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리 페이지(좌)와 세르게이 브린(우)



넷스케이프와 야후!로 대별되는 인터넷 업계에서 닷컴 버블이 몰락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와중에도 새롭게 세상을 바꿀 기업은 인터넷 상에서 새롭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현재까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기업인 구글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매릴랜드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과 수학을 전공하며 수석으로 졸업을 한 세르게이 브린은 1993년 미국 NSF(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스탠포드 대학의 컴퓨터 과학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였다. 활달한 성격과 천재적인 두뇌로 많은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 리더로 자리잡고 있었던 세르게이 브린에게 1995년 미시건 대학의 또 다른 천재가 스탠포드 대학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래리 페이지이다.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서 리딩을 하는 외향적인 세르게이 브린에 비해, 래리 페이지는 내성적이고 조용하지만 매우 치열하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런 래리 페이지에게 세르게이 브린은 다른 친구들이나 선후배와는 다른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전공과목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철학과 문화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지식에 대한 토론을 날을 지새기 일쑤였다. 둘이서 격론을 시작하면, 주위의 동료들은 이들을 피해다닐 정도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었고, 이런 토론과 다툼을 지속하면서 두 사람은 어느 새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영혼의 동반자(soul-mate)로 느껴질 정도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많은 대학원들과 마찬가지로 스탠포드 대학에도 조를 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목들이 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래리 페이지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웹 사이트를 서버에 긁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세르게이 브린은 영화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알고리즘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래리 페이지의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예상보다 인터넷의 크기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1년이 넘게 진행되었다. 래리 페이지는 좋은 논문은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이라는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을 웹 페이지의 랭킹을 매기는 데 이용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특정 사이트가 다른 사이트로 연결되는 백링크(BackLinks)를 조사하여, 각각의 웹 페이지가 얼마나 많은 사이트에 링크되었는지를 알아내고, 이것을 기본으로 랭킹을 매기자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래리 페이지는 이 프로젝트를 웹 사이트의 링크를 역으로 추적한다는 의미의 백럽(BackRub)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대해 세르게이 브린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래리 페이지가 구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세르게이 브린이 도움을 주면서 프로젝트에 조금씩 관여를 하다보니, 어느 덧 둘이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본 테리 위노그래드 교수와 라지브 모트와니 교수 등의 지원으로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1996년부터는 스탠포드 대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금새 이 서비스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대학원의 학생으로서 많은 비용을 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효율적인 분산처리를 위해 CPU와 메인보드 등을 구해서 간단히 인터넷 서버를 구축하고, 운영체제도 무료인 리눅스를 선택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선택하였다. 초창기 백럽(BackRub) 검색엔진 기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랭크(PageRank) 알고리즘은 이들이 논문을 내기로 합의한 1998년 1월 이전까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BackRub 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이용하기로 결심하는데, 동료 중의 하나가 10의 100제곱을 뜻하는 구골(GooGol) 이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데이터 검색을 한다는 이미지를 주자는 제안을 하였는데, 아쉽게도 이 이름은 도메인이 선점된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 구글(Google)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구골보다 발음하기도 쉽고, 창조적인 느낌도 나는 이름이었기에 모두들 구글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였고, 서비스도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구글 서비스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도메인을 이용하여, http://google.stanford.edu 를 통해 접속하도록 하였는데, 하루 접속횟수가 1만 건을 넘어가면서 학교의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학교 네트워크 전체를 마비시키는 일까지 발생하자, 더 이상 학교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이 검색 서비스를 외부에 팔아넘기기로 합의하고 원매자를 찾아 나선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 따르면, 당시만 하더라도 100만 달러 정도면 구글 서비스를 팔려고 했었다고 한다. 당시 검색엔진 부분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졌던 알타비스타(altavista)와 야후도 접촉했지만, 이들이 개발한 서비스를 인수하려는 기업은 없었다. 그 밖에도 검색에 관심을 가질만한 많은 인터넷 기업들을 접촉했으나 번번히 거절의 쓴 맛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도교수인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들이 만든 서비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데이비드 체리턴은 이들의 창업을 도와주기로 하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데이비드 체리턴이 소개한 사람 중에서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은 한 눈에 이들의 서비스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아직 설립도 되지 않은 회사인 구글에게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즉석에서 끊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는 자신감을 불러넣어 주었고, 자신에게도 엄청난 부를 가져오게 만든다. 벡톨샤임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창업한 인물로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고, 구글에 투자할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장비회사인 시스코(Cisco)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뛰어난 직관은 검색이란 서비스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자처했던 야후나 알타비스타의 전문가들이나 경영진들보다 훨씬 나았다. 앤디의 10만 달러 수표를 받아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스탠포드 대학교 인근의 한 차고를 사무실로 빌려서 사업을 시작한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 구글은 이렇게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렇지만 10만 달러라는 돈은 사실 이들이 사업을 전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얼마 지나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이들에게는 또다른 투자자가 필요하였다. 이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역시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인 제프리 울만의 소개로 만난 엔젤투자자 람 슈리람(Ram Shriram)이다. 그는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해서 상당한 돈을 벌었고, 구글의 두 창업자를 만나 검색엔진을 시험해 보고난 뒤에 자신이 당시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인 야후, 인포시크, 익사이트 등에 매각을 해보겠다고 제안을 한다. 그들이 자신의 회사를 사지 않을 것이라고 두 명의 창업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람 슈리람에게 한 번 시도를 해보라고 맡기고 몇 개월을 기다렸다. 람 슈리람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인터넷 기업인 야후의 제리 양과 데이빗 파일로에게 소개를 하였는데, 이들은 구글의 검색엔진의 성능에 탄복을 하였지만 생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검색엔진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검색결과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검색엔진을 채용할 경우 야후 사이트에서 너무 빨리 벗어날 수 있어서 되려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여러 페이지를 보면서 사이트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야 페이지 뷰가 올라가게 되고, 이렇게 올라간 페이지 뷰가 사이트에 달린 광고단가를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틀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후의 두 창업자의 반응을 듣고서 람 슈리람은 되려 구글이라는 회사가 진정한 투자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 미팅에서 돌아온 슈리람은 구글의 회사설립 작업에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직접 25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여 앤디 벡톨샤임에 이은 두 번째 구글의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는 현재의 수익모델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커다란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구글의 세 번째 투자자는 앤디 벡톨샤임을 두 창업자에게 소개한 데이비드 체리턴 교수이다. 그리고, 네 번째 투자자는 바로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이다. 람 슈리람과 아마존의 일로 잘 알고 지내던 제프 베조스는 구글의 두 창업자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바로 소개를 해 달라고 해서 만난 뒤에 즉시 수표에 서명을 하고 구글의 투자자가 되었다. 제프 베조스에 따르면 구글의 두 창업자들의 고객에 초점을 둔 비전에 반했고, 이들의 비전을 믿고 주저없이 투자를 한 것이라고 한다. 제프 베조스에게도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거의 모든 IT의 역사, 정지훈저, 메디치미디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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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BusinessWeek.com



