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스핀들러의 매킨토시 최장수 브랜드, Performa 시리즈 from Wikipedia.org


IT 삼국지, 오늘과 다음 편은 19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인터넷이 태동하면서 구글이라는 회사가 새로운 강자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던 시절, 존 스컬리 이후 애플을 지배했던 2명의 CEO인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길 아멜리오(Gil Amelio)의 이야기 입니다. 


애플 유럽의 풍운아, 정치의 귀재 마이클 스핀들러

마이클 스핀들러는 독일 출신으로 나치 독일 말기에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잘 나가던 컴퓨터 회사인 DEC 의 유럽지점이 있는 파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공대를 졸업하였음에도 마케팅과 전략기획 쪽에 더욱 적응을 잘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인텔의 유럽 영업담당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곳에서 이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액을 도와 애플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를 만납니다.  마이크 마큘라는 마이클 스핀들러가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스마트한 사람 중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고, 애플을 설립하고 나서 애플이 미국시장의 성공을 넘어서 1980년 세계시장으로 나아가게 되자 주저없이 마이클 스핀들러를 애플의 유럽 마케팅 책임자로 스카우트 합니다. 

애플 유럽의 시작은 매우 초라했습니다.  벨기에 브뤼셀에 사무실을 만들었지만, 몇 명의 직원들만 일을 하였고, 특히 회사 설립과정의 문제로 캘리포니아에서 벨기에로 돈을 송금하지 못해서 거의 6개월을 무일푼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실을 1981년 파리로 옮기면서 애플 유럽이 제대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는 이곳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냅니다.  당시 유럽의 PC 시장은 앰스트라드(Amstrad), 에이콘(Acorn), 올리베티(Olivetti) 등과 같은 유럽의 회사들이 지배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양한 마케팅 전술로 애플 II 를 높은 가격과 영문 알파벳만 가능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가장 잘 나가는 PC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의 성과는 1983년 스티브 잡스가 삼고초려를 해서 데려온 펩시의 마케팅 귀재이자 향후 애플의 CEO가 되는 존 스컬리 마케팅 부사장의 눈에 들어, 매달 애플 본사에서 임원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존 스컬리는 그가 펼치는 독립된 국제지사 전략을 통한 지역별 차별화 전략을 매우 좋아했고, 이후 자신과 영역이 겹치기 때문에 가장 큰 정적이 될지도 모르는 마이클 스핀들러를 중용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떠나고, 존 스컬리가 CEO가 되자 애플의 조직혁신을 시작하는데, 기존의 제품 라인업 별(애플 III, 리사, 매킨토시 등)로 구성되었던 조직을 일반적인 기능별(R&D, 마케팅/영업, 관리 등) 조직으로 재편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마이클 스핀들러는 전세계 마케팅을 책임지는 지위로 승진을 하여 애플 IIc와 매킨토시 II의 전세계 12개 국가 출시를 총지휘합니다.


마이클 스핀들러의 라이벌, 쟝 루이 가시

마이클 스핀들러 최고의 라이벌은 쟝 루이 가시(Jean Louis Gassée)로 역시 애플 유럽 출신의 엔지니어 입니다.  쟝 루이 가시는 스티브 잡스가 떠난 뒤 R&D 총책임자로 사실 상 애플 제품 라인업 자체를 좌지우지 하였습니다.  엔지니어였지만, 누구보다도 정치적이었던 인물로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방식을 관철할 때까지 강요를 했던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엔지니어들과의 관계가 좋아서 엔지니어 집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엔지니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왠만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려고 하였고, 이런 그의 성향은 애플로 하여금 사실상 구현되기 어렵거나 엔지니어들의 취미나 이상에 가까운 프로젝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지원하는 문제를 안게 됩니다.

마이클 스핀들러는 미국시장에서 IBM에게 매킨토시가 고전을 면치 못한 것과는 달리 애플 유럽과 일본 시장에서 매킨토시가 선풍을 일으키면서 그 입지를 단단히 다집니다. 특히 일본 매킨토시에 일본어 폰트와 입력시스템(KanjiTalk)을 탑재시키면서 현지화를 한 것이 주효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케팅 부분에 성과를 내면서, 그는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는 슬슬 자신을 키워준 존 스컬리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존 스컬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에 대한 비난을 서슴치 않았고, 자신이 존 스컬리가 CEO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거의 유일한 CEO 감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전을 여러가지 형태로 펼쳤습니다.  


