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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한 명의 거장을 만나볼 시간이다. 바로 필립 K. 딕(Philip K. Dick)이다. 그는 생전에는 생각보다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사후에 재평가를 거쳐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이라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심지어 SF문학상 중에는 그의 이름을 딴 필립 K. 딕 기념 어워드가 있을 정도다.


1928년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태어난 지 1달 만에 쌍둥이 누이를 잃었고, 그 이후 부모가 이혼하고 캘리포니아의 탁아소에 다니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는데, 이것이 그의 작품세계와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10대에 다닌 기숙학교에서도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공포증과 공황장애 등이 생겨서 평생동안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음식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해서 결국 휴학을 하고 음반, 악보, 전자기기를 취급하는 '아트 뮤직'에서 일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특히 아트 뮤직의 주인인 허브 홀리스를 멘토이자 아버지와 같이 여겼다고 하는데, 필립 딕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전제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따뜻한 마음의 '보스'들이 그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독립을 한 뒤에는 로버트 덩컨, 잭 스파이시, 필립 라만티어 등의 작가들과 창고를 개조한 공동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 때 룸메이트들 대부분이 동성애자이자 작가 특유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던 사람들이라 이들의 사상도 필립 딕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말년에는 조현병으로 크게 고생을 했는데, 그 때문에 가족과 동료 작가들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조현병의 여파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그의 작품들이 사후에야 큰 인기를 끌면서 영화화 등의 미디어 믹스가 시작된 것은 그가 살아있을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과 동시에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워낙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반전운동을 열심히 할 때에는 가택침입 사건이 일어나자 CIA의 소행이라고 FBI에 신고를 하기도 했는데, FBI에서 그의 반전운동 이력을 알고 이를 무시하였다. 이후 정체불명의 협박 전화가 계속되고 정부와 사법당국에서 계속 모른 척하자 캐나다로 도피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이 연재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스타니스와프 렘 (솔라리스로 유명하다) 이 필립 딕을 칭찬하자 렘을 KGB 스파이라며 CIA에 신고를 했던 이력이다. 


SF작가로의 이력은 1951년 <판타지 앤드 사이언스 픽션>지에 단편 <루그 (Roog)>를 쓰면서 데뷔했다. 그렇지만 1953년 우울증, 공황장애, 공포증 등이 재발하면서 치료제로 암페타민을 처방받았는데, 이 약은 치료제이기도 했지만 사실 상 그를 작가로서 많은 일을 하게 만든 에너지원과도 같은 역할도 같이 했다고 한다. 그 이후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SF소설가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생전의 필립 딕은 많은 수의 작품을 발표하는 다작 작가로 유명했다. 



세기 말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가


그의 작품은 디스토피아적인 세기 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선택한 소재들은 낯설면서도 인간에게 예측하기 어려운 불행을 가져다주는 스토리 들이 많았다. 기업이나 국가들 역시 개인을 파멸시키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는데, 각 개인은 도구로 이용되면서 동시에 기억의 상실과 조작, 자아의 해체 등을 겪는 경우도 많고, 인간의 가치가 하찮게 취급되는 스토리들이 여러 작품들에 녹아 있다. 심지어 미래에 만나게 될 외계인과 외계문명도 어둡게 그린다. 이들은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 하고 사회가 퇴폐하고 노쇠한 멸망직전의 문명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대적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다.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인간의 적대 세력이거나 인간에게서 탈출하여 복수를 하고자 하는 등의 존재로 그려진다.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로봇들도 가끔 나온다. 외계인들이 파견한 인류를 멸절시키기 위한 무기에서 스스로 가짜 기억을 주입한 도망자 안드로이드 등 다양한 염세적인 로봇들이 등장한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묘사를 했는데, 인공지능을 탑재한 자동차가 가전제품 등이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운전자가 술을 마시면 운전을 못하게 하는 자동차, 동전을 넣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는 현관문 등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인공지능 제품들이 인간을 귀찮게 하거나 피해를 주는 스토리가 자주 묘사된다. 대체로 결말은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거나 상상하기 힘든 반전으로 끝은 맺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작품 중에 별별 상황이 다 발생했는데, 알고보디 꿈이더라~  이런 식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TV판이 이런 식의 결말을 처음에 시도했었다). 


