 로고와 함께 전세계가 PC 열풍에 빠져들게 만들게 됩니다.




(... 후속편에 계속)


참고자료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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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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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뇌리에 박힌 한편의 강의

1972년 스티브 잡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틀랜드 오레곤에 위치한 리드대학(Reed College) 물리학과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것은 자신을 양자로 들이는 조건으로 내세웠던 대학교육을 위해서 양부모들이 모아둔 저축을 입학금과 등록금으로 한 학기 만에 다 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사실을 양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빌붙어 살면서 2년간 자신이 원하는 여러 수업을 들으러 다닙니다.  그 중에서 그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 강의가 있었으니, 바로 서체 디자인(calligraphy) 입니다.  후에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에서 연설을 할 때에 대학시절 수강한 서체 디자인 강의에서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10년 뒤 매킨토시에 구현하면서 전자출판 혁명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그 학문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대학에서 중퇴하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지정하거나 졸업에 필요한 강의를 위주로 들었을 것이며, 마음이 끌리는 강의를 듣지 못했을 것이기에 오늘날의 스티브 잡스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처럼 엔지니어라고 하기에는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디자인 서체 강의를 도강하면서 서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어갔으며, 그 서체 속에 숨어있는 역사와 세상의 일부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가 스탠포드에서 행한 짧은 14분 남짓되는 연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그의 인생의 열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꼭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한글자막이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여력이 되신다면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문자막이 있는 영상 임베딩합니다.

 


아타리 컴퓨터를 찾아간 기인

1974년 스티브 잡스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서 배짱좋게 당시 실리콘 밸리 최고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Atari)의 문을 두들깁니다.  놀란 부쉬넬이 창업한 아타리는 세계 최초의 상업용 게임으로도 유명한 퐁(Pong)의 대성공으로 세계적인 벤처기업으로 성장 중이었습니다.  이 게임에 매료된 스티브 잡스는 무작정 아타리의 직원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1974년 가을 아타리를 찾아간 스티브 잡스의 모습은 냄새나는 수염투성이에 장발을 한 더러운 히피(hippie)의 모습 그대로 였다고 전해집니다.  회사의 경비원은 무작정 회사를 찾아와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는 스티브 잡스를 보고, 부랑자가 찾아왔다면서 쫓아내려고 했지만, 당시 아타리의 경영진으로 일하고 있었고, 퐁의 게임 디자이너였던 앨런 알콘(Allan Alcorn)은 18세의 스티브 잡스가 HP에서 일했고, 생각보다 기술적으로 해박한 것을 알게 되어 시간 당 $5 달러에 동전을 넣는 당시의 게임기를 고치는 일에 투입할 요량으로 즉석에서 채용을 결정합니다.  

이 때가 1974년 5월로, 스티브 잡스는 잘 나가는 아타리의 40인의 직원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맨발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다른 직원들의 일에 간섭을 하고 이상한 말만 하고 다니는 스티브 잡스는 회사의 기피인물 1호가 되어 버립니다.  이에 앨런 알콘은 하는 수 없이 거의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에만 스티브 잡스가 나와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하는 일은 주로 아타리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놓은 디자인을 약간씩 변형하는 것이었는데, 회로를 일부 추가하거나, 다른 소리를 집어넣거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야간에 아타리라는 회사에서 스티브 잡스와 희희낙낙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괴짜 스티브 워즈니액입니다.  HP의 엔지니어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액 역시 아타리의 광팬으로, 심지어는 아타리의 퐁 게임을 자기 마음대로 디자인해서 만든 자신만의 퐁 게임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밤마다 스티브 워즈니액을 아타리 본사로 불러들인 스티브 잡스는 그의 실력을 동료들에게도 자랑을 하였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의 재능을 알아본 앨런 알콘은 그를 아타리에 스카웃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의 꿈인 전자계산기를 HP에서 만드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던 스티브 워즈니액은 그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를 따라 밤마다 아타리를 찾아서 여러가지 일을 같이 (아니 거의 스티브 워즈니액이 도맡아 해결했다고 합니다) 해결하였는데,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쉽게 해결을 하자 아타리의 창업자인 놀란 부쉬넬까지 스티브 잡스를 주목하게 됩니다.  6개월 정도 아타리에서 일을 하던 스티브 잡스는 대학시절부터 심취해 있던 인도로의 영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회사의 수뇌부들에게 자신에게 인도여행을 보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신참내기 직원의 황당한 요구에 당황한 앨런 알콘과 놀란 부쉬넬은 때마침 독일에서 터진 아타리의 게임기 문제를 독일에서 해결한다면 인도로의 여행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짐을 싸서 독일로 날아가서 단 2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리드 대학을 다닐 때부터 친구였고, 동시에 향후 애플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는 댄 콧케(Dan Kottke)와 함께 6개월간의 인도 여행을 시작합니다.  다행히 독일에서의 문제는 앨런 알콘이 예상했던 것과 동일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 앨런에게 고치는 법을 배웠던 스티브 잡스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수리를 마칩니다.