정적들의 몰락

존 스컬리는 애플의 CEO 로서의 입지보다 자서전과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 등과 같은 개인에 대한 내용을 미디어에 내보내는 행동으로 애플 이사회의 신임을 조금씩 잃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최대의 정적이었던 쟝 루이 가시는 거듭된 프로젝트 실패로 인해 날이 갈수록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새로운 맥에 적용한 최첨단 RISC 디자인을 채용한 CPU 를 개발하려고 했던 아쿠아리우스(Aquarius) 프로젝트는 참담한 실패로 끝납니다.  이미 인텔, 모토롤라, IBM 등이 당시 이 시장에서 가장 잘 나가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RISC 칩인 SPARC 를 따라잡기 위해 수조 원의 자금을 투자하고 있었음에도 커다란 성과가 없었는데, CPU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애플이 자체 CPU 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실현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시는 수백만 달러를 이 프로젝트에 투자를 하였고, 개발을 위해 크레이 슈퍼컴퓨터까지 구매하는 등의 무리수를 두다가 무려 $5천만 달러가 투입된 이후에 프로젝트를 포기합니다.  가시는 이러한 사실이 투자자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고, 직원들에게 크레이를 구매한 이유는 새로운 케이스와 컴퓨넌트를 디자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할 것을 신신당부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이런 실패를 메꾸기 위해서 매킨토시의 가격을 언제나 높게 책정하고, 최소한 55%라는 마진율을 고집하는 잘못된 결정을 통해, 중상에 속하는 사용자들도 윈도우를 탑재한 IBM-PC 호환기종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우를 범합니다.  이렇게 정적들의 실책이 계속되는 동안, 마이클 스핀들러의 애플 유럽은 2년 만에 매출액이 $4억 달러에서 $12억 달러로 3배나 증대시키는 쾌거를 이룩하면서, 애플 전체 매출의 1/4을 차지하게 됩니다.  존 스컬리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마이클 스핀들러를 애플의 COO(Chief Operating Officer)로 임명합니다.

마이클 스핀들러가 애플의 COO에 오르고 난 뒤, 그의 정적이었던 애플 USA 의 앨런 로렌(Allan Loren)이 사임을 하였고, 동시에 쟝 루이 가시는 한직으로 쫓겨났다가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마이클 스핀들러는 존 스컬리에 이은 명실상부한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마이클 스핀들러는 중가와 저가의 매킨토시 브랜드를 내놓으면서, 기존의 애플의 고급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때 탄생한 것이 매킨토시 센트리스(Centris)와 퍼포마(Performa)로 매킨토시 사상 가장 오랜 생명력을 가진 브랜드가 됩니다.  이 시리즈는 처음으로 매킨토시가 PC와 가격경쟁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또한, 직원들의 신임을 얻으면서 존 스컬리와의 대립각을 전보다 더욱 강하게 세우기 시작합니다.


존 스컬리와의 경쟁, 그리고 M&A 태풍, PowerPC의 탄생

존 스컬리는 CTO 의 위치까지 겸하면서, 마이클 스핀들러를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매일같이 엔지니어들과 회의를 통해 모든 제품 라인업을 관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엔지니어가 아닌 그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아서, 적절하게 컨트롤을 하지 못하고 엔지니어들이 이상적으로 올린 핑크(Pink), 재규어(Jaguar) 등의 미래지향적인 프로젝트들을 자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투자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1991년까지 이렇게 실현되지 못한 연구개발비용은 $6억 달러가 넘었지만, 마이클 스핀들러는 존 스컬리가 CTO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개입하지 못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IBM 호환기종을 생산하는 회사들과 윈도우에게 시장을 더욱 내주던 애플의 운명을 고민하던 존 스컬리는 M&A 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몇몇 회사를 접촉합니다.  제일 처음 접촉한 것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였습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는 애플이 가지지 못한 RISC 기반의 뛰언 CPU 기술과 기업고객들이 있었고, 솔라리스라는 훌륭한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존 스컬리는 당시 애플의 부사장 중이 한 명인 알 아이센스탯(Al Eisenstat)과 CFO인 조 그라지아노(Joe Graziano)를 보내서 의사타진을 하고, 썬의 두 창업자인 스캇 맥닐리와 빌 조이의 동의를 얻어냅니다.  조건은 존 스컬리가 합병된 법인의 CEO가 되고, 스캇 맥닐리가 COO가 되는 것이었는데 마이클 스핀들러의 반대로 무산되고 맙니다.

마이클 스핀들러에게는 IBM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 애플의 합병에 대한 정보가 있었던 IBM은 당시 IBM PC 사업부분 사장을 맡고 있던 잭 쿠엘러(Jack Kuehler)가 마이클 스핀들러를 직접 만나서 자신들의 RISC CPU 프로젝트에 애플이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제안하고,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 합병할 경우 자신의 자리가 위험했던 마이클 스핀들러는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입니다.  존 스컬리도 IBM의 제안에 관심이 있었는데, 비록 마이크로소프트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지만 어찌되었든 IBM은 세계 최대의 컴퓨터 관련 기업이었고, 그들이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큰 투자를 해준다면 애플은 새로운 중흥기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존 스컬리는 거의 성사단계에 있었던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와의 합병을 취소하고, IBM과 협력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가장 커다란 회사들의 합작 프로젝트 실패사례인 PowerPC 프로젝트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 결정이 결국 존 스컬리을 애플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마이클 스핀들러는 이런 중요한 프로젝트가 자신들의 가장 커다란 경쟁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IBM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합작에 자신들의 오랜 파트너였던 모토롤라를 끌어들입니다.  IBM이 디자인하는 칩을 모토롤라가 생산하기로 합의를 하면서, 당시로서는 환상적으로 보였던 애플-IBM-모토롤라(AIM)의 협력이 실현됩니다.  IBM은 모토롤라의 88000 버스 구조를 POWER 아키텍처에 적용하여, 애플이 기존의 매킨토시 하드웨어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 애플이 그동안 추진했던 Pink 운영체제 프로젝트를 독립시켜서 IBM이 자금을 대는 Taligent 라는 프로젝트로 거듭나도록 합의합니다.  Taligent 의 개발이 완료되면 IBM은 PowerPC 프로젝트와 CPU를 채택한 모든 컴퓨터에 이를 운영체제로 쓸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운영체제의 개발이 문제였습니다.  Taligent는 물론 코플랜드(Copland)로 명명된 새로운 맥 운영체제의 개발도 지지부진하였고, 결국 PowerPC 에서 동작하는 운영체제는 완전히 새롭게 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프로젝트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마이클 스핀들러의 시대가 열리다.

