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은 이미 강력한 클러스터 운영체제를 가진 기업이다

구글이라는 회사는 이미 거대한 운영체제를 개발해왔고, 이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구글이 전 세계에 구축한 인터넷 데이터 센터에는 커다란 분산 컴퓨터 클러스터가 있고, 이들을 마치 하나의 서버 컴퓨터를 운영하듯이 톱니바퀴처럼 운영할 수 있는 잘 조직화된 운영체제를 개발해서 일사분란하게 동작시키고 있다. 이렇게 개발된 구글의 클러스터 운영체제에 전 세계의 사용자들은 자신의 계정을 이미 하나씩 만들었거나, 오늘도 G메일이나 구글 드라이브(Google Drive), 구글+ 등을 통해 계정을 열고 있는 셈이다. 안드로이드 스마트 폰을 쓰는 사람들도 구글 클라우드에 자동접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우리들은 거대한 구글의 클러스터 운영체제에 접속하여 계정을 열고, 해당 서버 컴퓨터의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구글의 클러스터 컴퓨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점점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클러스터 컴퓨터의 사용자인 우리들은 서버의 무한 확장에 아무런 제약사항 없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이미 구글의 클러스터 운영체제는 안정성 측면이나 확장성, 그리고 사용자들에 대한 24x7 서비스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일단 안정된 클러스터 운영체제를 구축한 구글은 뒤를 이어 웹 환경에 적합하면서, 자신의 클러스터 운영체제를 이용하는 사용자들을 위한 거대 웹 서비스를 개발해서 오픈하였다. 이것이 바로 G메일과 구글 드라이브로 대표되는 서비스들이다. 처음에는 베타의 꼬리표를 달고 등장했고, 서비스 자체나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당히 쓸 만한 수준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구글의 클러스터 운영체제에 클라우드 애플리케이션들이 원활하게 동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 거대한 클러스터 컴퓨터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검색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오피스 클라우드 애플리케이션 뿐만 아니라 쇼핑 가격 비교 엔진, 그리고 각종 지도와 전화번호부, 도서관 엔진, 여기에 동영상 서비스와 같은 수많은 서비스 들을 공짜로 사용자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구글의 클라우드 운영체제는 이미 전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컴퓨터이자 가장 앞선 운영체제인지도 모른다. 



구글 크롬 프로젝트의 의미


구글의 크롬 프로젝트는 구글 운영체제 완성의 마지막 남은 조각이다. 크롬이 가지고 있는 역할은 명확하다. 상당부분의 거대 운영체제의 구성요소가 클라우드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다시 만들 이유가 전혀 없다. 안드로이드나 아이폰, PC나 맥 등을 가리지 않고 크롬 브라우저를 올리거나, 운영체제 없는 경우에는 브라우저가 처음 시동을 할 때 클라이언트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잘 매칭이 되도록 하는 부분과 디스플레이를 최적화하는 것, 그리고 간혹 있게 될 오프라인 상태에서의 지속성(Persistence) 관리를 위한 로컬 파일 관리 및 동기화, 그리고 완벽한 실시간 업데이트 및 보안 등을 완성하는 크롬 운영체제를 설치하도록 하면 된다.


웹 기반의 운영체제, 클라우드 컴퓨팅의 기본개념은 이미 오래 전에 NC(Network Computer)라는 개념으로 소개되었던 적이 있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접근방법이다. 특히 구글의 전 CEO인 에릭 슈미트가 과거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의 CTO 시절에 이를 처음으로 주창했던 사람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에릭 슈미트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에 있었던 때와 지금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바로 네트워크 환경이 달라졌다. 스마트 폰으로 인해 유무선 네트워크, 심지어는 3G/4G로 일컬어지는 음성/데이터 통신 네트워크 통합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다양한 무선 인터넷과 데이터 통신환경이 일반화되면서 스마트 폰, 태블릿, PC 등이 언제 어디서나 무선으로 인터넷에 연결되는 것이 이제 기본이 되었다. 

