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erox PARC의 Alto from mac-history.net



스튜어트 브랜드가 대항문화와 사이버네틱스를 연결시키며,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철학을 잘 나타냈지만, 그가 실제로 미국 전역에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최고의 대중문화 잡지로 명성을 떨친 <롤링스톤(Rolling Stone)>지에 ‘스페이스워(Space War)’라는 분석 기사를 기고하면서 부터다.

스페이스워는 스튜어트 브랜드가 실리콘밸리의 중심이었던 팔로 알토(Palo Alto)에 위치한 스탠스포드 대학교의 인공지능 연구소와 제록스 파크 연구소(Xerox PARC, Palo Alto Research Center)를 방문했을 때 그 곳의 연구자들이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스페이스워라는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목격한 것에 대한 감상을 쓴 글이다. 이전까지 컴퓨터라고 하면 중앙집중 제어방식을 통해 동작하는 거대한 빅 브라더를 연상시켰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된 각자의 컴퓨터에서 개인의 창조성을 자극하는 협력형 게임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구경한 제록스 파크 연구소의 스페이스워는 실제로 과거 PC 통신 시절에 텍스트 명령어로 게임을 했던 머드(MUD, Multi-User Dungeon) 게임과 유사한 형태의 게임이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협업과 경쟁을 하면서 컴퓨터를 도구로 활용하는 모습에서 그는 미래의 사회상을 읽은 것이다.


혁신의 중심지, 제록스 파크 연구소

제록스 파크는 Palo Alto Research Center의 약자로, 1970년에 설립되었다. 2002년부터는 독립된 리서치 비즈니스 회사로 PARC라는 이름으로 거듭난다. PARC는 30개가 넘는 회사들의 창업에 관여했고, 수많은 혁신을 창조했는데, 레이저 프린팅, 분산 컴퓨팅, 네트워크의 표준인 이더넷(Ethernet), 애플과 윈도우를 있게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 Graphic User Interface),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그리고 유비퀴토스 컴퓨팅 등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위에서 언급한 기술 하나하나가 현대의 정보통신 및 컴퓨팅 환경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드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엄청난 기술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회사였던 제록스는 레이저 프린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사업화에 거의 성공하지 못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PARC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의 중심이 되고,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팔로알토(Palo Alto)에 자리를 잡았는데, 제록스의 본사는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본사에서 PARC 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연구에 대해서는 관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정말 마음껏 수행하였지만, 본사와의 엄청난 거리는 PARC 연구소에서 나온 수 많은 연구자산들이 제때에 상업화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되려 실리콘 밸리 주변에 있는 기업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제록스 파크 연구소의 인연은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las Carl Engelbar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68년 엥겔바트가 실시한 컴퓨터 시스템 데모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엥겔바트는 스탠포드 연구소의 증강연구센터(ARC, Augmentation Research Center)에서 인간과 컴퓨터의 협동방식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마우스의 발명자로도 유명하다. 엥겔바트는 컴퓨터와 대화를 주고받거나 컴퓨터를 이용해서 여러 사람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상해 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도구로 마우스와 같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도구들의 첫 선을 보였던 것이다. 엥겔바트의 데모는 또한 미디어를 이용한 현대식 프리젠테이션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고, 오늘날 가장 각광받고 있는 디지털 학문분야인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라는 학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엥겔바트는 청중 앞에 거대한 스크린을 설치하고 컴퓨터로 정보를 투사시켜 발표하는 방식을 처음 선보였는데, 스튜어트 브랜드는 이 데모를 총지휘하였다. 앞서서도 언급했듯이, 스튜어트 브랜드는 대항문화의 중심인물이었던 작가인 켄 키지와 함께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여 LSD 페스티벌을 기획한 경험을 엥겔바트의 데모에 십분 발휘하였다. 


스튜어트 브랜드의  ‘스페이스워’ 기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LSD를 이용한 '인식의 확장'이라는 경험이 가까운 미래에 컴퓨터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에 이식되면서 새롭게 부상할 것으로 예측한 것이기 때문이다. 1970년부터 LSD는 금지약물로 강력한 규제를 받았지만, 이후에도 그 잔재는 많이 남았는데, 특히 일시적이고 강렬한 환각적 도취상태나 체험 등을 강렬한 예술로 표현하는 사이키델릭 문화는 당시의 문화적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 스튜어트 브랜드가 중시했던 사이버네틱스는 의미는 다르지만, 음운의 유사성도 있고, 스튜어트 브랜드가 잘 활용하였던 교차적인 의미합성을 유도함으로써 '사이버(cyber)'라는 접두어가 대유행을 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 때부터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모든 대상을 가리킬 때 '사이버(cyber)'라는 접두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스튜어트 브랜드는 이와 같이 사이버 문화에 대항문화의 혼을 심어넣은 중요한 인물이다. 