Taligent 와 PowerPC, 그리고 작지만 야심차게 진행했던 최초의 PDA 상용화를 하려던 뉴턴(Newton) 프로젝트의 실패는 결국 존 스컬리의 사임으로 이어지게 되고, 존 스컬리의 후퇴와는 달리 파워북(PowerBook)이라는 노트북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입지를 더욱 단단히 하게 된 마이클 스핀들러에게 애플의 이사회는 CEO 타이틀을 넘겨줄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CEO 자리에 오른 마이클 스핀들러는 취임한 뒤 전체의 15%에 이르는 2,500 여명에 이르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전체 조직을 재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는 몇몇 핵심 시장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500 명을 해고하면서 거의 $2억 달러에 가까운 비용을 지출하였고, 단기간에 애플에 대한 손실을 기록하게 만들었으며, 식당에서도 돈을 받고, 회사 내의 피트니스 센터에서도 유료로 전환하면서 많은 직원들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이를 통해 애플 직원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저하되었고, 앞으로 누가 해고될지 모른다는 일명 '스핀들러 리스트(Spindler's List)'가 돌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 과거 애플의 부사장이었다가 존 스컬리와 함께 애플에서 쫓겨난 아인스탯이 법정소송을 통해 마이클 스핀들러 역시 존 스컬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잘못된 결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실질적으로 존 스컬리를 배신하고 CEO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업친데 덥친 격으로 수많은 직원들에게 불신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 지병처럼 가지고 있었던 스트레스성 장애가 더욱 심해졌고, 아내는 악성임파종 진단을 받기까지 합니다.

또한, 마이클 스핀들러는 존 스컬리나 스티브 잡스처럼 애플을 미디어에 자주 비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카리스마나 대중성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위기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회사에 대한 장악력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고, 마이클 스핀들러는 커다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마이클 스핀들러가 결정한 것이 바로 맥 운영체제를 라이센스를 하겠다는 것이었고, 하드웨어 파트너들을 모아서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렇지만, 애플에게 하드웨어 파트너로 나서겠다고 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컴퓨터 하드웨어 사업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신생회사들이거나 모토롤라처럼 다른 사업을 하던 회사였습니다.

그의 새로운 구상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마이클 스핀들러는 존 스컬리가 그랬던 것처럼 애플을 매각하려는 구상을 합니다.  IBM 이 가장 강력한 원매자였지만, 마이클 스핀들러는 IBM 에게 만큼은 회사를 넘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IBM의 구매제안을 거절하고, 1994년의 반짝 좋아진 실적을 바탕으로 다른 원매자를 찾아보았는데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오라클, 실리콘 그래픽스 등의 연이은 제안을 모두 가격이 맞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은 마이클 스핀들러는 1995년 야심차게 내놓은 파워북 제품군들의 결함으로 애플의 실적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그나마 가능했던 M&A의 꿈도 실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입니다.

그러나, 최종 결정타는 1995년 8월 24일, 역사적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95의 발표였습니다.  이로써 매킨토시는 그동안 가져왔던 IBM 호환기종과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우월성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사실상 항복선언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어쩔 수 없이 1996년 1,300명에 이르는 인원을 다시 해고한 마이클 스핀들러는 결국 1996년의 이사회에서 애플에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은 길 아멜리오(Gil Amelio)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고 애플을 떠나게 됩니다.


(후속편에 계속 ...)


참고자료: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받은 트랙백이 없고 ,

from Wikipedia.org - 매킨토시 디자인팀


원래 예정대로라면, 마이클 델에 이어서 인터넷 시대로 들어가면서 마크 앤드리센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최근 받은 초창기 매킨토시 팀의 이야기를 적은 'Geeks (영어원제: Revolution in the Valley)' 라는 책을 받아보고서, 이 책의 저자인 앤디 허츠펠트(Andy Hertzfeld)와 Geeks 에 나오는 위대한 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은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야 겠다 싶어서 1979~1985년 시기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매킨토시는 1984년에 출시가 됩니다.  이 컴퓨터는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컴퓨터의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킨토시 이전에 나온 컴퓨터와 매킨토시 이후의 컴퓨터는 확실히 세대가 구별됩니다.  바로 GUI 와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처음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  이전의 컴퓨터는 누가 뭐래도 엔지니어와 과학자 중심의 디자인이었습니다.  이런 혁명적인 컴퓨터를 처음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Geeks 라는 책에 나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제가 쓰고 있는 IT 삼국지와는 또 다르게 현장에 있었던 그 사람들이 모여서 그 때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기회가 있었고, 이것이 실제 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앤디 허츠펠트가 매킨토시 팀의 이야기를 연재하는 folklore.org 사이트를 열었고, 이 곳에 6년간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갔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팀 멤버들이 합류해서 내용을 고치기도 하고, 새로 추가도 하고 하면서 주인공들이 당시의 이야기를 그대로 그들의 집단지성의 힘으로 재구성 하였습니다.  인터넷과 소규모 집단지성의 힘이 주인공들을 하나로 묶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써낸 것이지요 ...