구글은 이러한 환경변화를 염두에 두고, 5~10년 뒤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패러다임 변화를 이끄는 운영체제와 새로운 디지털 컨버전스 기기들을 이끌어가는 선봉의 역할을 하기 위해 운영체제 및 클라우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웹을 중심으로 하는 웹앱들의 생태계를 많이 만들고, 이를 구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HTML5 기술을 잘 구현한 크롬과 같은 브라우저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개방형 웹앱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하고 이를 쓰는 사람들도 늘어난다면 아이폰의 iOS, 안드로이드가 몰고온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의 앱 기반의 소프트웨어 생태계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파이어폭스 운영체제나 타이젠(Tizen), 우분투의 스마트폰 운영체제, LG전자에서 도입한 HP의 웹OS 등과 같이 HTML5를 기반으로 하는 표준 웹기반 기술을 지향하는 제 3의 운영체제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의 맥락과 잘 맞는다. 

(후속편에 계속 ...)


P.S. 이 시리즈는 메디치미디어의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라는 책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책을 구매하셔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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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하이컨셉, 하이터치의 세계라고 합니다. 너무 메마르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는 세계 각국의 이야기, 그리고 의학과 과학을 포함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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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플로리다에서 태어난 쉐릴 샌드버그는 1991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학생에게 수여하는 존 윌리엄스상까지 수여한 최고의 인재였다.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월스트리트로 일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에게는 존경하는 스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을 결정하던 실세이며 하버드 대학의 혜성같이 나타난 신성 로렌스 서머스였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대학을 졸업하고 월드뱅크(World Bank)에 직장을 구한 그녀는 주로 인도의 나병이나 AIDS 등과 같은 보건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경험을 쌓고 1993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입학을 해서 1995년 MBA 학위를 취득하는데, 이 때에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하버드 MBA 과정 학생들 중에서 최고의 성적과 상을 휩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졸업 후 1년 정도 최고의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McKinsey & Company)에서 경험을 쌓고 있던 그녀를 부른 사람은 자신의 은사인 로렌스 서머스였다. 


로렌스 서머스는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부 장관인 로버트 루빈(Robert Rubin)을 보좌하는 차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쉐릴 샌드버그는 가장 믿을만한 제자였다. 로렌스 서머스의 호출로 그후 4년 반 정도 미국 재무부의 특별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긴 쉐릴 샌드버그는 로렌스 서머스가 재무부 장관이 되자 수석참모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2001년 1월 클린턴 행정부의 임기가 끝날 때가 다가오자 그녀는 워싱턴을 떠나야했다. 이 시점에 그녀에게 다가가서 자리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새롭게 구글의 CEO 자리에 올랐던 에릭 슈미트이다. 