사이버라는 주제를 이야기할 때에는 '사이보그(cyborg)'에 대해서도 빼놓으면 안된다. 사이보그는 '사이버네틱 생명체(cybernetic organism)'의 약자로 생물과 인공적인(전자, 기계, 로봇 등) 부품이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1960년 만프레드 클라이네스(Manfred Clynes)와 네이선 클라인(Nathan S. Kline)이 우주에서 혼자서 제어할 수 있는 인간-기계 시스템(human-machine system)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면서 처음 언급되었다. 사이보그는 SF소설과 영화에도 많이 등장하며,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많은 성찰의 씨앗을 던졌는데, 인간의 본질과 자유의지, 그리고 감성 등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

(다음 회에 계속 ...)


참고자료:


웹소셜 아메리카, 이케다 준이치, 메디치미디어, 2012

거의 모든 IT의 역사, 정지훈, 메디치미디어, 2010

Spacewar, Stewart Brand, Rolling Stone, Dec 7 1972

Douglas Engelbart,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Cyborg,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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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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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역사를 기술하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 범위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특히나 인터넷과 웹이라는 기술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대철학과 사회과학 및 정치와 법제도, 그리고 글로벌 역학관계에 이르는 무수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현재를 이룬 녀석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유럽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전반을 조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아마도 이 연재를 언제 끝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일단 시작시점은 2차 세계대전 무렵으로 삼고자 한다. 물론, 연재를 진행하다 보면, 그 이전에 있었던 미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철학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연대별 접근을 취하는 이 연재에서는 지류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시작점과는 관계없이 자유롭게 언급하고자 한다.


노버트 위너와 존 폰 노이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글자 그대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집중하게 된다. 대학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대학의 연구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술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MIT의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는 계산기 연구로 전쟁에 협력하였다.

노버트 위너는 19세가 되기도 전에 형식논리학에서 대수학의 상이한 형식을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 위너는 러시아 태생으로 40개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 천재였다고 하니 천재 집안의 피는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노버트 위너는 청소년 시절에 전공인 수학 외에도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독일의 괴팅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이론물리학의 기초도 탄탄하게 닦았다고 한다. 이런 학문적인 노력을 서로 연결시켜 탄생시킨 개념이 사이버네틱스이다. 위너는 MIT에서 정년보장을 받았지만, 전 세계 유수의 대학의 객원교수직을 겸직했는데, 중국, 멕시코, 인도, 소련으로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가르쳤고, 죽음도 1964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맞이한 어찌보면 진정한 세계인이었다. 

위너는 그의 제자 클로드 섀넌(Claude Elwood Shannon)과 함께 전자 스위치 회로에서 통신으로 전달된 '정보' 를 측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1942 년, 이 정보처리의 단위를 'binary digit' 의 약어인 '비트(bit)' 로 확정하였다. 이들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원자인 비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비트를 통해 디지털의 시대를 연 노버트 위너는 1948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책을 출간하여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열었다. 사이버네틱스의 부제 '동물과 기계에서 제어와 통신 (Control and Communication in the Animal and the Machine)'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정보이론을 통해 오늘날의 컴퓨터과학, 제어계측공학, 전자공학, 네트워크 통신 등의 공학은 물론 신경생리학과 경제학, 심리학 영역까지 다룬 대단한 통섭적인 개념이다. 

1940년 8 월, 영국 주변의 전선에서 독일 공군이 우위를 점해가자 MIT 에서 일하고 있던 위너는 연합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전쟁연구에 돌입했다. 노버트 위너가 만든 래드랩[Rad Lab, Radiation Laboratory]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탄도제어 연구에 참여하여 오늘날의 정보공학, 통신공학, 제어공학의 기초를 구축했다. 