앤디 허츠펠트

앤디 허츠펠트는 1953년 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는 나이가 많고, 스티브 워즈니액보다는 나이가 어립니다.  브라운 대학에서 1975년 컴퓨터 과학 학사 학위를 받고, 버클리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1978년 애플 II 를 만난 그는 애플 II에 홀딱 빠져서 무수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예제를 유명한 컴퓨터 잡지에 실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79년 애플 컴퓨터에 입사를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애플 II의 프린터 펌웨어나 80컬럼 비디오 카드 등과 관련한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을 맡았습니다.  1980년에는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인 수전 케어(Susan Kare)를 초대를 해서 애플에 입사를 하게 만드는데, 그녀가 당시의 표준 매킨토시 아이콘들을 디자인하였습니다.

허츠펠트가 애플에서 일하던 당시의 직함인 "소프트웨어 마술사(Software Wizard)" 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부분에 있어서 애플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그가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전격 투입된 것은 1981년 2월의 일로 스티브 잡스가 그를 중용하였는데,  ROM 에 들어가는 코드를 포함하여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대부분, 그리고 사용자 인터페이스 툴박스와 수많은 컴포넌트들을 디자인하고 구현하였는데, 그가 만들어낸 컴포넌트 들이 오늘날 GUI 컴포넌트의 상당수 원형을 제공했다고 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1984년 애플을 그만두고 나와서 레이디어스(Radius),  제너럴 매직(General Magic), 이젤(Eazel)이라는 혁신적인 회사 세곳을 공동 창업하였습니다.  이젤에 있을 당시 그는 리눅스의 GNOME 데스크탑에서 동작하는 노틸러스 파일 매니저를 공동개발하였고,  2002년에는 Mitch Kapor 와 함께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진흥하고 OSAF(Open Source Applications Foundations)에 참여를 하면서 오픈소스 운동에 선봉에 섭니다.  2005년에는 구글에 입사하여 현재는 구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말단 엔지니어로 여전히 코딩을 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인생이 정말 행복하고, 아직도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즐기고 있다고 하니 정말로 존경스럽습니다.


PC 혁신을 일으킨 매킨토시 멤버들, 그리고 그 후 ...

앤디 허츠펠트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였지만, 당시의 매킨토시 멤버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흥미롭습니다.  이를 너무 깊숙히 다루면 현재의 연재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중에서 핵심멤버 몇 명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그들이 이후 어떤 인생의 여정을 걸었는지만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했던 사람 중에서 하드웨어를 담당했던 버렐 스미스(Burrel Smith, 하드웨어 보드 메인 디자이너)와 발 벨러빌(Bob Belleville, 제록스 Star 하드웨어 엔지니어 출신)과 같이 업계를 은퇴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버드 트리블(Bud Tribble) 입니다.  원래 명문 워싱턴 대학 의학도였던 그는, 1970년대 초 샌디에고 대학에서 빌 앳킨스(Bill Atkins)와 제프 라스킨(Jeff Raskin)을 만나고, 제프의 설득으로 의대를 휴학하고 1980년 9월 매킨토시 프로그래머가 됩니다.  맥의 하드웨어를 담담했던 버렐 스미스(Burrel Smith)가 모토롤라의 6809 CPU 를 버리고 68000 CPU 를 선택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고, 매킨토시가 결국 애플의 미래로 떠오르게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1981년 12월에는 의사가 되기 위해 다시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으로 돌아가지만, 결국 1984년 다시 애플로 돌아옵니다.  이후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스티브 잡스와 같이 맡아서 진행하지만, 1985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떠나 넥스트를 창업할 때 스티브 잡스와 같이 공동창업자로 이름을 올렸고, 그 이후 Sun Microsystems 에서 7년, 이젤에서 1년 반을 일하고 2002년 1월 소프트웨어 기술 부사장으로 애플로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앞서 언급한 수잔 케어는 매킨토시용 아이콘과 글꼴, 마케팅 도안까지 대부분의 디자인을 담당하였고, 시스템 전반의 외관과 개성을 불어넣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녀 역시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떠나 넥스트에 합류한 첫 직원 열 명 중의 한 명으로 1988년 그래픽 디자이너로 독립하여 오늘날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매킨토시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스티브 잡스와의 갈등으로 중간에 떠나게 되지만, 실제 프로젝트를 처음 만들었던 제프 라스킨(Jeff Raskin)은 1978년 1월부터 애플에서 일을 시작한 오래된 직원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1979년 초에 구상을 하고, 9월에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할 작은 팀을 구성하는데, 이 때의 멤버가 버렐 스미스, 버드 트리블, 조애나 호프만, 브라이언 하워드 등입니다,  1981년 1월까지 팀을 이끌지만 스티브 잡스와의 갈등으로 팀장을 그만두고 스티브 잡스에게 그 역할을 넘겼고, 1982년에는 애플을 떠납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에 관한 책인 "The Human Interface, 인간중심의 인터페이스 (국내번역판 제목)" 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시카고 대학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아쉽게도 2005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제프 라스킨의 설득으로 1978년 애플에 합류한 빌 앳킨슨(Bill Atkinson)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QuickDraw 라는 유명한 그래픽 패키지를 개발하는데, 이것이 리사와 매킨토시 UI의 기본 토대가 되었습니다.  맥 페인트라는 유명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였고, 1987년에는 후에 팀 버너스-리가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지는 하이퍼카드(HyperCard)를 개발하였습니다.  어찌보면 현재의 웹의 모습을 가장 먼저 프로토타이핑을 한 사람이 바로 빌 앳킨슨입니다.  1990년에는 앤디 허츠펠트 등과 함께 제너럴 매직을 공동창업하고,  PDA의 선조라고 말할 수 있는 Personal Intelligent Communicator 라는 제품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는 현재의 인생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1996년 부터는 전업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Within the Stone" 이라는 아름다운 광물 사진집을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매킨토시를 처음 개발했던 팀의 멤버들은 어느 한 사람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고 독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혁신의 힘이 애플을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요?  현재의 애플의 혁신은 스티브 잡스가 독주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들을 계승한 수많은 사람들의 힘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후속편에 계속 ...)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트랙백이 하나이고 ,