스타트업하면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의 IT기술 스타트업을 주로 생각하지만, 역시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의/식/주와 연관된 곳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가장 뜨거운 스타트업 중에 식물성 달걀인 비욘드에그(Beyond Egg)를 만드는 햄튼크릭푸드(Hampton Creek Foods)가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다. 다만, IT와 인터넷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먹는 음식과 관련한 스타트업이 뜨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자리잡은 햄튼크릭푸드는 하얀 실험실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서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보는 전형적인 실험실의 느낌이 강한 곳이다. 2014년 현재도 종업원이 30명에 불과한 스타트업이지만, 이들은 향후 전 세계의 식량 상황을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현재 만들고 있는 것은 식물을 이용해서 달걀과 똑같은 맛과 향기를 가진 제품이다. 햄튼크릭푸드의 음식 과학자들은 이 달걀을 만들기 위해 전 세계의 1500 종이 넘는 식물을 테스트했다고 한다. 이들은 단지 맛이 좋은 달걀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서, 식물의 에너지 효율성과 달걀을 생산하기 위한 닭을 기르고 이들이 배출하는 분뇨 등을 감안할 때 지구의 환경과 지속가능성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미래형 융합기업이라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태양광 발전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나 전기자동차,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을 정화하는 환경관련 기술 들만 지구의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기업이 아닌 것이다. 