에릭 슈미트의 매력적인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쉐릴 샌드버그는 에릭 슈미트가 자신에게 제안한 '사업유닛 총괄관리자'라는 직책의 실체가 거의 없다는 느낌에 구글로 옮기는 것을 많이 주저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구글은 제대로된 사업을 벌이고 있지 않고, 엔지니어의 천국이나 마찬가지인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릭 슈미트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특히 세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회사에서 한번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꼬심에 넘어가서 그녀는 구글의 268번째 직원이 되었다. 그녀가 구글에 입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구글은 CFO도 없었다. 그 덕에 입사하자 마자, 에릭 슈미트가 그녀에게 맡긴 비밀업무 중의 하나가 만약을 대비한 자금줄을 잡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구글이 내부에서의 생각과는 달리 외부에서는 매출모델을 만들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기 때문에, 생각보다 낮은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대신 제대로 된 사업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충언을 하였다. 당시 구글의 사업과 운영부분은 오미드 코르데스타니(Omid Kordestani)가 총괄하고 있었는데, 쉐릴 샌드버그는 그의 휘하에서 애드워즈(AdWords) 사업의 혁신을 이끌겠다고 자청한다. 특히 그녀는 오버추어와 유사한 CPC(Cost Per Click) 모델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고, 이 모델이 통하기만 한다면 광고판매를 하러 다닐 필요가 없고, 광고주들이 키워드당 가격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클릭이 되었는지도 알 수 있으며, 검색결과 상위에 올라갈수도 있기 때문에 검색광고 시장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던 에릭 슈미트는 코르데스타니의 팀에 살라르 카만가르까지 합류시키며 총력전을 펼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광고의 연관성을 평가한 데이터와 클릭당 비용모델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구글의 창업자들이 늘 주장하던 광고가 검색의 결과를 왜곡시키는 모양새를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언제나 딜레마로 남아있었던 광고판매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롱테일을 집중공략할 수 있었기에 과거 전화번호부 이외에는 마땅한 광고수단이 없었던 소상공인들이 온라인 광고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시스템이 자동화되어 모니터링도 쉽게할 수 있었기에 커다란 매력이 있었다. 2002년 2월, 구글의 두 창업자는 쉐릴 샌드버그를 비롯한 새로운 팀이 개발한 애드워즈의 새모델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과거 광고와는 달리 광고를 작게 한두 줄로 제한하고 글자 수도 95자가 넘지 않게 하는 등, 검색결과를 나타내는 곳에 영향을 최소화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동시에 광고수익이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했던 탓에, 새로운 애드워즈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지는 당시로서는 미지수였다. 그렇지만 이 모델이 성공한다는 것을 증명하는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글은 2001년 8천 6백만 달러의 매출을 내는데, 새로운 애드워즈가 적용된 2002년에는 4배가 넘는 4억 39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 1억 달러는 수익으로 남았다. 기술만 있었던 기업에 드디어 비즈니스 모델과 수익이라는 날개가 달리면서 로켓처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글을 사실 상 날아오르게 만든 주역이었던 쉐릴 샌드버그는 애드워즈의 담당 부사장으로서 구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2007년 후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떠오르는 신성이자 당시 25세에 불과한 약관의 청년 마크 주커버그를 만나자 마음이 흔들린다. 마크 주커버그는 그녀와의 만남이 끝나자 페이스북의 COO(Chief Operating Officer) 자리를 맡을 사람은 그녀 밖에 없다는 결론을 사실상 내리고 그 다음달인 2008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Davos Forum, World Economic Forum)에서 그녀를 만나 공식적인 제안을 하였다. 2008년 3월, 페이스북은 공식적으로 쉐릴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의 COO 로 선임되었음으로 알렸다. 현재 쉐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의 전체적인 운영과 영업, 마케팅, 인사와 정책, 커뮤니케이션에 이르는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실상의 2인자이다. 그녀가 어째서 당시로서는 불확실한 페이스북이라는 회사를 믿고, 구글이라는 세계 최고의 인터넷 회사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페이스북이라는 회사의 미래를 믿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호사가들은 구글에서 자신의 상사였던 오미드 코르데스타니와의 불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9년 샌드버그는 월트 디즈니의 이사회 이사로 선출되며, 같은 해 스타벅스의 이사로도 선임되었다. 또한, 유명한 연구소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이사직을 포함한 유수의 단체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파워여성 중의 한 명이다.