세계 최초 GUI 운영체제를 구현한 Xerox Star Workstation from Wikipedia.org


오늘은 GUI 를 둘러싼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제록스의 치열한 법정다툼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1980년대만 하더라도 비록 마이크로소프트가 MS-DOS 로 IBM-PC 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었지만, 경쟁관계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애플은 매킨토시라는 하드웨어를 생산하면서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무기로 데스크탑 출판 시장을 장악하고 그래픽 소프트웨어들을 무기로 확실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MS-DOS 기반의 비즈니스 솔루션 위주로 사업을 풀어간 IBM-PC 호환기종과는 상당히 다른 시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를 고소하다.

그렇지만, 한눈에 GUI가 세상을 바꿀 것을 직감한 빌 게이츠는 애플에게 GUI 의 일부분을 라이센스할 수 있도록 요청을 하였고, 애플은 이를 허용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MS-DOS 기반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1.0 을 제작해서 출시하는데, 이 때만 하더라도 매킨토시의 GUI와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었으며, 버그도 많고 느렸기 때문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윈도 2.0 에서는 윈도우가 중첩이 될 수 있는 것을 포함하여 매킨토시 GUI와 유사한 다른 부분들을 포함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애당초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합의한 수준의 라이센스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지적재산권 침해로 고소를 하게 됩니다.

애플이 고소를 한 내용은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룩엔팰(look and feel)"을 윈도우가 그대로 복제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윈도우의 모양이나 나타나는 패턴, 사라지는 패턴, 중첩되는 형태와 타이틀 바 등, GUI 의 요소기술 189가지를 애플이 열거하였습니다.  


제록스, 애플을 고소하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심리를 거쳐 189개의 요소 중에서 179개의 요소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1.0 을 제작할 당시 애플과 합의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나머지 10개는 지적재산권의 보호범위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고소가 진행되는 와중에, 세계 최초로 GUI 를 개발했던 제록스(Xerox)는 애플을 상대로 지적재산권 침해소송을 냅니다.  이미 이 시리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애플이 매킨토시와 리사에 적용된 GUI 운영체제를 개발하게 된 것은 제록스 파크(Xerox PARC) 연구소를 들렀다가, 이들이 개발하고 있던 GUI를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제록스는 애플에 현물투자를 하고 애플의 주식을 일부 받은 기념으로 매킨토시 디자인 팀을 초청했던 것인데, 이것이 매킨토시 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고, 매킨토시는 윈도우의 탄생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록스의 소송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난지 3년이 넘어서 제기를 하였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맙니다.


전체적인 느낌 vs. 세부요소

이 소송은 그 이면에 있는 세 회사들 사이의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판례라는 측면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남깁니다.  애플은 전체적인 "룩앤필(Look and Feel)"에 대한 침해를 인정받고 싶어하였고, 이를 그대로 베낀다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법원에서는 전체적인 느낌을 지적재산권 침해의 대상으로는 판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대신 구체적인 아이템들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예를 들어 윈도 모양, 아이콘 이미지나 각각의 메뉴들, 그리고 객체들을 열고 닫는 방식과 같이 세부적인 요소들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각각은 대부분 애플이 자신들의 원천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고, 애플이 주장하는 많은 구성요소를 하나로 합친 "전체적인 느낌"에 대한 소유권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92년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 이후 5년 뒤인 1997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GUI 문제와 함께 애플의 퀵타임(QuickTime) 기술에 대한 지적재산권 침해문제를 포괄하여 합의를 통한 분쟁해결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때에는 이미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 95를 통해 애플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상태로 커진 뒤였고, 애플도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피스를 더 이상 애플을 위해 개발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면서 애플을 압박하였기에 당시의 애플로서는 상당히 굴욕적인 합의를 하게 됩니다.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Internet Explorer)를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 대신 자사의 디폴트 브라우저로 채택하기로 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에게 마이크로소프프 오피스 제품군을 계속 개발해서 최소 향후 5년간 공급하며, 애플의 주식을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사들이게 되면서 동시에 상당수 특허 크로스-라이센싱을 하는데 합의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후에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후속편에 계속 ...)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받은 트랙백이 없고 ,