햄튼크릭푸드는 빌 게이츠와 토니 블레어의 지원을 받고 있기도 한데, 이들은 비욘드에그를 이용해서 만든 쿠키나 머핀을 실제 달걀을 이용해서 만든 것과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비욘드에그의 주성분은 콩과 해바라기씨앗의 기름, 캐놀라, 자연산 검 등이 적절하게 배합된 것이라고 하는데, 건강 측면에서나 비용측면에서 모두 실제 달걀보다 월등히 우위에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미국에서 제품을 출시해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30여개 국에 수출을 시작했고, 심지어는 정말 불량한 가짜 달걀로 유명(?)한 중국에도 2014년 부터는 수출이 되기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인 식품기업의 달걀 대체제로 원료공급도 시작했다고 하니, 정말로 전도유망한 스타트업이 아닌가 싶다. 아래 임베딩한 영상은 최근 채널 IT를 통해 방영된 햄튼크릭푸드에 대한 영상이다.





현재 미국의 벤처캐피탈들은 햄튼크릭푸드와 같이 달걀이나 닭, 치즈, 소금, 캔디, 육류 등과 같이 새로운 기술로 저렴하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음식기술 스타트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벤처캐피탈인 KPCB와 코슬라 벤처스는 10개가 넘는 기업에 투자하였다. 


로스엔젤레스에 2년된 스타트업인 비욘드미트(Beyond Meat)는 미주리 대학의 교수들이 설립한 곳으로 대두(soybean)를 이용해서 닭고기살(chicken strip)을 만들고 있는데, 이들이 제조한 닭고기살은 실제 닭고기살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식감, 맛, 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가능성을 높이 산 KPCB와 트위터의 두 창업자가 설립한 오비어스(Obvious Corp)는 이 제품의 상용화를 위해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였고, 이들의 제품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 아울렛을 시작으로 실제 판매에 들어갔다.


현재 햄튼크릭푸드나 비욘드미트와 같이 FDA의 승인을 받은 제품을 내놓고, 매출을 본격적으로 내는 단계에 들어간 곳은 아직 거의 없지만 전도유망한 곳들은 많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아마도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이 거액을 투자한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대학 연구팀의 스타트업일 것이다. 이들은 2013년 8월 5일 영국에서 인조 쇠고기 시식회까지 열었다. 마크 포스트 교수가 이끄는 이 연구팀은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데, 현재 비용적인 측면에서는 요리에 사용된 햄버거 패티 하나를 만드는 데 25만파운드나 들어갔기 때문에 낙제점에 가깝지만 맛과 식감은 실제 햄버거 패티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수준까지 발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른 소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배양하고 증식해서 근육섬유를 만들고, 이를 겹겹이 쌓은 뒤에, 색소 단백질을 주입해서 실제 쇠고기처럼 만들었다. 나사에서는 3D 프린터를 이용하여 식용잉크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일반 가정이나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등에서 이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육류나 음식물에 대해 새로운 기술개발을 하는 스타트업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이런 기술을 세계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환경문제에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으로 육류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지적하는 연구는 그동안 많았고,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에는 2000년 대비 육류 소비가 70%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좋아지는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 국가의 국민들에게 육류소비를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건강하고 환경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수하면서도 맛과 향 등을 모두 잡을 수 있는 새로운 음식기술 스타트업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스타트업 테마로서 자리를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자료:


Venture Capital Sees Promise in Lab-Created Eco-F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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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Marissa Mayer from Flickr by mikeabundo