필립 딕은 SF소설을 썼지만, 그 내부에 자아정체성과 기억의 혼란과 같은 정신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거의 모든 작품에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현실인가?", "내 기억은 진짜인가?"와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이는 그의 정신병력과 복용했었던 수 많은 정신질환과 관련한 약물 때문에 겪은 환각과 정신적 능력의 각성, 우울함 등의 불안정성이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질문들이 현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면서 되려 후세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대표작은 1963년 휴고상을 수상한 <높은 성의 사나이 Man in the High Castle>였다. 이 작품은 소위 대체역사소설인데,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추축국이였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승리했다는 가정을 하고 독일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미국과 미국인의 일상을 그려냈다. 그렇지만, 그가 정말 유명해진 것은 헐리우드의 SF영화들이 그의 단편들을 원작으로 삼아 여러 대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가 사후에 더 빛을 보게 된 것에도 그의 작품 스토리들이 헐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의 구미를 잘 당겼기 때문이다.



헐리우드 SF영화계의 스타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먼저 헐리우드에서 영화화가 되었고, 사이버펑크 쟝르의 대표작으로 불린 것이 바로 1982년 리들리 스콧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다.  이 영화는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이라는 단편을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것이 필립 딕의 인생의 궤적을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사이버펑크물이라면 일단 이 작품을 모두 벤치마킹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다. 주제의식도 심오해서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레플리칸트(Replicant)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성의 정의를 묻는 마지막 장면은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딕의 원작과 다른 부분도 많아서 리들리 스콧은 사실 상의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배경은 2019년의 LA로 런던형 스모그로 가득찬 어둡고 암담한 도시로 그려진다. 화려한 네온사인과 비가 내리는 음습하고 어두운 거리, 국적을 알 수 없는 옷차림 ... 이런 배경은 일본 애니메이션인 아키라, 공각기동대, 버블검 크라이시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는 게임인 폴아웃 3도 이를 패러디했으며, 폴아웃 4에서는 이를 직접적인 오마쥬로 처리했다. 아래는 언제봐도 인상적인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토탈리콜(Total Recall) 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나 영화화가 되었다. 특히 1990년 폴 베호벤이 감독하고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샤론 스톤 등이 등장한 첫 번째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했다. 2084년 더글러스 퀘이드(Douglas Quaid)는 미모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지만, 매일 밤 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이를 알기 위해 우주여행을 다녀온 것 같이 뇌 속에 기억을 주입시켜 주는 리콜이라는 여행사를 찾아갔다가 과거의 기억을 되찾게 되어 화성의 반군으로 다시 복귀하게 되는 내용이다. 특히 당시 특수효과가 절묘하게 활용되어서 호평을 받았는데, 멋진 예고편이 흥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스캐너 다클리 A Scanner Darkly>, <스크리머스 Screamers>, <임포스터 Imposter>, <페이첵 Paycheck>, <넥스트 Next>, <컨트롤러 The Adjustment Bureau> 등이 모두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대작 헐리우드 SF영화가 있는데, 바로 2002년에 개봉한 <마이너리티 리포트 Minority Report>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하고,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아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인데, 특히 배경과 도입된 기술 등이 2054년의 워싱턴 D.C.에 있음직한 것들로 개연성 있게 작업하기 위해 스티븐 스필버그가 1999년 4월 과학기술자와 미래학자 등과 제작진이 같이 씽크탱크까지 구성했던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등장한 여러 기술들이 실제로 구현되고 상용화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3D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생체인식 기술, 지능형 교통시스템(ITS, Intelligent Transport System) 등의 묘사는 매우 정교하다. 무엇보다 프리크라임 시스템을 조작하는 동작인식 인터페이스 기술은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고,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에 도입된 키넥트(Kinect) 기술을 설명할 때 이 영화가 언급되기도 하였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영화에서 10년 뒤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Sci-Fi 드라마 시리즈로도 2015년 폭스 TV에서 방영되었는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시즌 1으로 전체 시리즈는 취소되었다. 그의 장편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높은 성의 사나이 The Man in the High Castle>은 영화로는 제작되지 못했지만, 2016년 화려하게 Sci-Fi 드라마로 등장했다. 현재 시즌 2까지 방영되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으며 순항하고 있다. 





일부 작품은 필립 딕의 원작을 표기하고 있지 않지만, 사실 상 가져온 것도 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 이다. 이 작품은 필립 딕의 <어긋난 시간 Time Out of Joint>의 오마주라는 것이 이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을 잡아두기 위해 가짜 마을을 만들고 주인공의 기억을 조작하여, 평범한 마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인 것으로 속인다는 내용이다. 픽사의 <토이스토리>와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토이즈>도 필립 딕의 <전쟁놀이>의 오마주라는 시각이 많다. 그 밖에 클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그의 대표작 <메멘토 Memento>, <인셉션 Inception>이 필립 딕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필립 K. 딕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정신질환과 대인관계, 약물과 가난이 점철된 삶을 살았지만, 현대의 헐리우드가 가장 사랑한 단 한 명의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그런 작가다. 이는 어찌보면 필립 딕이 그려냈던 암울한 미래상이 현대인들에게 더욱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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