1980년대 중반 이후 IBM-PC 호환기종과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워드 프로세서와 스프레드 시트 등의 킬러 소프트웨어 역시 이들 플랫폼을 중심으로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애플은 특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니치 마켓을 노리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어도비와 애플, 인쇄혁명을 일으키다.

이 과정에서 1985년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이사회의 결정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나게 되고, 애플의 실권은 존 스컬리가 잡게 되었습니다.  존 스컬리는 마케팅 전략의 측면에서 회사의 포지션을 확실한 우위가 있는 부위를 중심으로 재편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협력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 회사가 바로 최근 스티브 잡스와 플래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 어도비(Adobe) 입니다.

어도비는 세계 최초의 GUI 를 구현하였고, 애플의 리사와 매킨토시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이후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애플 매킨토시 등과 GUI 에 대한 지적재산권 침해소송을 다투게 되는 Xerox PARC 출신의 존 워녹(John Warnock)과 찰스 게치케(Charles Geschke)가 팔로알토 인근의 차고 창업을 한 회사입니다. 두 사람은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라는 인쇄용 언어를 개발하고 판매하였는데, 서체에 관심이 많았던 스티브 잡스는 이 기술을 라이센스해서 1985년 레이저라이터(LaserWriter)에 구현을 합니다.  같은 해 스티브 잡스는 존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 나지만, 이것이 매킨토시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것을 느낀 존 스컬리는 DTP(DeskTop Publishing) 를 킬러 소프트웨어로 하여 매킨토시를 인쇄 업종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계로 포지셔닝하면서 소위 말하는 디지털 인쇄혁명을 주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들의 동반자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포스트스크립트가 레이저 프린터와 같은 인쇄 혁명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어도비가 개발한 Type 1 이라는 디지털 폰트 포맷은 애플이 뒤를 이어 개발한 TrueType 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애플은 이 기술을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라이센스를 하면서 사실 상의 폰트 표준을 주도합니다.  어도비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Type 1 규격을 공개하고, Adobe Type Manager 라는 소프트웨어도 발매하지만, 이미 TrueType 에게 승기를 빼앗긴 이후였습니다.  Type 1 은 여전히 그래픽/인쇄 분야에서는 표준으로 남았지만, 나머지 비즈니스 분야는 TrueType 이 장악을 하는데 성공합니다.  어도비와 애플과의 애증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결국 1996년 어도비는 트루타입의 라이센스 권리를 가진 마이크로소프트와 OpenType 이라는 통합 개방형 폰트 포맷에 합의를 합니다.


애플과 어도비의 찰떡궁합

TrueType 때문에 다소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어도비와 애플은 정말 환상의 짝꿍과도 같은 동반자 관계를 유지합니다.  포스트스크립트와 DTP로 확실한 니치마켓 선점에 성공한데 이어, 어도비는 1980년대 중반에는 벡터 기반 드로잉 소프트웨어인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를 발표하면서, 포스트스크립트 기반의 레이저 프린터와 함께 그래픽 및 출판업계 시장을 확고하게 차지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1990년 2월 오늘날까지도 전설적인 소프트웨어의 하나로 평가받는 포토샵(Photoshop)을 발표하면서, 매킨토시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가 넘볼 수 없는 아성을 구축하였습니다.

매킨토시의 DTP 시장에서의 선전과 함께, 애플의 부활을 이끈 또 하나의 공신은 바로 1991년 출시된 파워북(PowerBook)입니다.  노트북 컴퓨터의 현대적인 형태와 인체공학적인 레이아웃을 확립시킨 것으로도 유명한 이 제품은 발매 첫해에 매출액 $1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애플의 중흥기를 이끌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후 애플은 다시 내리막을 탑니다.  야심차게 시작한 디지털 카메라, 포터블 CD  오디오 플레이어와 스피커 사업, 비디오 콘솔과 TV 주변기기 등과 같은 수많은 하드웨어 제품사업들을 새롭게 시작하지만 대부분 실패를 거듭하였고, 특히 엄청난 돈을 들여서 개발하기 시작한 최초의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인 뉴턴(Newton)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결국 존 스컬리의 시대가 저물게 됩니다.


존 스컬리의 시대가 저물다.