구글의 또 하나의 광고모델은 구글이 자랑하는 롱테일에서 나왔다. 에릭 슈미트는 이미 전 세계에 엄청나게 수가 많지만, 각각의 규모는 매우 작은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구글의 전략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구글의 롱테일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가 바로 애드센스(AdSense)이다. 흔히 롱테일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은 예를 드는 것이 아마존의 책 판매 현황이지만, 구글의 애드센스가 가져온 롱테일 현상이 어찌보면 더욱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고 시장을 단순화해서 보면 크게 세 가지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 광고를 싣고자 돈을 지불하는 광고주, 그리고 광고를 실어서 이익을 내는 미디어, 마지막으로 광고를 보는 소비자이다. 이 중에서 광고주와 미디어 양측에서 모두 롱테일이 존재하는데, 광고주의 경우에는 신문이나 TV와 같은 일반적인 대중매체에는 광고단가가 너무 비싸서 광고를 내지 못하지만, 저렴하고 효과적인 광고방법이 있다면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그룹이 롱테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미디어의 경우에도 강력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광고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수익모델을 거의 만들지 못하는 대다수가 이런 롱테일에 속한다. 광고주의 롱테일은 대부분 지금까지 제대로 광고를 낸적 조차 없는 소기업이나 비영리조직, 개인 등이다. 그리고, 미디어의 롱테일은 광고게재를 성공시키지 못한 수 많은 웹 사이트 들과 같은 영세 미디어 들이다. 구글의 애드센스는 이들을 직접적인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즉, 이전에는 아예 광고시장 규모에 잡히지도 않았던 것을 새로운 시장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구글의 애드센스는 누구라도 쉽게 새로운 광고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여, 광고주가 광고문안을 만든 뒤에 광고비를 인터넷 상에 그 광고를 클릭했을 때에만 지불하면 되는 "성과급" 형태의 광고를 제공했기 때문에 광고주가 큰 무리없이 광고를 하고, 효과를 보면 광고비를 더 지불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미디어 입장에서도 영세한 미디어가 광고주를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의 미디어의 성과에 맞추어 전략만 잘 세운다면 큰 돈을 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의 광고수입을 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애드센스는 재미있게도 G메일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 G메일 개발팀에 있던 폴 부세(Paul Bouchet)가 이메일이 쓴 단어와 광고주가 선택한 키워드를 연동하는 것과 관련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이 작업을 눈여겨 본 세르게이 브린이 아예 블로그나 홈페이지 어디에나 누구나 붙일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하면서 진화를 거듭하여 만들어진 플랫폼이 애드센스이다. 애드센스 아이디어의 기본적인 시작은 폴 부세에서 비롯되었지만, 세르게이 브린의 생각을 이어받아서 애드센스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이끈 사람이 바로 또 한명의 구글의 여성파워 수전 워지츠키(Susan Wojcicki)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명 "애드센스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한다. 구글의 18번째 직원인 그녀는 현재까지도 구글의 제품담당 부사장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그녀의 여동생인 앤이 세르게이 브린과 결혼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구글 창업자의 처형이 된다 (비록 세르게이 브린의 외도로 이들의 결혼은 파경에 이르렀다). 애드센스는 등장과 함께 돌풍을 일으키면서 과거에는 있지도 않았던 광고시장을 만들어냈다. 애드센스는 컨텐츠 웹 사이트를 '파트너'로 부르고, 이들에게 광고수입의 2/3를 주고 자신들이 가져가는 새로운 광고시장을 통해 웹 전체를 자신들의 광고 플랫폼의 대상으로 삼는데 성공하였다. 


2004년이 되자 애드센스는 구글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면서, 애드워즈와 함께 구글을 세계최대의 광고회사로 탈바꿈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렇게 구글의 수익을 만들어내는 양대산맥인 애드워즈와 애드센스는 모두 쉐릴 샌드버그와 수전 워지츠키라는 두 명의 여성에 의해 탄생하였다. 구글이라는 조직에 남성들이 훨씬 많지만, 이 두 여성들이 탄생시킨 두 가지 광고 플랫폼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구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속편에 계속 ...)


P.S. 이 시리즈는 메디치미디어의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라는 책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책을 구매하셔서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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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라는 회사와 두 명의 창업자의 비전을 믿고 선뜻 투자를 했던 초기 투자자 네 명에게 받은 100만 달러와 일부 소액 투자자 등에게서 조달한 돈이 있었지만, 구글이라는 회사는 수익이 거의 없었다. 최초의 수익은 당시 공짜 오픈소스 운영체제로 유명했던 리눅스(Linux)를 배포하는 레드햇(RedHat)에게 검색결과를 제공하기로 계약하고 한달에 2천 달러를 받기로 한 것과 일부 사이트에 구글 검색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매우 적은 사용료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인터넷의 확장속도는 상상을 초월하였고, 매일 검색 수는 수만 건에 달하면서 네트워크 트래픽과 서버비용이 모두 크게 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더해, 구글의 장점이었던 빠른 검색 역시 트래픽과 정보량의 증가로 인해 3~4초씩 걸리는 등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과 투자가 필요했는데, 처음 창업했던 대학원의 친한 동료였던 수전 워지츠키의 차고는 비좁아서 더 이상 이들이 머무를 수가 없었다. 