래드랩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과 인터넷 역사에 있어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또 하나의 연구기관은 세계경제학의 양대산맥 중 하나라고도 불려지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이다. 이 연구소는 평생동안 아무런 의무와 책임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꿈의 연구소인데, 그 첫 번째 종신교수로 임명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과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다. 일반 대중에게는 아인슈타인이 훨씬 유명하겠지만, 인터넷 역사에서는 폰 노이만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존 폰 노이만은 헝가리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수학연구 실적을 내고 있었다. 그는 1930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 자격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1944년 오스카르 모르겐슈타인과 ‘게임과 경제행동 이론(Theory of Games and Economic Behavior)’을 저술해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이론으로 취급되는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창시하기도 하였다. 게임이론은 원래 체스와 같은 게임에 숨어 있는 수학적 원리를 풀기 위해 고안되었다. 시장에서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교환 행위를 일종의 게임으로 보고, 교환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과 성립조건, 교환행위가 안정화되어 장기적 거래나 시장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등을 알아낼 수 있다면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노이만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개개인의 실제적 거래에 주목하고, 구체적인 교환행위를 산술적으로 집계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컴퓨터를 통한 디지털 방식을 도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노이만의 연구는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원자폭탄의 개발과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컴퓨터 개발의 역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게 되는데, 원자폭탄과 관련된 다양한 모의실험을 위해서는 빠른 속도로 계산할 수 있는 계산기가 필요했다. 이런 용도로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은 노이만의 자문을 받아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제작했는데, 위너의 정보이론을 이용해서 비트로 논리연산을 하려고 하드웨어 스위치를 연결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이 컴퓨터에 다른 일을 시키려면 전기회로를 모두 바꿔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이만이 제안한 것이 "프로그램을 내장한 컴퓨터" 방식이다. 중앙처리장치(CPU) 옆에 기억장치(memory)를 붙여서,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억장치에 저장해 놓았다가 사람이 실행시키는 명령에 따라 작업을 차례로 불러내어 처리하는 것으로 이 개념의 본질적인 아이디어는 영국의 앨런 튜링이 먼저 생각했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노이만이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어쨌든 노이만이 제시한 프로그램 내장방식과 컴퓨터의 구성요소는 오늘날까지도 모든 컴퓨터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래서, 현재 존재하는 스마트폰을 포함한 대부분의 컴퓨터를 '폰 노이만 방식 컴퓨터'라고도 한다.

1949년 영국 켐브리지 대학에서는 노이만의 개념을 도입한 에드삭(EDSAC)" 컴퓨터를 개발함으로써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방식 컴퓨터가 탄생했다. 1945년 8월, 이론적인 원자폭탄의 위력이 일본에서 대참사로 나타나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지휘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지지 않는다"며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찾아가 핵무기 폐기를 주장하고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했고, 원자폭탄 개발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레오 질라드는 아예 전공을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노이만은 끝까지 핵폭탄 개발의 정당성을 옹호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이 강력한 무장을 해야 한다"며 "소련에 수소폭탄을 투하해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을 사전에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는 매우 역설적인 2가지 상황이 나타난다. 노이만은 1957년 골수암으로 숨을 거뒀는데, 그가 수소폭탄 실험에 직접 참관한 것이 암에 걸린 원인으로 알려졌다. 또한, 그를 세계 최고의 학자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게임이론으로 생각해도 미국과 소련의 핵개발 문제에 있어 가장 좋은 선택은 두 나라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은 컴퓨터와 인터넷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사건이다. 첫 편에서 소개한 노버트 위너와 존 폰 노이만은 그 역사의 시발점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오늘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최고의 통섭적인 학자이자 천재였고, 다방면의 학문에 능했지만, 두 사람의 접근방법은 상당히 달랐다. 노버트 위너가 종래의 객관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영역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후 윤리학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비과학적인 개념, 그리고 네트워크와 통신 등에 의한 연결을 중시한 사이버네틱스를 구상한 것에 비해, 노이만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디지털의 기술을 연결시켜 더욱 세련되고도 실질적인 새로운 연구 영역을 다수 구축하였다. 초기 컴퓨터의 발전과 산업화, 그리고 오늘날의 폭발적인 IT산업의 발전에는 노이만의 업적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렇지만,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철학의 부상과 미래에는 노버트 위너의 선견지명이 훨씬 와닿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 만의 착각일까? 

...

(다음 편에 계속 ...)


참고자료:


<과학혁명의 지배자들>, Ernst Peter Fischer 저, 이민수 옮김, 양문출판사, 2002

[kisti의 과학향기]폰 노이만과 프로그램 내장방식, 2009 아이뉴스 24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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