애플에서 스컬리의 시대를 정의한다면, 지금의 삼성전자처럼 다양한 제품 라인업으로 니치마켓을 뚫고 나가려는 전략을 펼쳤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모델들은 일단 홈, 교육, 비즈니스와 같은 커다란 시장 특성으로 분류가 되고, 그 다음으로 각각 다양한 변종과 업그레이드 모델이 존재하는 상당히 복잡한 형태를 가졌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적인 주문형 컴퓨터인 델(Dell)과 같이 완전히 소비자 중심적인 조립체계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관리부담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모델 계층이 상존하는 상황에서는 가장 중요한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 한다는 것이 정말 엄청난 부담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수많은 모델 들에 대한 호환성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는 결국 애플 운영체제가 초기의 혁신성을 잃고 윈도우 운영체제에게 따라잡히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또한 존 스컬리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엔지니어 그룹을 휘어잡고 전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물론 존 스컬리가 기술을 잘 모르는 마케터 출신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주변에 강력한 기술부분을 통제할 만한 2인자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은 CEO로서 잘못된 경영판단 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상반기 애플의 중간관리자들은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허황된 프로젝트들로 회사의 혁신역량을 낭비하였고, 수많은 프로젝트가 싹도 틔우지 못하고 사라져 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잘못된 판단 중의 하나로 새로운 마이크로프로세서인 PowerPC 사업에 뛰어들면서, 운영체제를 이식하기로 하였던 결정을 들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애플은 회복할 수 없을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됩니다.  


추락하는 애플을 구하기 위해 애플의 이사회는 존 스컬리를 해임하고, 그동안 COO(Chief Operating Officer)로 일하던 마이클 스핀들러(Michael Spindler)를 1993년 CEO로 선임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비하기로 결정합니다.

(후속편에 계속 ...)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받은 트랙백이 없고 ,



IBM 의 PC 시장 진출로 위기를 맞게 되는 애플호.  오늘의 삼국지 이야기는 애플호를 구하기 위해 공들여 손수 영입한 사람에게 쫓겨나는 스티브 잡스의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평생 설탕물만 팔면서 살겁니까?

존 스컬리(John Sculley)는 1939년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 16살이 많습니다. 그는 1970년대 펩시콜라의 부사장으로 코카콜라에 절대적으로 밀리던 브랜드인 펩시콜라를 최고의 브랜드로 키워낸 장본인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 펩시콜라라는 거대기업의 사장(President)에 오른 최고의 마케터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펩시콜라 사상 최연소 사장으로 오른 사람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선을 보였던 눈을 가리고 시음을 하고 맞추는 장면을 TV 광고로 만들어 내놓은 장본인이기도 하지요 ...

애플의 당시 CEO 는 여전히 공동창업자의 1인인 마이크 마큘라 였습니다.  그는 일선에서 퇴진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괴짜 엔지니어와 언제나 사람들하고 심하게 분쟁을 일으키는 2명의 다른 공동창업자들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애플 II 의 성공이후 야심적으로 준비한 매킨토시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력한 마케팅을 이끌어줄 최고의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애플에 있는 누구나가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점찍은 후보가 존 스컬리입니다.  그렇지만, 거액의 연봉과 미국 최고의 기업 중의 하나의 실세로서 애플과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에서 일할 이유가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서부 실리콘 밸리에 있는 애플과 같은 회사들은 비즈니스 맨들에게는 다소 천박하고 가볍게 여겨졌었고, 너무 젊은 사람들이 물정을 모르고 사업을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기에 존 스컬리가 애플로 옮겨간 것 자체가 상당히 큰 뉴스가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마이크 마큘라와 상의를 하기는 했지만 존 스컬리를 애플로 스카웃한 장본인은 바로 스티브 잡스입니다.  존 스컬리가 스티브 잡스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애플로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스티브 잡스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뉴욕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존 스컬리를 초대하고, 발코니에서 자신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경력도 상대가 되지 않는 거물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평생토록 설탕물만 팔면서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고 싶으십니까?

존 스컬리는 이 한마디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당히 당돌하고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한 마디 ...  존 스컬리는 그렇게 애플이라는 배에 승선을 하게 됩니다.


폭풍우 속의 배를 항해하는 선장의 역할

존 스컬리가 애플에 승선을 한 뒤, 존 스컬리의 마케팅 능력과 스티브 잡스의 창의력이 빛을 발하면서 애플은 한동안 승승장구 합니다.  특히 존 스컬리는 애초에 $1,995 달러로 가격이 책정되었던 매킨토시의 가격과 시장에서의 포지션을 IBM PC 호환기종들과 다르게 가져가도록 수정하기 위해 $2,495 달러로 올면서 수익과 이를 바탕으로 한 프리미엄 마켓을 집중적으로 공격적인 광고 캠페인과 함께 공략합니다. 이 시기에 존 스컬리와 스티브 잡스가 함께 한 작품이 아래 임베딩한, 광고사에 길이 남는 역작인 "1984" 광고입니다.  이 광고는 미국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인 미식축구 슈퍼보울이 열린 1월 17일에 방영됩니다.  이 광고를 존 스컬리와 스티브 잡스는 너무나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그렇지만, 1983년 12월 애플의 이사회에서 이 광고에 대해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혹평을 하고 내보내지 말라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특히 스티브 워즈니액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티브 잡스의 강력한 이사회 멤버들에 대한 설득으로 이 광고는 집행이 되었고, 커다란 반향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위기는 빨리 찾아왔습니다.  1984년 애플은 $1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립니다.  이는 1983년에 비해 55%나 늘어났지만, 이를 기점으로 심각한 판매부진과 함께 존폐를 논할 정도의 위기가 닥쳐 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존 스컬리는 비전만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달려 나가는 스티브 잡스를 애플에서 몰아냅니다.  