1999년 구글은 팔로알토(Palo Alto) 도심에 있는 2층 건물로 옮겨서 엔지니어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누구나 새벽까지 먹을 수 있는 각종 간식과 회의실에서 마사지 서비스를 하고, 회의탁자를 겸해서 녹색 탁구대를 구매하는 등 회사를 거의 놀이터화하기 시작하였고, 직원들이 먹고, 놀고, 마시면서 일을 하는 현재의 구글의 원시적인 캠퍼스 형태가 탄생한다.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구글이었지만, 그들의 비즈니스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고, 인터넷은 너무 빨리 커지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자금의 수혈이 필요했다. 이 작업을 위해 총대를 맨 것은 초기 투자자인 람 슈리람이었다. 슈리람은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인 세콰이어 캐피탈과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를 연결하였다. KPCB 는 인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컴팩, 넷스케이프, 아마존 등에 투자를 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시스코, EA, 오라클, 야후, 그리고 애플에 투자한 회사이다. 두 회사 모두 투자자금을 모을 때부터 아주 한정된 사람들이 아니면 돈을 낼 기회조차 주지않을 정도로 커다란 명성을 가진 곳들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회사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다. KPCB가 건물도 화려하고, 급진적이며 세련된 이미지를 준다면, 세콰이어 캐피탈은 오래된 빌딩에서 매우 보수적인 올드보이 분위기를 풍긴다. 그래서인지, KPCB는 미래가치를 높이보는 편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향후 높은 가치를 돌려줄 수 있는 회사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고, 세콰이어 캐피탈은 보다 현실적이고 사업내용이나 계획, 그리고 경영자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구글의 상대를 맡은 사람은 KPCB의 존 도어(John Doerr)와 세콰이어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 였다. 존 도어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스, 로터스, 컴팩, 넷스케이프 등의 투자를 결정하면서 업계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자리에 올라선 사람이고, 마이클 모리츠는 옥스포드 출신으로 <타임>지의 기자 출신이다. 마이클 모리츠의 경우 애플의 취재를 담당했다가 스티브 잡스의 독선적인 스타일을 비판하는 기사를 써서 스티브 잡스가 실제로 눈물을 흘리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게 만든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마이클 모리츠는 야후와 페이팔(PayPal)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들은 구글의 두 창업자와의 미팅을 통해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그들의 비전에 홀딱 반하게 되고, 투자를 하겠다고 결정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KPCB와 세콰이어 캐피탈은 서로 상대방이 투자한 회사에게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투자만 받으라고 구글의 두 창업자들을 설득하지만, 이들은 둘 모두에게 받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런데, 구글의 현재 평가액을 1억 달러로 두 벤처캐피탈이 공히 계산을 한 것이 돌파구를 찾아주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3의 벤처캐피탈이 1.5억 달러로 평가를 해준다면서, 둘 다 투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세르게이 브린의 으름장이 먹혀들면서 양쪽이 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투자를 하게 된 것이다. 1999년 6월 7일, 실리콘밸리의 양대 벤처캐피탈이 구글이라는 신생회사에게 각각 1250만 달러 씩 25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지분을 25% 확보했다는 뉴스가 세상에 나오면서, 스타 벤처기업으로서의 길을 구글이 열어가게 되었다.