스티브 잡스의 인도여행은 그의 기대대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물질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하다는 결심을 한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로 복직을 하는데, 그 때에는 과거의 히피 스타일을 버리고 깨끗하게 삭발과 면도를 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앨런 알콘은 그를 다시 과거와 같이 밤에 일을 시키면서 동시에 친한 친구이자 스티브 잡스의 집에서 같이 살던 댄 콧케에게도 일을 맡깁니다.  


전설의 벽돌깨기 게임의 탄생

이 시기에 아타리는 회사의 여러 게임 프로젝트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때 아타리는 원가절감과 함께 벽돌깨기(Breakout) 게임의 디자인과 프로토타입에 대한 사내 아이디어를 수집하면서 하나의 TTL 칩(Transistor-Transistor Logic, 당시 아케이드 게임 대부분에 이용되던 칩)을 줄이는 아이디어에 돈을 겁니다.  보통 하나의 게임에 130~170개 정도의 칩이 들어갔는데, 아타리의 목표는 70~100개 정도로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지원을 해서 사내계약을 따내고, 벽돌깨기 게임의 스펙을 받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믿는 구석인 스티브 워즈니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일이었고, 아타리에서 약속받은 금액은 50개의 칩 이하로 설계하면 $700 달러, 40개 이하로 만들면 $1000 달러 였지만 스티브 워즈니액은 $700 달러의 반을 받고 보너스는 없는 것으로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훗날 스티브 워즈니액의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아타리에서는 4일로 시간을 제한한 적이 없었는데, 스티브 잡스가 임의로 설정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스티브 워즈니액은 4일 밤을 새면서 손으로 게임보드의 프로토타입을 거의 완성합니다.  워즈니액은 TTL 칩의 수를 46개까지 줄이는데 성공을 하였고, 이들의 성과에 감명을 받은 아타리의 경영진들은 스티브 잡스에게 $5,000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하였고,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액에게 원래 약속한 $350 달러만을 주고 오레곤으로 몇 달간의 휴가를 떠납니다.

그런데, 스티브 워즈니액의 디자인은 워낙 컴팩트하고 손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당시의 기계와 아타리의 엔지니어들로서는 양산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들다시피한 이 게임은 워즈니액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많이 수정해서 1976년에야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히트작 중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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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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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Flickr by Ballistik Coffee Boy


방과후 학교와 HP, 그리고 운명적 동지와의 만남

초등학교 시절 좋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학교공부에 재미를 붙인 스티브 잡스는 6학년 때에는 한 해를 월반을 해서 바로 중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현재의 애플의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Cup)와 홈스테드 고등학교(Homestead High School)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지만, 실리콘 밸리라는 환경은 그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가 10살 때 컴퓨터라는 것을 처음보게 되는데, 그것은 NASA가 실리콘 밸리에 만들어 놓은 연구센터에 놓였있던 터미널입니다.  터미널은 독자적으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컴퓨터라고 할 수 없겠지만, 어차피 유선으로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컴퓨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것을 보자 마자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는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이니 정말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안되나 봅니다.  

어린 학생이지만, 이미 히스키트를 통해 전자부품들과 조립, 그리고 기계들의 동작원리를 깨우친 그는 약간 떨어진 팔로알토에 위치한 HP(휴렛 패커드, Hewlett-Packard)에서 주최하는 방과후 강의에 짬이 나는대로 참여를 합니다.  특히 전자제품 조립에 취미가 많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있었는데, 심지어는 HP 창업자인 휴렛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수십 분간의 설득을 통해 원하는 부품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위대한 엔지니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스티브 워즈니액(Steve Wozniak) 입니다.  방과후 강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어린 학생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당시 HP와 같은 벤처회사라면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HP에서는 스티브 잡스에게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 방학인턴을 제의하고, 스티브 잡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방학 때 HP에서 실제로 일을 시작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액은 1950년 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 5살이 많습니다.  정말 희대의 독특한 괴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흔히 "워즈(Woz)"라는 애칭으로 불립니다.  현재도 세계적인 방위산업체로 이름이 높은 록히드 마틴 사에서 미사일을 개발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과 희한한 기계들을 만드는 것에 통달하였다고 합니다.  UC 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다가 평생동안 엔지니어로서 기계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휴학을 하고 HP에 취직을 합니다.  HP와 동네에서, 그리고 고등학교 선배로서 워낙 기계를 좋아하는 독특한 괴짜들이 둘이 만났으니 이들이 금방 친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입니다.  