가장 큰 실책은 매킨토시 판매와 관련하여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판매를 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혁신적인 새로운 매킨토시에 자신이 있었던 것이지만, 수 만대의 컴퓨터를 미리 생산해서 대기했던 것은 경영상의 큰 실책이었습니다.  8만대를 미리 준비했지만, 결국 1984년 2만대만 팔게 되자 애플은 곧바로 심각한 경영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매킨토시 제품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던 것에 있었습니다.  제품의 스펙이 경쟁제품을 압도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과거 애플 II에서 사용할 수 있었던 수많은 소프트웨어의 호환성이 완전히 무시되었기에, 소프트웨어가 절대 부족했습니다.  1985년의 판매 데이터를 보면 아직도 애플 II의 판매에 의한 매출액이 70%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에만 집중하는 경영진에 대한 불만으로 수많은 애플 II 디자이너들과 엔지니어들이 회사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그 중에는 비행기 사고에서 애플을 떠났다가 다시 복귀한 스티브 워즈니액도 있었습니다.

매킨토시의 실적은 1985년 더욱 악화되어 단 2,500대 만을 팔았고, 이러한 부진에 대해 스티브 잡스는 다른 사람들을 심하게 나무라고 불평을 하면서 조직의 위해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매킨토시라는 컴퓨터 자체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결정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애플이라는 회사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책임을 스티브 잡스가 존 스컬리에게 전가하려고 하자 결국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 때에는 이미 아무도 스티브 잡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존 스컬리가 스티브 잡스를 쫓아낸 모양새가 되었으나, 당시의 스티브 잡스는 커다란 기업을 경영하는데 함량미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스티브 워즈니액과 함께 사실 상의 애플의 전성시절을 같이 열었던 마이크 마큘라(Mike Markkula) 마저 스티브 잡스를 몰아내기로 결정을 하면서, 1985년 5월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이사회에 의해 회사의 주요 보직을 박탈당하고 그해 12월 결국 애플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의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애플의 주식 전부를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새로운 벤처 사업을 시작합니다.


침몰하는 애플의 회복

존 스컬리는 스티브 잡스가 떠난 뒤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합니다.  전체 직원의 20%에 이르는 인원을 해고하고, 여러 사업부로 흩어져있던 사람들을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비용을 엄청나게 줄였고, 매출 규모는 작아졌지만 비용구조가 좋아지면서 수익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애플은 $19억 달러의 매출로 1985년보다 부진한 실적을 내지만, 애플에게 등을 돌렸던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설득해서 매킨토시용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애플이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합니다.  존 스컬리는 DTP(Desktop Publishing)라는 새로운 니치마켓에 집중을 했습니다.  매킨토시는 전체 PC 시장의 헤게모니를 쥘 수는 없었지만, 특정 시장에서는 강력한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매킨토시의 매출은 점점 증가하면서 자신만의 영역을 탄탄하게 다지는데 성공을 하고, IBM에 이은 2위의 자리를 공고히 하면서 안정된 성장을 이룩합니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CEO의 자질이 달랐을 뿐     

존 스컬리는 1993년 애플을 떠나게 됩니다.  존 스컬리는 위기의 회사를 건져 올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거기까지 였습니다.  애플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려고 시작한 여러 프로젝트 들은 현실성이 부족했고, 너무 많은 제품들을 기획하는 등 첨단산업을 이끌고 나가는 것에 전통산업을 관리하고 기획하는 의사결정을 내림으로 인해 애플의 창의성과 독창성 등의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애플은 전통적인 산업에 밝았던 몇 명의 CEO들에 의해서도 죽어가는 공룡의 모습으로 근근히 버텨나가기만 하다가, 스티브 잡스가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던 시절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비젼과 창의성 및 특유의 카리스마 뿐만 아니라 관리방식과 경영, 팀 플레이, 경영 자체에 대한 경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것들을 갖춘 거의 완성된 CEO로 돌아왔기에 애플이 다시 부활의 날개짓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스티브 잡스 대신 존 스컬리가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났다면 오늘의 애플이 있었을까요?  그랬다면 스티브 잡스는 애플과 함께 이미 오래전에 실패의 나락으로 빠졌을 것입니다.  존 스컬리가 당시에 애플을 맡아서 사태를 수습하고, 이 과정 속에 스티브 잡스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일련의 과정이 오늘날의 애플의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과장일까요?


(후속편에 계속 ...)


참고자료:

John Sculley at Wikipedia
John Sculley and Steve Jobs by Martin Groeger
How John Sculley Saved Apple From Steve Jobs by Rob Beschizza

저작자 표시 비영리
신고

WRITTEN BY
하이컨셉
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트랙백이 하나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