IT 삼국지, 오늘은 구글 초창기 인재들이 몰려들던 시기를 배경으로 구글의 오늘날을 이끌어 낸 사람들을 몇 명과 초기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금발의 컴퓨터 우등생, 그리고 구글을 사랑한 무료봉사 학생

1999년초 팔로알토 근처로 구글이 이사를 한 이후, 탁구대와 마사지, 그리고 다양한 간식과 음료수들로 가득한 구글의 사무실에 금발의 미녀가 한명 찾아옵니다.  바로 현재 구글의 검색과 UX 부분의 부사장을 맡고 있는 마리사 마이어(Marissa Mayer) 입니다.  그녀는 당시 스탠포드의 컴퓨터과학과 석사 졸업반으로 구글의 엄격한 인터뷰를 통과하고 초기 구글의 20명의 직원들 중에서 첫번째 여성이 됩니다.  

마리사 마이어는 뛰어난 컴퓨터 과학자이자, 동시에 여성 특유의 꼼꼼함과 철저한 관리능력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구글의 가장 중요한 검색과 관련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미모로 구글의 창업자 중의 한 명인 래리 페이지와 사랑에 빠져서 3년 정도 공개적으로 데이트도 하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현재는 헤어져서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구글 내에서 가장 인정받고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며, 특히 2명의 창업자와 CEO 인 에릭 슈미츠를 제외하면 구글 내에서 가장 주요 언론매체에 많이 노출되고, 커버 스토리에도 오르는 등 스타성까지 갖춘 인물입니다.

엔지니어들은 차고 넘쳤지만, 기술위주의 문화를 가진 구글이라는 회사에게 있어 경영부분은 정말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습니다.  초기 엔젤 투자자인 람 슈리람이 가끔씩 챙겨주기는 했지만, 두 명의 창업자들은 사업계획서가 뭔지도 모를 정도로 경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때, 스탠포드 대학에서 생물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살라르 카만가르(Salar Kamangar)가 무료로 구글에 봉사하겠다며 찾아옵니다.  람 슈리람은 카만가르에게 사업계획 초안을 만들도록 지도를 하였는데, 그는 특히 "다른 회사들과 구글의 검색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멋지게 정리를 해내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신임을 얻게 되고, 결국 구글의 정식직원이 됩니다.  살라르 카만가르는 현재도 구글에서 제품관리(Product Management)의 부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경험있는 영업 부사장의 영입, 넷스케이프와의 협력

비록 살라르 카만가르가 사업계획은 작성했지만, 그도 역시나 학생이었고, 구글이라는 회사의 직원들은 너무나 어린 풋내기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람 슈리람은 구글에 경험이 있는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영업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행히 1998년 말 넷스케이프가 AOL에 매각되면서 넷스케이프에 있던 유능한 인재들 중에서 회사를 옮기려고 생각하던 오미드 코르데스타니(Omid Kordestani)가 람 슈리람의 레이다에 걸립니다.  오미드 코르데스타니는 넷스케이프의 사업개발 담당 부사장을 지냈고, 인터넷 사업의 영업에도 경험이 많았기에 구글의 영업담당 부사장으로서 적임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람 슈리람은 그를 두 명의 창업자에게 소개하지만 구글의 엔지니어를 우대하고, 경영자들을 우습게 보던 당시의 구글의 문화에서 오미드 코르데스타니는 면접을 치르면서 정말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5시간이 넘는 면접을 통해 이미 지칠대로 지치고, 2주가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에 오미드 코르데스타니는 구글의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무렵 구글에서 연락이 옵니다.  거기에 회사의 스톡옵션도 2%나 받으면서, 이후까지를 모두 감안하더라도 2명의 창업자와 CEO가 되는 에릭 슈미트를 제외하면 구글 전직원 중에서 가장 많은 주식을 가지게 되면서 구글의 IPO와 함께 억만장자 대열에 오릅니다.  그의 합류와 함께 구글의 형편없던 사업계획서는 제대로된 형태를 갖추게 되며, 이후 검색광고의 수익모델화가 진행되면서 수많은 광고주들을 유치하는 활약을 하면서 구글의 기술을 실제 수익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는, 현재 구글 창업자들의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아직도 구글의 경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1999년 6월,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KPCB와 세콰이어 캐피탈의 투자유치 소식과 함께, 구글은 또 하나의 중요한 계약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어렵게 영입한 넷스케이프 출신의 오미드 코르데스타니가 당시 최고의 웹 브라우저의 하나였던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의 기본 검색엔진으로 구글이 탑재될 수 있도록 AOL과 계약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구글은 하루 3백만 건이 넘는 검색 건수를 기록하며,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면서 급속도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요리사 경진대회를 통한 전속 요리사의 채용