(후속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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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 페이지(좌)와 세르게이 브린(우)



넷스케이프와 야후!로 대별되는 인터넷 업계에서 닷컴 버블이 몰락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와중에도 새롭게 세상을 바꿀 기업은 인터넷 상에서 새롭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현재까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기업인 구글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매릴랜드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과 수학을 전공하며 수석으로 졸업을 한 세르게이 브린은 1993년 미국 NSF(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스탠포드 대학의 컴퓨터 과학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였다. 활달한 성격과 천재적인 두뇌로 많은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 리더로 자리잡고 있었던 세르게이 브린에게 1995년 미시건 대학의 또 다른 천재가 스탠포드 대학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래리 페이지이다.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서 리딩을 하는 외향적인 세르게이 브린에 비해, 래리 페이지는 내성적이고 조용하지만 매우 치열하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런 래리 페이지에게 세르게이 브린은 다른 친구들이나 선후배와는 다른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들은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전공과목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 철학과 문화 등에 이르는 다방면의 지식에 대한 토론을 날을 지새기 일쑤였다. 둘이서 격론을 시작하면, 주위의 동료들은 이들을 피해다닐 정도로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었고, 이런 토론과 다툼을 지속하면서 두 사람은 어느 새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영혼의 동반자(soul-mate)로 느껴질 정도의 관계로 발전하였다. 