희대의 장난꾸러기들 교황청을 노리다.

1971년 스티브 워즈니액은 'Blue Box' 라는 장치를 만듭니다.  전화회사 시스템의 특성을 분석한 뒤에, 전화선에 접속해서 돈 한푼 없이 전화를 걸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스티브 워즈니액은 워낙 장난기가 심한 사람이라 이 장치를 이용해서 여기저기 장난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고등학생 스티브 잡스는 직감적으로 돈이 된다는 판단을 하고 부품을 $40 달러 정도에 사서 스티브 워즈니액에게 더 만들어 달라고 한 뒤에 이를 스티브 워즈니액이 다니던 UC 버클리 학생들에게 $150 달러에 판매를 합니다.  

특히 판매를 하기 위해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장난전화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스티브 워즈니액이 당시의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를 흉내내면서 바티칸 시티에 전화를 해서 교황과 통화를 시도한 사건입니다.  교황이 잠을 자고 있었기에 통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렇게 강심장이었던 워즈니액이었지만 바티칸에서 이를 믿고 교황을 깨우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겁이 덜컥나서 먼저 끊었다고 합니다.  


from Flickr by ekai


똑똑한 천재소년과 컴퓨터의 운명적 조우

스티브 잡스에 비해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워낙 머리가 좋아서 한번 본 것은 모조리 외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백과사전이나 성경책 등을 통째로 외우고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11살이 되던 해에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합니다.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학교로 시애틀의 유명한 사립학교인데 동부의 명문대학의 등록금보다도 비싼 학비를 내야하는 학교이고 그만큼 시설도 좋았습니다.  학교의 교육방식도 굉장히 엄격했는데, 이런 환경에 빌 게이츠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항적인 행동이 많아서 결국에는 아동심리치료까지 받게 되는데, 다행히 심리치료사에게 마음의 안정을 얻고 학업에 복귀해서 잘 적응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에게서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으라는 말을 듣고서 엄청난 양의 독서가로 변신합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이 있었다면, 빌 게이츠에게는 심리치료사가 있었습니다.

1968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만남이 있게 됩니다.  레이크사이드 스쿨의 부모회에서 주최한 바자회의 수익금으로 컴퓨터 단말기를 들여놓게 되는데, GE사의 ASR-33 이라는 것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가 매우 드물었고, 시애틀에서는 레이크사이드가 최초로 컴퓨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는  PC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메인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컴퓨터가 외부에 있고, 이 컴퓨터에 연결이 가능한 터미널을 들여 놓은 것입니다.  이들 간의 연결은 전화선으로 되어 있었고,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추가로 내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시간 당 40달러나 되는 요금을 감당할 수 있었던 학교의 환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빌 게이츠는 폴 알렌이라는 친구와 함께 이 컴퓨터 단말 앞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됩니다.  컴퓨터 단말기 앞에서 선생님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닦게 된 그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과도한 컴퓨터 사용량으로 인해 초기에 확보한 예산이 단 몇 주만에 동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학교에서의 컴퓨터 사용이 금지되었는데, 이미 컴퓨터를 잘 다루게 된 이들에게는 컴퓨터를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실력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A young Bill Gates and Paul Allen by SplaTT.
from Flickr by SplaTT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몇 명의 친구들을 더 모아서 레이크사이드 프로그래밍 그룹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들은 메인프레임 컴퓨터 임대와 판매를 하는 인근 회사에 찾아가서 프로그래밍과 프로그램에서 버그를 찾는 일을 하는 대신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야간에 쓸 수 있는 허락을 얻어내어 컴퓨터를 마음대로 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 회사도 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폴 알렌의 아버지의 주선으로 시애틀의 명문대학인 워싱턴 주립대학교(UW,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워낙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비록 고등학생들이지만 일거리를 주는 곳들이 생겨납니다.  특히 인포메이션 서비스라는 회사를 통해 만든 급여관리 프로그램의 경우 빌 게이츠가 프로젝트 관리를 하면서 3개월간의 작업을 통해 1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사업에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정식으로 창업을 합니다.  이 때에는 아버지가 직접 도와주게 되는데, 회사의 이름은 "TRAF-O-DATA" 입니다.  외부에서 용역을 받은 일로도 돈을 벌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관리 프로그램의 제작을 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을 한 빌 게이츠는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으로 둘러싸여 지내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감합니다.


(후속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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