자금도 넉넉하고, 뛰어난 인재들을 채용하다보니 더 이상 팔로알토의 사무실은 비좁아서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미래를 감안하여 팔로알토를 떠나 마운틴 뷰(Mountain View)의 대로변에 있는 큰 건물을 하나 임대합니다.  문제는 번화가인 팔로알토의 사무실과는 달리, 마운틴 뷰의 새로운 캠퍼스에는 근처에 식당이 없어서 직원들이 차를 타고 식사를 하러 나가거나, 피자 등을 배달시켜 먹는 부실한 식사환경 이었습니다.

이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회사 내에 요리를 할 수 있는 전속 요리사를 두고, 직원들에게 최상의 요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곧바로 요리사 오디션 주간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입사를 희망하는 요리사들을 불러서 매일 몇 명의 요리사들이 자신들이 준비한 요리들로 직원들의 평가를 받고, 이를 바탕으로 전속 요리사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발된 구글의 1호 요리사는 바로 찰리 에이어스(Charlie Ayers) 입니다.  구글에 입사하기 이전 힐튼 호텔에서 요리를 배우고, 요리를 전공으로 대학을 다닌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유명한 식당이었던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의 주방장이기도 하였던 그는, 구글의 매력에 빠져 어찌보면 모험일수도 있는 도전에 나서서 결국 커다란 성공을 이룹니다.  2006년 구글을 떠나기까지, 찰리 에이어스는 5명의 주방장과 150명의 요리사들을 지휘하는데, 구글 캠퍼스에 산재한 10개의 카페에서 매일 4,000 식이 넘는 음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독립하여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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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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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 페이지(좌)와 세르게이 브린(우) from kasun04.wordpress.com


IT 삼국지, 오늘은 드디어 두 명의 천재가 만나는 이야기 입니다.  


두 천재의 조우

매릴랜드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과 수학을 전공하며 수석으로 졸업을 한 세르게이 브린은 1993년 미국 NSF(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스탠포드 대학의 컴퓨터 과학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였습니다.  활달한 성격과 천재적인 두뇌로 많은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 리더로 자리잡고 있었던 세르게이 브린에게 1995년 미시건 대학의 또 다른 천재가 스탠포드 대학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레리 페이지 입니다.  나이는 동갑나기이지만, 대학원에서는 세르게이 브린이 선배인 셈입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래리 페이지를 만나고는 정말 마음에 들지않는 라이벌이 나타났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서 리딩을 하는 외향적인 세르게이 브린에 비해, 래리 페이지는 내성적이고 조용하지만 매우 치열하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런 래리 페이지에게 세르게이 브린은 다른 친구들이나 선후배와는 다른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전공과목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철학과 문화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지식에 대한 토론을 날을 지새기 일쑤 였습니다.  둘이서 격론을 시작하면, 주위의 동료들은 이들을 피해다닐 정도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었고, 이런 토론과 다툼을 지속하면서 두 사람은 어느 새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영혼의 동반자(soul-mate)로 느껴질 정도의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래리 페이지의 프로젝트에 세르게이 브린이 생명을 불어넣다.