많은 대학원들과 마찬가지로 스탠포드 대학에도 조를 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목들이 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래리 페이지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웹 사이트를 서버에 긁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세르게이 브린은 영화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알고리즘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래리 페이지의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예상보다 인터넷의 크기가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프로젝트가 1년이 넘게 진행되었다. 래리 페이지는 좋은 논문은 인용이 많이 되는 논문이라는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을 웹 페이지의 랭킹을 매기는 데 이용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특정 사이트가 다른 사이트로 연결되는 백링크(BackLinks)를 조사하여, 각각의 웹 페이지가 얼마나 많은 사이트에 링크되었는지를 알아내고, 이것을 기본으로 랭킹을 매기자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래리 페이지는 이 프로젝트를 웹 사이트의 링크를 역으로 추적한다는 의미의 백럽(BackRub)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대해 세르게이 브린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래리 페이지가 구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세르게이 브린이 도움을 주면서 프로젝트에 조금씩 관여를 하다보니, 어느 덧 둘이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가능성을 알아본 테리 위노그래드 교수와 라지브 모트와니 교수 등의 지원으로 프로젝트는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1996년부터는 스탠포드 대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금새 이 서비스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대학원의 학생으로서 많은 비용을 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효율적인 분산처리를 위해 CPU와 메인보드 등을 구해서 간단히 인터넷 서버를 구축하고, 운영체제도 무료인 리눅스를 선택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선택하였다. 초창기 백럽(BackRub) 검색엔진 기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지랭크(PageRank) 알고리즘은 이들이 논문을 내기로 합의한 1998년 1월 이전까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BackRub 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이용하기로 결심하는데, 동료 중의 하나가 10의 100제곱을 뜻하는 구골(GooGol) 이라는 이름으로 방대한 데이터 검색을 한다는 이미지를 주자는 제안을 하였는데, 아쉽게도 이 이름은 도메인이 선점된 상태였다. 그래서, 대신 구글(Google)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구골보다 발음하기도 쉽고, 창조적인 느낌도 나는 이름이었기에 모두들 구글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였고, 서비스도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구글 서비스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도메인을 이용하여, http://google.stanford.edu 를 통해 접속하도록 하였는데, 하루 접속횟수가 1만 건을 넘어가면서 학교의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학교 네트워크 전체를 마비시키는 일까지 발생하자, 더 이상 학교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이 검색 서비스를 외부에 팔아넘기기로 합의하고 원매자를 찾아 나선다.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에 따르면, 당시만 하더라도 100만 달러 정도면 구글 서비스를 팔려고 했었다고 한다. 당시 검색엔진 부분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졌던 알타비스타(altavista)와 야후도 접촉했지만, 이들이 개발한 서비스를 인수하려는 기업은 없었다. 그 밖에도 검색에 관심을 가질만한 많은 인터넷 기업들을 접촉했으나 번번히 거절의 쓴 맛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지도교수인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들이 만든 서비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데이비드 체리턴은 이들의 창업을 도와주기로 하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데이비드 체리턴이 소개한 사람 중에서 앤디 벡톨샤임(Andy Bechtolsheim)은 한 눈에 이들의 서비스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아직 설립도 되지 않은 회사인 구글에게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즉석에서 끊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는 자신감을 불러넣어 주었고, 자신에게도 엄청난 부를 가져오게 만든다. 벡톨샤임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스를 공동창업한 인물로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고, 구글에 투자할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네트워크 장비회사인 시스코(Cisco)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뛰어난 직관은 검색이란 서비스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자처했던 야후나 알타비스타의 전문가들이나 경영진들보다 훨씬 나았다. 앤디의 10만 달러 수표를 받아든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스탠포드 대학교 인근의 한 차고를 사무실로 빌려서 사업을 시작한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기업, 구글은 이렇게 세상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렇지만 10만 달러라는 돈은 사실 이들이 사업을 전개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얼마 지나지않아 바닥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고, 이들에게는 또다른 투자자가 필요하였다. 이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역시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인 제프리 울만의 소개로 만난 엔젤투자자 람 슈리람(Ram Shriram)이다. 그는 넷스케이프에 투자를 해서 상당한 돈을 벌었고, 구글의 두 창업자를 만나 검색엔진을 시험해 보고난 뒤에 자신이 당시 최고의 검색엔진 회사인 야후, 인포시크, 익사이트 등에 매각을 해보겠다고 제안을 한다. 그들이 자신의 회사를 사지 않을 것이라고 두 명의 창업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람 슈리람에게 한 번 시도를 해보라고 맡기고 몇 개월을 기다렸다. 람 슈리람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당시 최고로 잘 나가는 인터넷 기업인 야후의 제리 양과 데이빗 파일로에게 소개를 하였는데, 이들은 구글의 검색엔진의 성능에 탄복을 하였지만 생각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검색엔진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검색결과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검색엔진을 채용할 경우 야후 사이트에서 너무 빨리 벗어날 수 있어서 되려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여러 페이지를 보면서 사이트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야 페이지 뷰가 올라가게 되고, 이렇게 올라간 페이지 뷰가 사이트에 달린 광고단가를 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은 당시 기준으로는 틀리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후의 두 창업자의 반응을 듣고서 람 슈리람은 되려 구글이라는 회사가 진정한 투자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 미팅에서 돌아온 슈리람은 구글의 회사설립 작업에 관여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직접 25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여 앤디 벡톨샤임에 이은 두 번째 구글의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는 현재의 수익모델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커다란 기회를 날려버리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구글의 세 번째 투자자는 앤디 벡톨샤임을 두 창업자에게 소개한 데이비드 체리턴 교수이다. 그리고, 네 번째 투자자는 바로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Jeff Bezos)이다. 람 슈리람과 아마존의 일로 잘 알고 지내던 제프 베조스는 구글의 두 창업자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바로 소개를 해 달라고 해서 만난 뒤에 즉시 수표에 서명을 하고 구글의 투자자가 되었다. 제프 베조스에 따르면 구글의 두 창업자들의 고객에 초점을 둔 비전에 반했고, 이들의 비전을 믿고 주저없이 투자를 한 것이라고 한다. 제프 베조스에게도 이런 무모한 도전을 하는 젊은이들의 비전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거의 모든 IT의 역사, 정지훈저, 메디치미디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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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의 무인자동차. 처음에는 IT회사의 잉여력을 이용한 미래 프로젝트로 보였는데,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더 이상 우습게 볼 일이 아닌 듯 싶다. 바야흐로 스마트폰이나 테블릿으로 자동차를 부리고, 나를 태우고 원하는 목적지로 가는 시나리오가 현실화될까? 최근 구글의 움직임을 보자면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구글의 투자사업 부분인 구글 벤처스는 우리나라에도 고급 택시 서비스를 시작한 우버(Uber)에 수백 만 달러를 이미 투자한 상태다. 그리고, 우버에서는 구글의 투자가 전략적이며, 전 세계의 정부와 규제관련한 상황 등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처를 하는 것 등의 협력을 포함한다고 투자를 받을 당시에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와중에 최근 또 하나의 커다란 소문이 터져나왔다. 구글이 더 이상 대형 메이저 자동차 회사의 자동차에 무인자동차 옵션을 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무인자동차를 설계 및 개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를 제조하는 파트너에 대한 소문도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었는데, 컨티넨탈 AG와 마그나 인터내셔널이 그 대상으로 이는 구글과 폭스콘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상황을 조합하면 구글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될 지 윤곽이 잡힌다. 무인자동차를 출시해서 일반에게 판매하기 보다는 무인택시 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글은 커다란 자동차 메이커와 파트너십을 추진했고, 무인자동차를 일반에게 판매하는 협상을 진행했지만 어떤 이유에서 협상이 결렬되었고, 곧바로 자체적인 자동차 주문생산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과거 삼성전자 등과의 협상에서 실패한 이후에 무명이었던 대만의 HTC를 통해 최초의 안드로이드폰인 G1을 출시했던 것과도 조금은 비슷한 진행양상이다. 아마도 구글의 이러한 움직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요 자동차 회사들에게 상당한 압력이 될 전망이다. 그러면서도 구글의 방식대로 사업을 전개한다면, 주요 자동차 회사들과 연대의 가능성은 아마도 열어놓을 듯하다.


물론 무인자동차와 관련한 기술들을 자동차 회사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상당한 수준의 기술축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그 어떤 메이저 자동차 회사들도 '무인자동차'를 출시한다기 보다는 안전한 운전이나, 주차,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서 잠시 운전을 해 주는 정도의 상황을 상정하지 무인자동차가 팔리거나, 다른 종류의 혁신적인 산업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런 차이점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찌되었든 자동차 회사들은 자동차를 많이 팔아야 비즈니스가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무인자동차가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인 혁신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 비해 구글이 꿈꾸는 소위 로보택시(Robo Taxis) 아이디어는 사람들이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 언제나 불러서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상정한다. 이를 통해 이동의 문화와 과도한 차량의 소유를 줄일 수 있으며, 동시에 자동차 사고도 덜 나고, 도로도 차로 덜 붐비게 되는 미래 시나리오를 그린다. 이는 자동차 회사들이 절대로 원하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2012년 구글은 로보택시 시나리오가 현실화 될 경우 이를 운영할 가능성이 있는 미국의 도시에 대해 조사한 바가 있다고 한다. 구글이 초고속 통신망 서비스인 구글 파이버(Google Fiber)를 이와 유사한 조사를 통해 성공적으로 캔자스 시티에 먼저 사업을 시작하고, 이제 텍사스주의 오스틴(Austin)과 유타의 프로보(Provo)로 확대를 한 것과 마찬가지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법률개정과 보험과 관련하여 이미 구글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 플로리다와 워싱턴 DC에서 합법적인 라이센스와 테스트 주행이 가능하게 만든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로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구글이 수백 대 정도를 회사의 이름으로 주문해서 제작하고, 이를 구글 캠퍼스의 직원들의 출퇴근 용으로 먼저 테스트를 무인택시 사업을 시작한 뒤, 주변의 다른 기업들을 대상으로 확대하는 B2B 전략을 펼치면서, 동시에 첨단기술에 대한 수용도가 높은 실리콘 밸리의 마운틴 뷰, 팔로알토, 산타클라라시 등과 네바다의 라스베가스를 중심으로 사업을 확대시키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고 본다. 더 이상 구글의 무인자동차 사업을 단순한 젊은이들의 치기어린 맹목적인 꿈으로만 치부하다가는 스마트폰 혁명 이상의 커다란 변화가 나타날 때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자료:


Google’s Self-Driving Car Is More Disruptive Than You Think

Google Designing Its Own Self-Driving Car, Considers ‘Robo Ta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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