많은 대학원들과 마찬가지로 스탠포드 대학에도 조를 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는데,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웹 사이트를 서버에 긁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인터넷의 크기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1년이 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르게이 브린은 영화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것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좋은 논문은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이라는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을 웹 페이지의 랭킹을 매기는 데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특정 사이트가 다른 사이트로 연결되는 백링크(BackLinks)를 조사하여, 각각의 웹 페이지가 얼마나 많은 사이트에 링크되었는지를 알아내고, 이것을 기본으로 랭킹을 매기자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래리 페이지는 이 프로젝트를 웹 사이트의 링크를 역으로 추적한다는 의미의 백럽(BackRub)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대해 세르게이 브린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래리 페이지가 구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세르게이 브린이 도움을 주면서 프로젝트에 조금씩 관여를 하다가, 어느 덧 둘이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훌륭했지만, 기본적으로 전세계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웹 페이지들을 찾아내서 이를 끌고 들어오는 소프트웨어 로봇(크롤러, crawler 라고 합니다)과 이를 관리하는 서버는 시간이 지나면서 인터넷의 크기가 광범위해지자, 스탠포드 대학의 컴퓨터 시스템과 네트워크 자원을 엄청나게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본 테리 위노그래드 교수와 라지브 모트와니 교수 등의 지원으로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1996년부터 스탠포드 대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제공된 이들의 검색 서비스는 학교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원의 학생으로서 많은 비용을 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효율적인 분산처리를 위해 CPU와 메인보드 등을 구해서 간단히 인터넷 서버를 구축하고, 운영체제도 무료인 리눅스를 선택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선택하였는데 어찌보면 이런 환경이 오늘날의 구글 데이터 센터를 있게 만든 기술력 축적을 유도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넉넉하고 값비싼 서버와 소프트웨어를 마음껏 사용해서 서비스를 구축했더라면 현재의 구글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글 초창기 서버, 학교에서 남는 CPU와 보드를 주워다가 케이스는 레고로 조립했다 


구글의 탄생, 전세계를 담아라 ...

초창기 백럽(BackRub) 검색엔진 기술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알고리즘이었기에 페이지랭크(PageRank)로 명명된 이 알고리즘은 이들이 논문을 내기로 합의한 1998년 1월 이전까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BackRub 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이용하기로 결심하는데, 동료 중의 하나가 10의 100제곱을 뜻하는 구골(GooGol) 이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데이터 검색을 한다는 이미지를 주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아쉽게도 도메인이 선점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대신 이용한 도메인이 구글(Google)입니다.  구골보다 발음하기도 쉽고, 창조적인 느낌도 나는 이름이었기에 모두들 구글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였고, 서비스는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도메인을 이용하여, http://google.stanford.edu 에 접속하도록 하였는데, 하루 접속횟수가 1만 건을 넘어가면서 학교의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학교 네트워크 전체를 마비시키는 일까지 발생하자, 더 이상 학교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이 검색 서비스를 외부에 팔아넘기기로 합의하고 원매자를 찾아 나섭니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 따르면, 당시만 하더라도 100만 달러 정도면 구글 서비스를 팔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당시 검색엔진 부분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졌던 알타비스타(altavista)와 야후도 접촉했지만, 이들이 개발한 서비스를 인수하려는 기업은 없었습니다.  그 밖에도 검색에 관심을 가질만한 많은 인터넷 기업들을 접촉했으나 번번히 거절의 쓴 맛을 보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도교수인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들이 만든 서비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데이비드 체리턴은 이들의 창업을 도와주기로 하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눈에 가치를 알아본 엔젤 투자자와의 만남

데이비드 체리턴이 소개한 사람 중에서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은 한 눈에 이들의 서비스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아직 설립도 되지 않은 회사인 구글에게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즉석에서 끊어 줍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는 자신감을 불러넣어 주었고, 자신에게도 엄청난 부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벡톨샤임은 지난 IT 삼국지에서 소개된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창업한 인물로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고, 구글에 투자할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장비회사인 시스코(Cisco)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직관은 검색이란 서비스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자처했던 야후나 알타비스타의 전문가들이나 경영진들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세상을 바꿀 힘을 그는 느꼈던 것입니다.

앤디의 10만 달러 수표를 받아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스탠포드 대학교 인근의 한 차고를 사무실로 빌려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 구글은 이렇게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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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동갑나기 창업자, 자유의 수호자 세르게이 브린

구글의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1973년생 동갑나기 입니다.  1977년 애플 II 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1973년 구소련 연방 시절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러시아계이지만 부모들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도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1979년 소련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세르게이 브린의 아버지인 마이클 브린은 원래 우주비행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유태인이라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당시 소련에서 가장 중시되던 물리학과에는 유태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마이클 브린은 수학을 전공하였는데, 대학시절 전과목 A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세르게이 브린의 어머니인 유진 브린 역시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훗날 NASA 에서 우주의 기후환경을 시뮬레이션하게 되는 뛰어난 과학자였습니다.

이런 차별 속에 태어난 세르게이 브린이 어렸을 때 살았던 곳은 8평 남짓한 매우 작은 아파트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까지 4식구가 살았는데, 1977년 세르게이의 아버지가 폴란드에서 열린 수학 학회에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소련을 떠나자고 선언을 합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는 사실 모스크바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보다 아들인 세르게이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소련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78년 9월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은 미국으로 떠나기 위한 비자를 신청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두 부부는 즉각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8개월간 세르게이 가족은 아무런 고정수입이 없이 임시로 생기는 일을 아무거나 하면서 끼니를 해결하였습니다.  만약 이들이 신청한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자체가 불투명한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1979년 5월 세르게이 가족은 이민을 허가하는 비자를 손에 받아들고 모스크바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세르게이 브린은 당시 겨우 5~6살에 불과했지만, 그 때의 어려움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든 부모님들의 노력에 대해 매우 감사한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세르게이 가족은 소련을 떠나 미국의 매릴랜드 주에 정착을 하는데, 워낙 똑똑했던 사람들이라 초기에는 낯선 땅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지만 결국 아버지는 매릴랜드 주립대학교의 수학교수가 되고, 그의 어머니는 미국 최고의 연구기관인 NASA 의 핵심 연구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워낙 수학을 비롯한 과학연산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했었기 때문에, 세르게이 브린은 9살 때부터 가정용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의 부모님은 당시 비교적 싼 가격에 성능이 뛰어났던 코모도어 64 기종을 구입하였는데(이전 포스트 참고하세요), 세르게이는 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각종 게임과 수학공부를 하면서 컴퓨터에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수학을 너무 좋아했던 그에게, 1990년 그의 17번째 생일날 그의 아버지는 뜻밖의 선물을 가져옵니다.  바로 친구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2주간 다녀올 수 있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세르게이가 조국이었던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부모들의 의지는 세르게이로 하여금 러시아어를 잊지 않고 계속 말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2주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세르게이에게 어렸을 때의 소련연방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적인 모습을 다시 한번 되살리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러시아의 경찰차에 돌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자유와 개방 등과 관련한 강한 열망은 오늘날까지도 구글의 정신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10년 4월 10일 구글은 중국에서 철수를 합니다.  이 철수 결정은 거의 세르게이 브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실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CEO인 에릭 슈미트는 상당히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하였지만, 원칙에 입각한 세르게이 브린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구글이라는 회사의 모토와 철학이 단순히 거짓으로 치부하고 비즈니스적인 부분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세르게이 브린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 집안에서 태어난 컴퓨터 천재, 래리 페이지

래리 페이지는 미시건 주 이스트 랜싱에서 1973년에 태어났습니다.  래리 페이지 역시 유태인으로, 그의 부모님은 모두 미시건 주립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언제나 컴퓨터와 각종 컴퓨터 과학과 관련한 잡지들이 정신없이 널려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래리 페이지는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숙제를 워드 프로세서로 작업해서 제출하는 유일한 학생으로 주목을 받았고, 언제나 무엇인가를 만들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장점과 좋아하는 것을 잘 알았기에 12살 때에 이미 자신이 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컴퓨터를 좋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자신들의 뒤를 이어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여, 래리 페이지는 미시건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을 하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스탠포드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면서 운명과도 같이 세르게이 브린과 만나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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